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목줄에 닿는 칼날은 지독하게도 차가웠다. 서걱거리는 쇠붙이의 마찰음이 귓전을 때렸고, 단두대의 거대한 칼날이 중력을 따라 떨어지기 직전의 그 찰나, 엘리샤는 눈을 떴다.

“……하아, 하아.”

달아오른 숨결이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귓가에 맴돌던 참수형의 환청은 사라졌지만,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여전히 생생했다. 엘리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루아침에 낯선 세계의 악녀로 눈을 떴을 때의 충격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손가락 끝은 고된 노동의 흔적 대신, 최고급 수입산 오팔 반지와 벨벳 레이스로 사치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엘리샤 폰 아르덴.

원작 소설 속에서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가문과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의 악녀. 그것이 바로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겉껍데기였다. 가문은 이미 반역죄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공중분해되기 직전이었고, 살아남은 가솔들은 제 한 목숨 건사하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국 퇴임 연금도 못 받고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는 엔딩이라니, 내 사전에 그런 개죽음은 절대 사양이야.’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자 생존 본능으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포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국경을 넘어 도망치다가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머리채를 잡히느니, 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해고 불가능한 철옹성을 찾아 정착하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 그 철옹성이 바로 제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역사학과 교수 자리였다.

엘리샤는 화장대 거울을 응시했다. 은빛이 감도는 백금발 머리칼이 어깨 위로 물결치듯 흘러내렸고, 자수정처럼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실크 드레스 위로 덧입은 학술원 정교수의 검은 로브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기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퉁기자, 허공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더니 반투명한 푸른빛의 스크롤이 펼쳐졌다.

[제국 평판 장부(Ledger)를 활성화합니다.]

그것은 아르덴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전이자, 빙의와 함께 엘리샤의 영혼에 각인된 고유한 시스템이었다. 장부 위로 아카데미 내부 인물들의 이름과 신용도, 숨겨진 약점, 그리고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정교한 표의 형태로 낱낱이 표기되었다. 이 장부만 있다면 제아무리 교활한 정치가나 오만한 귀족이라 할지라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 장부의 화면이 갱신되며 지면을 따라 붉은 숫자들이 깜빡이자, 엘리샤의 손가락 끝에서 검붉은 연기 같은 입자가 스르륵 피어올랐다.

‘악녀 지치(마기).’

장부를 열어 인과율을 비틀 때마다 영혼에서 방출되는 이 검은 기운은 평소에는 무해했으나, 마력 감지력이 고도로 발달한 사냥개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추적 신호였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자자한 북부의 지배자,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의 레이더에 걸리는 날에는 그 즉시 목덜미가 물어뜯길 터였다.

“수지타산이 참 안 맞는 능력이네. 쓸 때마다 목숨 값을 담보로 잡아야 하다니.”

엘리샤는 깃털 펜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불신주의자인 그녀에게 이 장부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아군이었다. 인간의 말은 믿지 않는다. 오직 수치화된 손익계산서만이 진실을 말해줄 뿐이니까.

그때, 연구실의 묵직한 오크나무 문이 예의 없이 거칠게 열렸다.

“여전히 태평하군, 엘리샤.”

가시 돋친 목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온 사내는 세드릭 아르덴이었다. 몰락해 가는 아르덴 가문의 방계이자, 자존심만 하늘을 찌르고 속은 텅 빈 비열한 겁쟁이. 그는 불안해질 때마다 엄지손톱 밑의 하얀 살을 피가 배어 나오도록 강박적으로 뜯어내는 가학적인 습벽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엄지손톱 끝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엘리샤는 사파이어 브로치가 장식된 칼라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세드릭의 구두 끝에서부터 지저분하게 구겨진 셔츠 깃까지 느릿하게 훑고 지나갔다.

“아카데미 연구실은 사적인 대화방이 아니야, 세드릭. 노크하는 법을 가문에서 배우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기초 예절 교육을 신청하는 게 어때?”

“예절? 지금 가문이 반역죄로 목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따위 소리가 나와? 네가 어떻게 이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를 꿰찼는지 모를 줄 알아? 가문의 남은 자금을 죄다 털어 총장단에 뇌물로 바친 거잖아!”

세드릭이 책상을 탁 치며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질투와 불안, 그리고 비열한 탐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엘리샤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세드릭의 머리 위로 평판 장부의 붉은 텍스트가 떠올랐다.

[세드릭 아르덴 / 신용도: 12 (최악) / 최근 행적: 황실 감사원에 아르덴의 잔당을 밀고해 사면권을 얻으려는 계획 수립 중 / 약점: 도박 채무 5,000골드]

‘역시나 더러운 쥐새끼군.’

엘리샤는 마음속으로 그의 가치를 '영(0)'으로 수렴시켰다. 신용도 12짜리 인간과는 단 한 줄의 계약서도 섞지 않는 것이 K-직장인의 철칙이다.

“뇌물이라니, 세드릭. 나는 엄연히 제국 역사학 학위와 공인된 논문으로 임용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어. 네가 도박장에 처박혀 가문의 이름으로 빚을 지고 다닐 때, 나는 내 살길을 도모했을 뿐이지.”

