살을 에어내는 듯한 북부의 얼음바람이 대강당의 웅장한 대리석 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끝을 얼려버릴 듯 거세게 몰아쳤다.
화려하게 빛나던 황금빛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고요한 적막과, 그 적막을 깨부수며 다가오는 칠흑 같은 갑주의 서슬 퍼런 쇠 긁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카이로스 아카데미 역사학 신임 교수, 엘리샤 폰 아르덴.”
단상 위에 우뚝 선 사내,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의 차가운 음성이 대강당의 높은 천장에 부딪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검은 흑발 사이로 얼음빛 청안이 번뜩였다. 그 시선은 정확히 문가에 멈춰 선 엘리샤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허리춤에 찬 검은 마검의 자루를 일정하게 탁, 탁 두드렸다. 그 불길하고도 규칙적인 소리가 심장박동을 강제로 쥐어짜는 듯한 기이한 압박감을 만들어냈다.
‘아니, 출근 첫날부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엘리샤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평화로운 아카데미 교수직으로 위장해 정년퇴임 비자금을 모으고 남부 휴양지에서 안락한 은퇴 생활을 즐기려던 계획이, 임용식 문을 열자마자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내는 원작에서 반란군의 씨를 말리기로 악명 높은 북부의 사냥개이자 제국의 최강자, 칼리안 대공이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겉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문이 멸문당했을지언정 아르덴 가문의 뼈에 새겨진 기품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감싸 안은 검은 실크 로브의 깃을 우아하게 다듬으며, 가슴팍에 달린 사파이어 브로치를 매만졌다. 차가운 보석의 감촉이 머리를 맑게 식혀주었다.
스릉—!
그때, 칼리안이 허리춤에서 마검을 뽑아 들었다.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검푸른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일직선으로 뻗어나와 엘리샤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기 직전 멈추어 섰다.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완벽하고도 치명적인 검로였다. 칼끝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냉기가 목줄기의 솜털을 꼿꼿이 세웠다.
“아르덴의 더러운 피가 이 신성한 아카데미에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받았다.”
칼리안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그는 검날을 통해 흘러나오는 마력의 진동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거나, 혹은 아르덴 가문 특유의 사악한 '마기'를 품고 있을 때 발생하는 미세한 파동을 낚아채려는 명백한 덫이었다.
‘나를 시험하겠다 이거지?’
칼날이 목을 겨누는 절체절명의 순간, 엘리샤의 눈동자 뒤편에서 푸른빛의 스크린이 조용히 떠올랐다.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절대적인 비전, [제국 평판 장부(Ledger)]였다.
[ 시스템 가동: 대상 '칼리안 헤스벨트' 분석 중... ] [ 신용도: 98/100 (극도로 높음, 원칙주의자) ] [ 현재 심리 상태: 의심 92%, 사냥 본능 85%, 피로도 40% ] [ 약점 및 트라우마: 북부 카르파 궁령에서의 마수 토벌전 당시의 배신 사건, 극도의 마력 예민성 ]
장부를 열어 정보를 갱신하는 순간, 엘리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검은 입자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장부 사용의 대가인 '악녀 지치(마기)'였다.
‘안 돼. 여기서 이 마기가 흘러나가면 저 미친 사냥개에게 내 정체를 완전히 들키게 된다.’
엘리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전생에서 온갖 악질 상사들의 억까와 구조조정 면접을 버텨냈던 K-직장인의 초인적인 정신력이 발동했다. 그녀는 전신의 마력 회로를 강제로 폐쇄하고, 뿜어져 나오려는 마기를 영혼 가장 깊숙한 곳으로 눌러 담았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표정만큼은 대리석 조각상처럼 차갑고 우아하게 유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목을 겨눈 칼날을 무시한 채 품 안에서 두꺼운 가죽 제본 출석부를 꺼내 들었다. 사각거리는 종이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감사관 각하.”
엘리샤의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고 맑았다. 얼어붙은 대강당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맑은 유리 구슬이 구르는 듯 청아하게 울렸다.
“이곳은 황실 직속의 제국 감사원이 아니라,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역사학 대강당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부로 정식 임용된 역사학 정교수 엘리샤 폰 아르덴이지요.”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출석부의 모서리를 쓸어내렸다.
“제국법 제12조에 의거, 아카데미는 자치령으로서 학문의 자유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아무리 황제의 사냥개라 불리는 헤스벨트 대공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물증 없이 정교수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은 아카데미 평의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입니다만.”
칼리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는 엘리샤의 눈동자를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그의 살기와 마검의 냉기를 마주하면 사시나무 떨듯 떨거나,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야 정상이었다. 설령 아르덴의 잔당이 신분을 위장한 것이라 해도, 영혼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에 질린 마력의 흔들림이 감지되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달랐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마치 거울처럼 맑고 고요했으며, 그 어떤 미세한 마기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귀찮은 잡상인을 대하는 듯한 은근한 오만함과 기묘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이질적이군.’
칼리안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검 자루를 쥔 힘을 미세하게 조절했다. 사냥감으로서의 흥미가 그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무고한 교수이거나, 혹은 그의 감지망조차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상상 이상의 괴물 악녀이거나. 어느 쪽이든 예사롭지 않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학문의 자유라.”
칼리안이 낮게 읊조리며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마검이 검집으로 들어가자, 대강당을 지배하던 숨 막히는 냉기가 한풀 꺾였다. 하지만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좋소, 엘리샤 교수. 귀하의 그 당당함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도록 하지. 마침 오늘이 귀하의 첫 전공 강의 오리엔테이션이라 들었는데, 내 손수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배움을 갈구하는 자에게 강의실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는 법입니다, 감사관 각하.”
