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교황청의 어두운 지하 제단에서 타오르던 음산한 검은 불꽃은 마침내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대강당 지붕 위까지 기괴한 촉수를 뻗치고 있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숨을 헐떡이며 활성화한 고대 이단 마법 스크롤의 저주는 공간의 장벽을 넘어 엘리샤의 심장을 겨누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었다. 등 뒤로 서늘하게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최고급 실크 셔츠를 적셨지만, 엘리샤는 대강당 대기실의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만 버티면 남부의 따뜻한 햇살 아래서 평생 놀고먹을 비자금이 완성된다. 감히 어떤 노인네가 내 안락한 정년퇴임을 가로채려 해?”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서도 손끝은 침착하게 옷깃에 장식된 사파이어 브로치를 매만졌다. 이 사파이어는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마력을 미세하게 흡수해 마기 누출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키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조교 멜리사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극도의 공포로 수축해 있었다.
“교, 교수님……. 대강당에 황실 수호대와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들이 꽉 들어찼습니다. 바스토프 추기경의 수하들이 아예 대놓고 무기를 드러내고 있어요. 정말로 나가실 건가요?”
“멜리사, 일개 직장인이 사장의 해고 통보서에 고분고분 서명하는 걸 본 적 있니?”
엘리샤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난 내 밥그릇을 건드리는 자는 황제라 할지라도 굶겨 죽일 준비가 되어 있어.”
대강당의 거대한 활엽수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엘리샤에게 내리꽂혔다. 금색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 아래로 귀족 평의원들과 성직자들이 빽빽하게 법정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명백한 적의와 탐욕, 그리고 파멸을 기다리는 관음증적인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중앙에는 피고인을 위해 마련된 쇠사슬이 감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바스토프 추기경은 승리를 확신한 듯, 단상 위에서 묵주를 굴리며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샤는 피고석을 가차 없이 지나쳤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맑게 울렸다. 그녀가 향한 곳은 오직 아카데미의 최고 학술 권위자만이 오를 수 있는 ‘대논쟁 연단’이었다.
“엘리샤 폰 아르덴! 네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당장 피고석으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귀족 학파의 선봉이자 이번 심문회의 마름을 자처한 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들 사이에서 엄지손톱 밑의 살을 피가 나도록 뜯어내고 있던 세드릭 아르덴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나섰다.
“교수라는 탈을 쓰고 아카데미에 숨어든 반역자의 핏줄이여! 네가 감히 신성한 연단에 서서 제국의 법과 교회의 권위를 모독하려 드는구나! 여기 네가 반역을 모의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세드릭이 흔들어 보인 것은 엘리샤의 서명이 선명하게 찍힌 위조된 서류였다.
엘리샤는 조용히 연단의 난간을 짚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빛이 감돌았다. 머릿속에서 [제국 평판 장부]의 시스템 창이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시스템 가동: 대상 '세드릭 아르덴'의 신용 정보 분석] [약점: 아카데미 연구 자금 횡령 및 학술 도용 흔적 발견] [경고: 장부 연동 시 '악녀 지치(마기)' 누적치 상승. 북부대공의 감지망 자극 위험.]
엘리샤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무시하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세드릭. 여전히 남의 물건을 탐내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더구나. 내 연구실에서 몰래 훔쳐간 고대 은제 깃펜은 잘 쓰고 있니?”
세드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왜 네깟 년의 깃펜을……!”
“그 고대 은제 깃펜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란다. 아르덴 가문의 가주만이 다룰 수 있는 특수 마력 각인이 새겨진 유물이지. 그리고 그 펜은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의 마력 지문을 고스란히 저장하는 성질이 있어.”
엘리샤는 품 안에서 붉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또 다른 마력 측정구를 꺼내 보였다.
“아카데미 구매 증빙서와 네 마력 지문을 대조해 볼까? 네가 내 연구실에 무단 침입해 깃펜을 훔치고, 그것으로 내 서명을 위조해 반역 서류를 작성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바로 그 깃펜에 남아 있다. 어디 한 번 검증관들에게 넘겨보시지.”
“이, 이익……!”
세드릭의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평판 장부의 붉은 실이 세드릭의 신용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장면에 대강당의 학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스토프 추기경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묵주를 꽉 쥐며 단상에서 일어났다.
“사소한 도둑질 시비로 본질을 흐리지 마라, 엘리샤 교수. 아르덴 가문이 과거 교황청의 성스러운 조세를 포탈하고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가문의 생존자인 네 존재 자체가 이 아카데미의 수치이자 제국의 위협이다.”
“조세 포탈이라뇨, 추기경님.”
엘리샤는 생긋 웃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멜리사가 품고 있던 낡은 양가죽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아주 오래된, 붉은 인장이 찍힌 양가죽 조각이었다.
