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온 선혈이 백색 대리석 제단 위로 투명한 잉크처럼 번져 나갔다. 턱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본능적으로 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가슴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서지고 있었다.

[경고: '악녀 지치(마기)' 수치 한계치 돌파 (95%)] [경고: 외부 마법 스크롤의 저주 공명으로 인해 체내 마력이 과부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눈앞의 푸른색 시스템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바스토프 추기경, 그 늙은 구렁이 같은 영감이 사흘 전 제단에서 활성화해 둔 고대 저주가 내 영혼의 가장 약한 틈새를 정확히 파고든 모양이었다. [제국 평판 장부]를 억지로 기동해 청문회의 판세를 뒤흔든 대가가 이렇게 치명적인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아니, 안 돼. 일 안 하고 남부 휴양지에서 평생 뒹굴며 살겠다는 내 삼류 악녀식 은퇴 계획이 이렇게 허망하게 단두대도 아니고 각혈사로 끝날 수는 없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강당 전체를 감싸고 있던 황실 수호대의 마법 장벽이 유리창이 깨지듯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콰앙—!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은백색의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엘리샤!”

그것은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눈앞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남자의 형상이 고스란히 망막에 박혔다. 검은 벨벳 제복 위에 정교하게 수놓아진 북부 헤스벨트 가문의 은빛 늑대 문양. 단단한 어깨를 감싼 퍼 코트가 사나운 마력의 바람에 사정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칼리안 헤스벨트 대공.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북부의 지배자가, 지금 이성을 잃은 눈빛으로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거친 사슴 가죽 장갑을 낀 단단한 손가락이 내 가녀린 어깨를 낚아채듯 안아 올린 것은, 내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정신 차려. 내 눈을 봐, 엘리샤 폰 아르덴!”

칼리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은백색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대강당의 웅장한 기둥들을 사정없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대공의 정서적 격양이 그의 고질적인 마력 폭주를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은백색의 날카로운 마력 파편들이 날카로운 바람이 되어 청문회장의 귀족들과 사제들을 덮쳤다.

“꺄악! 대공이 폭주한다!” “수호대! 결계를 쳐라!”

아수라장이 된 장내에서 멜리사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이, 이걸 쓰셔야 해요!”

멜리사가 단상 아래에서 가죽 가방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그리고 멜리사가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극적으로 건져 올렸던 아주 오래된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이 쥐여 있었다.

동시에 내 품 안에서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배신자 세드릭이 내 연구실에서 몰래 훔쳐갔다가, 내가 그의 위증죄를 처단하기 위해 평판 장부의 힘으로 되찾아온 고대 은제 깃펜이었다. 깃펜 끝에 맺힌 미세한 마력이 대공의 은백색 폭풍과 공명하며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내 품에 안긴 이 거대한 폭탄을 해체하는 일이었다.

쉬이이익—!

칼리안의 가슴팍에서 로즈마리 향이 비정상적으로 짙게 풍겨 나왔다. 그가 늘 품고 다니던 마력 폭주 억제 향낭이었다. 하지만 그 향낭은 이미 내 체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기(악녀 지치)와 반응해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대공의 예민한 감각이 내 마기를 알아채는 동시에, 그의 마력이 폭주하는 최악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대로 두면 이 대강당째로 우리 둘 다 가루가 될 거야.’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금실로 꼼꼼하게 바느질된 제복의 깃을 헤집자,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살결과 함께 반쯤 타버린 향낭이 보였다.

나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새로운 향낭을 꺼냈다. 단순한 억제제가 아니었다. [제국 평판 장부]의 인과율을 비틀어, 내 체내의 ‘악녀 지치’를 역으로 중화해 줄 수 있도록 정제한 특제 로즈마리 향낭이었다.

“칼리안…… 읏, 가만히 있어요.”

내 목소리는 모기 날갯짓 소리만큼이나 작았지만, 폭주하던 남자의 몸을 굳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의 제복 안쪽, 심장과 가장 가까운 비밀 주머니에 정제된 향낭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그의 단단한 흉근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뜨거웠다. 향낭이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던 청색 마력과 검은 마기가 엉키며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폭주의 잔향이 여전히 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칼리안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내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플 정도의 힘이었지만, 그 손아귀는 기묘하게도 떨리고 있었다.

“너는…… 대체 정체가 뭐지? 이 마기는…… 아르덴의…….”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의 아군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그 사나운 이빨 좀 집어치워요.”

그리고 나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우아하고 화려한 대강당의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피 냄새와 로즈마리 향이 뒤섞인 기묘한 입맞춤이 이루어졌다.