엘리샤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제발 그냥 꺼져라’를 백만 번쯤 외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황실의 가장 품격 있는 귀족 학자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강당의 무거운 대리석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자, 구석에 얼어붙어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제국 내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실크와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아카데미 로브를 입은 그들의 얼굴에는 신임 교수에 대한 호기심과, 대역죄인 가문 출신이라는 엘리샤를 향한 노골적인 멸시가 뒤섞여 있었다.
엘리샤는 교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그녀의 검은 머리칼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교탁 위에 출석부를 올려놓고, [제국 평판 장부]를 다시 한번 은밀히 활성화했다.
화면에 학생들의 이름과 신용도, 그리고 그들이 속한 학파의 구도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서 나타났다.
[ 분석 완료: 카이로스 아카데미 역사학 전공 수강생 구도 ] - 귀족 학파 (수장: 헨리 폰 벨몬트 부작): 세드릭 아르덴의 사주를 받아 엘리샤의 자질을 시험하고 깎아내리려 함. 비율 60%. - 황실 학파: 감사원의 눈치를 보며 중립을 유지하려 함. 비율 40%.
‘과연, 나를 쫓아내려고 작당 모의를 해두셨군.’
엘리샤는 마음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특히 귀족 학파의 중심에 앉아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는 금발의 청년, 헨리 폰 벨몬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평판 장부를 클릭하자 치명적인 정보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 헨리 폰 벨몬트 ] - 신용도: 45/100 (불량) - 특이사항: 최근 황실 금지 도박장에서 거액의 빚을 짐. 학술제 제출 예정인 논문이 하급 조교의 연구를 대필한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 확보 가능.
엘리샤는 깃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가볍게 굴렸다. 그녀의 입가에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K-직장인의 생존 본능이 속삭였다. 들이받는 놈은 가장 아픈 곳을 골라 밟아줘야 다신 기어오르지 못한다고.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엘리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1번, 헨리 폰 벨몬트 자제.”
호명당한 헨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삐딱하게 일어섰다. 그는 대강당 뒤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칼리안 대공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 교수님. 그런데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몰락한 반역자 가문의 핏줄에게 우리가 제국의 위대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질이 의심스러운 분 밑에서 배울 만큼 우리 벨몬트 가문이 한가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대강당 안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몇몇 귀족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동조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칼리안의 얼음빛 눈동자가 엘리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한층 더 깊어졌다.
엘리샤는 화를 내는 대신, 천천히 출석부를 덮었다.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대강당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벨몬트 자제.”
엘리샤는 교단 아래로 한 걸음 내려왔다. 그녀의 검은 실크 로브가 우아하게 찰랑였다.
“제국의 역사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과오를 통해 현재의 파멸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영토 확장기 당시 벨몬트 가문의 시조가 저질렀던 ‘재정 장부 조작’과 같은 어리석은 탐욕 말이지요.”
헨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게 무슨 무례한…!”
“또한.”
엘리샤는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대강당의 모두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가문의 영광을 이어받아야 할 자제가, 최근 황실 금지령이 내려진 지하 도박장에서 가문의 인장이 찍힌 약속어음을 남발하고 다닌다거나…… 다음 주 학술제에 제출할 논문을 가난한 장학생의 고혈을 짜내 대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과연 그 가문의 역사에 어떤 오명으로 기록될지 궁금하군요.”
“너, 너 어떻게 그걸…!”
헨리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 비밀은 오직 그와 대필 조교, 그리고 사채업자들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런데 갓 부임한 낙하산 교수가 어떻게 이를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단 말인가.
대강당의 학생들은 물론, 뒤편에서 관망하던 칼리안 대공의 눈빛조차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리샤는 헨리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역사는 언제나 진실을 기록하는 법이랍니다, 벨몬트 자제. 그러니 배움이 부족하다 여겨진다면, 부디 내 강의를 성실히 듣고 올바른 삶의 궤적을 찾길 바랍니다. 자, 자리에 앉으세요.”
헨리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족 학파의 선봉이 단 한 마디에 완벽하게 진압당하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 학생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대공의 살벌한 칼날 앞에서도, 기고만장한 명문가 자제의 도발 앞에서도, 엘리샤 폰 아르덴은 완벽하게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학술적 지략에 강의실 안의 공기가 완전히 재편되었다.
엘리샤는 교단으로 돌아가 다시 깃펜을 잡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제국 역사학의 세부 갈래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우아하고도 막힘없는 강의가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내내, 학생들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깃펜을 움직였다. 대공의 살기마저 학업에 대한 열기로 덮어버린 완벽한 강의였다.
마침내 종소리가 울리며 첫 강의가 끝났다.
엘리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출석부와 책을 챙겼다. 학생들은 경외와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강의실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후, 완벽했어. 이 정도면 첫 단추는 제대로 꿴 셈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교탁을 정리하던 엘리샤가 몸을 돌려 대강당을 나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척, 척, 척—!
칠흑 같은 갑주를 입은 헤스벨트 대공가의 정예 기사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앞길을 촘촘하게 가로막았다. 서슬 퍼런 강철의 장벽이 그녀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틈새를 열며, 칼리안 대공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은 마검의 자루를 탁, 탁 두드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는 잔인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강의는 아주 인상 깊었소, 엘리샤 교수. 귀하의 그 대단한 정보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무척이나 호기심이 생기는군.”
칼리안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차가운 숨결이 닿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감사관으로서 정식으로 요청하지. 귀하의 그 신통방통한 주둥이와 숨겨진 비밀을…… 대공가 직속의 비밀 심문실에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군. 동행해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