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우우웅!
고막을 찢어발기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대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사방에서 비산하는 유리 파편들이 붉은 신성 마력의 잔광을 받아치며 마치 잔인한 보석 가루처럼 흩뿌려졌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기어코 미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제국의 심장부이자 학문의 성역인 카이로스 아카데미의 역사 보관소를, 그것도 황실의 가장 은밀한 치부가 숨겨진 금서고를 통째로 폭파해 버리다니.
“정신 차려, 멜리사!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음 달 월급 명세서 대신 영혼의 명복을 비는 상조회 고지서를 받게 될 거야!”
엘리샤는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실크 드레스의 자락이 무너져 내리는 돌가루와 그을음으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지금 그런 사치스러운 걱정을 할 아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교, 교수님……! 저 아직 정식 연구관 임용서도 못 받았단 말입니다……!”
멜리사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눈물을 흘리며 흙더미를 기어 다녔다. 그 비참하고도 필사적인 몸짓이 오히려 엘리샤의 생존 본능을 강하게 자극했다.
자욱한 낙진과 붉은 화염의 장막 너머로, 칼리안의 단단하고 묵직한 손길이 엘리샤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대공의 값비싼 검은 모피 망토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잔해들을 차단하는 거대한 방벽이 되어 주었다. 그의 넓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서늘한 얼음의 체취가 비정상적으로 요동치는 엘리샤의 맥박을 억눌렀다.
“내 뒤에 붙어 있어라, 엘리샤.”
칼리안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무너지는 건물의 굉음 속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고막에 똑똑히 박혀 들었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주변의 마력 진동을 탐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샤는 그의 비호 아래에서 안도하고만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시스템: ‘제국 평판 장부(Ledger)’를 기동합니다.] [경고: 장부의 과도한 열람은 잠재된 ‘악녀 지치(마기)’를 방출시켜 북부대공의 마력 탐지망을 자극합니다. 현재 마기 누적 수치 위험.]
‘알아, 안다고! 하지만 지금 안 쓰면 마기에 들키기 전에 깔려 죽는다고!’
이판사판이었다. 엘리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마음속으로 장부의 가상 화면을 펼쳤다. 안개처럼 흩어지는 시야 너머로, 붕괴하는 지하 역사 보관소의 3차원 구조도가 푸른빛의 선으로 얽히며 입체적으로 재구성되었다.
동시에 교황청의 음모와 관련된 인물들의 신용 정보와 보관소 내부의 숨겨진 비상 통로가 붉은색 스펙트럼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때, 엘리샤의 시선이 무너진 연단 아래, 흙먼지 속에 반쯤 파묻힌 채 은은한 광채를 내뿜는 물건에 닿았다.
차가운 은빛 광택 위에 정교하게 음각된 백합 문양. 그것은 다름 아닌 고대 은제 깃펜이었다. 1화에서 세드릭이 그녀의 연구실에 몰래 침입해 훔쳐 갔던, 그리고 그녀에게 아르덴의 잔당이라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사용하려 했던 바로 그 결정적 증거물이었다.
‘저 비열한 쥐새끼가 폭발의 혼란을 틈타 도망치다 떨어뜨린 게 분명해.’
엘리샤는 칼리안의 품에서 기민하게 빠져나와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엘리샤! 위험하다!”
칼리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리샤는 날카로운 잔해에 손가락 끝이 긁히는 것조차 개의치 않고 은제 깃펜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깃펜 끝에 묻은 마력의 잔재를 평판 장부의 렌즈로 투사하자, 세드릭 아르덴의 고유한 푸른색 마력 지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대공 전하, 이것 보십시오!”
엘리샤는 은제 깃펜을 칼리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승리감으로 호선을 그렸다.
“제 연구실에서 도난당했던 고대 은제 깃펜입니다. 여기에 교황청의 사주를 받고 역사서를 위조하려 했던 세드릭의 마력 지문이 고스란히 박혀 있군요. 이 폭발 역시 그와 바스토프 추기경이 공모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입니다!”