읍, 하고 짧은 신음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입술에 남아 있던 온기와 선혈의 비린 맛이 그의 차가운 입술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입맞춤은 지극히 가볍고도 노골적이었다. 거칠게 들이쉬는 그의 숨결 속으로 내 체내의 정제된 마기가 스며들었다. 순간, 칼리안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은백색의 사나운 마력 폭풍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시각적 사치스러움을 자랑하던 대강당의 은백색 광란이, 마치 정원의 안개가 걷히듯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탐하듯 깊게 내리눌렀다가, 이내 힘이 풀리며 내 어깨위로 툭 떨어졌다. 북부를 호령하는 냉혹한 대공이, 내 품 안에서 숨을 몰아쉬며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사나운 포식자에서 주인의 손길에 길들여진 순한 대형견으로 변한 것과 다름없었다.

‘후우, 살았다.’

나는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자금 확보를 위한 내 고단한 K-직장인 라이프가 여기서 끝장나는 일은 일단 면한 셈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눈앞에 다시 한번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알림: 칼리안 헤스벨트의 마력 폭주를 성공적으로 제어했습니다.] [알림: 대공가의 가주 권한으로 고대 계약이 활성화됩니다.] [시스템: 엘리샤 폰 아르덴의 영혼 파장 및 마력 정보가 '북부 보호자 혈통 명부(Vassalage Ledger)'에 주입 등록됩니다.] [효과: 황실 및 성법위원회의 임의 체포 권한이 영구 박탈됩니다. 귀하는 이제 헤스벨트 대공가의 '공식 보호 대상자'이자 '가문 지략가'로 법적 격상됩니다.]

내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칼리안은 내 숨결 뒤에 숨겨진 짙은 마기를 분명히 느끼고도, 나를 고발하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파고드는 평온을 선택했다. 그는 나를 파멸시키는 대신, 자신의 가문 명부 속에 나를 숨겨두고 평생 소유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이로써 나는 황제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은신처를 얻게 되었다.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여전히 소유욕과 의심,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열망이 뒤섞여 있었다.

“너를…… 내 손으로 찢어발겨야 마땅하거늘.”

그가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으로 내 뺨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미묘한 전율이 일었다.

“이제는 늦었다, 엘리샤. 너를 기어이 내 명부에 묶어두었으니.”

그의 호칭이 ‘교수’에서 ‘엘리샤’로 완전히 변해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채,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책임을 지셔야죠, 대공 전하. 제 조용하고 안락한 은퇴 생활을 완전히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요.”

나는 시선을 돌려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사색이 된 세드릭과,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바스토프 추기경이 서 있었다.

“세드릭.”

내 목소리가 고요한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나는 멜리사에게 손짓했다. 멜리사는 잽싸게 단상 위로 올라와 내게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조각을 건넸다.

“네가 내 연구실에서 훔쳐갔던 고대 은제 깃펜에 새겨진 마력 지문으로, 네가 교황청의 사주를 받아 역사서를 위조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여기, 멜리사 조교가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찾아낸 이 양가죽 조각은…….”

나는 양가죽 조각을 높이 들어 올려 대강당의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50년 전, 교황청이 황실의 눈을 속이고 아카데미의 자산을 횡령하기 위해 작성했던 진짜 세금 포탈 증서의 봉인 인장이다. 바스토프 추기경, 당신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금서고를 폭파해 인멸하려 했던 진실이 바로 이것이지.”

대강당이 거대한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귀족 평의회 의원들과 학자들의 시선이 바스토프 추기경에게로 쏠렸다. 추기경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의 신실한 가면이 완전히 쪼개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사이다로군.’

K-직장인으로서 이보다 더 통쾌한 기획서 제출은 없을 것이다. 나를 해고하려던 늙은 여우들의 목줄을 완벽하게 쥐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내 평화로운 종신 교수직과 안락한 은퇴뿐이었다. 지하 역사 보관소 너머, 지도에도 없는 비밀 지하 동굴로 도망치려 했던 비상 계획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바스토프 추기경은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정갈하게 빗겨진 백발 아래로, 탐욕과 광기로 가득 찬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묵주를 쥔 손아귀에 핏줄이 터질 정도로 힘을 주며, 대강당 측면에 대기하고 있던 황실 근위병들과 사제들을 향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속지 마라! 저 사악한 년이 대공 전하에게 마녀의 저주를 걸어 혼을 빼놓은 것이다! 대공의 폭주와 저 불길한 검은 마기를 보았느냐? 저것은 이단이다! 즉시 신성 화형 결계를 작동시켜 저 마녀의 영혼을 태워버려라!”

추기경의 외침과 함께, 대강당 바닥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성흔 마법진이 붉고 뜨거운 화염의 빛을 뿜어내며 기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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