“닥쳐! 네가 잘나서 여기 있는 줄 알아? 대공이 이끄는 감사원이 아카데미 정문 앞까지 들이닥쳤다. 감사관들이 아르덴의 핏줄을 샅샅이 뒤지고 있어. 너도 결국 붙잡혀 단두대로 가게 될 거다. 하지만…….”

세드릭의 시선이 엘리샤의 책상 위를 탐욕스럽게 훑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잉크웰 옆에 놓인 고대 은제 깃펜이었다. 아르덴 가문이 전성기 시절 고대 유적에서 발굴해 낸 유물로, 깃털 끝에 정교한 은실 루비 장식이 박혀 있어 그 자체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네가 가진 가문의 유물들과 비자금의 행방을 내게 넘긴다면, 내가 특별히 감사원에 입을 잘 놀려 주마. 어때?”

세드릭은 말을 마치는 동시에, 엘리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짐짓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은제 깃펜을 슬그머니 자신의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펜을 훔치는 그의 꼬락서니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조잡했다.

엘리샤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으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의 손목을 낚아채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실소를 터뜨리며 턱을 괴었다.

‘가져가라, 쥐새끼야. 그 펜이 네 목을 옭아맬 가장 확실한 밧줄이 될 테니까.’

이미 장부의 연산 작용을 통해 6화 뒤에 벌어질 칼리안의 기습 심문 시나리오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비열한 사촌이 훔쳐 간 은제 깃펜에 남겨질 절도 흔적과 마력 반응. 그것을 평판 장부로 증명해 세드릭을 위증죄로 단두대에 먼저 처넣는 미래가 그려졌다. 지금 당장 푼돈 같은 펜 하나를 찾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확실한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네 제안은 거절하겠어, 세드릭. 내 안전은 내가 지키니까. 이제 그만 나가 줄래? 임용식 시간이 다 되었거든.”

“흥, 고고한 척하기는. 언제까지 그 잘난 척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세드릭은 소매 속의 은제 깃펜을 꾹 쥐며 비열한 미소를 지은 채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엘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놓인 가죽 장정의 책자로 향했다.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헌장과 제국법 규칙이 적힌 서적이었다. 엘리샤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페이지를 넘겨 특정 조항에 멈추어 섰다.

[제국법 제7조 4항: '종신 교수(Tenured Professor)'의 신분을 획득한 학자는 황제 직속의 체포령이나 이에 준하는 중대 범죄의 명백한 물증이 없는 한, 학술적 면책 특권을 보장받는다. 아카데미 평의회의 전원 동의가 없는 한 어떠한 국가 권력도 그를 해임하거나 감금할 수 없다.]

“종신 교수…….”

입가에 맴도는 단어가 달콤했다. K-직장인에게 있어 ‘정년 보장’과 ‘면책 특권’이라는 단어의 조합만큼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황제조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신분 보장. 감사원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아르덴의 잔당을 찾아다닌들, 그녀가 종신 교수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들의 칼날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조교수 임용을 앞둔 신참에 불과하지만, 완벽한 강의와 대체 불가능한 학술적 성과를 쌓아 올린다면 종신 교수의 자리는 결코 꿈이 아니었다.

똑, 똑.

“교수님, 멜리사입니다. 신임 교수 임용식이 거행될 대강당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이미 다른 정교수진과 총장단이 입장을 시작했습니다.”

문밖에서 수석 조교 멜리사 로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샤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어깨를 감싼 검은 실크 로브, 가슴팍에서 차갑게 빛나는 사파이어 브로치,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단호한 눈빛.

비록 가문은 파멸의 구렁텅이에 처박혔고 사방이 적들로 가득하지만,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아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이 아카데미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할 것이다. 그것이 K-직장인으로서 물려받은 지독한 생존 방식이었다.

“가자, 멜리사.”

엘리샤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그녀의 당차고 우아한 걸음걸이에는 몰락한 가문의 그늘 따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나치는 조교들과 하급 학자들이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에 압도되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가문이 망했어도 아르덴의 고귀함은 뼈에 새겨져 있는 법이었다. 엘리샤는 그들의 경외 어린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대강당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대강당의 거대한 대리석 문 앞에 도달했다. 황금빛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 너머로 임용식을 축하하는 잔잔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리샤는 심호흡을 한 뒤, 양손으로 묵직한 대리석 문을 힘차게 밀어젖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서 흘러나와야 할 따뜻한 온기와 음악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대신 대강당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살을 에는 듯한 북부의 얼음바람이었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지독한 한기가 사방으로 몰아쳤고, 대강당 내부의 샹들리에 불빛마저 얼어붙은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강당의 중앙 통로에는 아카데미의 경비병들이 무장 해제당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주위를 칠흑 같은 갑주를 입은 북부의 군세가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푸른 눈의 늑대 문양. 헤스벨트 대공가의 사병들이었다.

그리고 그 군세의 선두, 단상 앞에 우뚝 서 있는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칠흑처럼 어두운 흑발 아래로 드러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차가운 얼음빛 청안.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허리춤에 찬 검은 마검의 자루를 일정하게 탁, 탁 두드리고 있었다.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

그가 빙한의 기운을 뿜어내며 차가운 시선으로 문가에 선 엘리샤를 정확히 지목했다. 대강당의 모든 공기가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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