“멜리사 조교가 역사 보관소의 폐기 더미에서 수습한 이 붉은 인장 조각의 정체를 아십니까? 바로 50년 전, 교황청과 아르덴 가문 사이에서 체결된 ‘진짜 세금 합의서’의 봉인 흔적입니다.”
바스토프 추기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깟 잡동사니 조각이 무엇을 증명한다는 말이냐!”
“이 인장 조각에 숨겨진 마법 식별 코드를 평판 장부의 기록과 대조하면, 당시 교황청이 아르덴 가문에게 조세 포탈 누명을 씌우고 그들의 막대한 군자금을 강탈해 자신들의 비밀 금고로 빼돌렸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즉, 진짜 도둑은 아르덴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 교황청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녀가 양가죽 조각을 연단 위에 올려놓고 마력을 주입하자, 공중에 거대한 황금빛 장부가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 장부에는 교황청이 수십 년간 날조해 온 수백 장의 가짜 채권 정황과 불법 자금 흐름이 붉은 글씨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것이…… 진짜 교황청의 장부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저 수치는 황실 원로원의 예산안과 일치하잖아!”
청중석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추기경을 옹위하던 사제들과 귀족들의 안색이 단숨에 흙빛으로 변했다. 엘리샤의 반박 한 방이 터질 때마다, 그들이 신성시하던 교회의 권위가 백 장의 가짜 채권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이단이다! 저 여자가 사악한 마법을 부려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고 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마침내 가면을 벗어 던지고 광포하게 울부짖었다.
“황실 수호대! 당장 저 마녀의 목을 베어라! 아카데미의 자치권 따위는 상관없다! 제국의 반역자를 처단하라!”
추기경의 명령에 대강당 사방에서 칼날을 뽑아 든 황실 수호대와 이단 심문관들이 연단을 향해 쇄도했다. 공기가 살기로 얼어붙는 찰나였다.
쿠구구구둥—!
대강당의 거대한 천장이 흔들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한기가 사방을 뒤덮었다. 연단으로 달려들던 수호대원들의 발밑이 순식간에 두꺼운 빙판으로 변하며 그들의 움직임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차갑고 무거운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검은 모피 코트를 걸친 사내의 실루엣이 연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북부대공, 칼리안 헤스벨트였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허리춤에 찬 검의 자루를 무심히 쥐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은 황실 수호대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대공!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반역자를 옹호하겠다는 것인가!”
추기경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칼리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추기경을 응시했다. 그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황실의 감사관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칼리안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대강당 전체를 조용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이 법정은 아카데미의 자치령 내에서 열리는 공식 청문회다. 피고든 원고든, 자신의 논리를 완벽하게 증명할 기회를 가질 권리가 있지. 감사관의 허가 없이 무력을 행사하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그는 천천히 검을 반쯤 뽑아 올렸다. 서슬 퍼런 검신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엘리샤 교수가 자신의 논리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 누구도 이 연단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칼리안의 선언은 황실 수호대의 무력 개입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철벽이었다. 그는 엘리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넓은 등은 그녀에게 가장 완벽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 미친 대공이…… 결국 나를 돕는구나.’
엘리샤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녀의 체내에서 무서운 이질감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경고: '악녀 지치(마기)' 수치 한계치 돌파 (95%)] [경고: 외부 마법 스크롤의 저주 공명으로 인해 체내 마력이 과부하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사흘 전 제단에서 활성화했던 고대 저주가, 그녀가 [제국 평판 장부]를 무리하게 기동해 마기를 방출하는 순간을 노려 심장을 파고든 것이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역류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연단의 가장자리가 비틀거리며 흔들렸다.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모든 게 끝장이야. 저 늙은 여우의 목줄을 완전히 끊어놓기 전에는…….’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평판 장부 스크롤의 붉은 마기가 그녀의 눈을 피처럼 붉게 물들였다. 장부에 기록된 수치가 갱신될 때마다 대강당의 여론은 완전히 엘리샤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 대가로 그녀의 육체는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컥……!”
결국 참지 못한 신음과 함께, 엘리샤의 얇은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피는 연단 위의 백색 대리석을 붉게 적셨고, 그녀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교수님!”
멜리사의 비명이 대강당을 흔들었다.
쉬이이익—!
그 순간, 엘리샤의 체내에서 억눌려 있던 폭발적인 검은 마기(악녀 지치)가 미친 듯이 공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력 감지력이 최고조에 달한 북부대공에게 가장 치명적인 사냥 신호였다.
칼리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게 가라앉았다. 그의 심장 부근에 품고 있던 마력 폭주 억제 향낭에서 로즈마리 향이 비정상적으로 짙어지며 그의 마력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엘리샤!”
칼리안은 이성을 잃은 듯 포효하며, 자신과 연단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마법 장벽을 가차 없이 부수고 몸을 날렸다. 쓰러지는 그녀의 가녀린 몸을 향해 그의 거친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뻗어 나가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방출된 은백색의 마력이 폭주하듯 요동치며 대강당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