칼리안의 짙은 눈동자가 은제 깃펜에 새겨진 마력 지문을 확인하고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쥐새끼가 꼬리를 남겼군.”
“이제 그의 위증죄는 물론, 제국 영토 내에서의 테러 공모죄까지 완벽하게 성립됩니다. 사냥감이 스스로 목줄을 채워 준 꼴이지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동시에 세드릭을 단숨에 파멸로 몰고 갈 결정적 패를 회수한 순간이었다.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머리 위의 거대한 석조 아치가 쩍쩍 갈라지며 무서운 속도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탈출해야 했다.
“멜리사! 아까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주웠다던 그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 지금 당장 꺼내!”
“네? 아, 예! 여, 여기요!”
멜리사가 품속에서 먼지구덩이가 된 양가죽 조각을 허겁지겁 꺼내어 바쳤다. 엘리샤는 평판 장부가 가리키는 벽면의 특정한 홈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 홈은 단순한 벽의 균열이 아니었다. 교황청의 세금 포탈 증서가 원래 보관되어 있던 밀실이자, 보관소 전체의 무너지지 않는 안전 대피소로 통하는 비밀 제어 장치였다.
엘리샤는 주저 없이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을 홈에 밀어 넣었다.
스르릉—!
쿠르릉거리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석벽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붕괴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단단한 화강암 비상 통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입니다! 어서요!”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비명도 없이, 재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내 대공을 유인하는 엘리샤의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고 영리했다. 칼리안은 그녀의 거침없는 판단력에 기이한 소름을 느끼며, 그녀의 손목을 잡고 비상 통로 안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그들이 통로로 들어서자마자 원래 서 있던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입구를 막아버렸다.
어둠이 찾아왔다. 오직 벽면에 장식된 희미한 마력석들만이 그들의 숨소리를 비추고 있었다.
“하아, 하아…….”
멜리사는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엘리샤 역시 벽에 기대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였다.
[경고: ‘제국 평판 장부’의 연속 사용으로 인해 ‘악녀 지치(마기)’가 급격히 방출되고 있습니다. 대상 ‘칼리안 헤스벨트’의 마력 감지력이 최고조에 달해 정체 탄로 위험도 98%.]
몸 안쪽에서부터 차갑고 끈적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덴 가문 특유의, 칼리안이 그토록 증오하고 찾아 헤매던 그 배덕한 마기였다.
칼리안의 시선이 서서히 엘리샤를 향했다. 그의 코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맹수의 그것처럼, 그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번뜩였다.
“이 마력 반응은…….”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깃드는 순간, 엘리샤는 미리 준비해 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소매 안쪽에서 고운 로즈마리 가루가 담긴 작은 비단 향낭을 꺼내어, 잔해 더미가 뒹구는 바닥을 향해 가볍게 흩뿌렸다.
스아아아—.
붉은 낙진의 열기와 섞여 든 로즈마리의 청량하고도 쌉싸름한 향기가 순식간에 어두운 통로 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단순히 향기를 내는 물건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평소 소지하고 다니던 마력 폭주 억제제와 동일한 성분으로 정제된, 미세한 마기 소거용 정화 가루였다.
“연기와 먼지가 너무 매캐하여 대공 전하의 신경에 거스를까 염려되었습니다. 부디 이 향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샤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향낭을 가볍게 흔들었다. 로즈마리 가루가 공기 중의 검은 지치를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소멸시켰고, 칼리안의 코끝을 자극하던 의심스러운 마기의 흔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리안은 흩어지는 은은한 향을 가만히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폭압적인 마력의 파동이 기적처럼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그는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뺨에 묻은 그을음,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흔들림 없는 맑은 갈색 눈동자.
칼리안의 단단한 손이 천천히 올라와 엘리샤의 뺨에 묻은 먼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가죽 장갑의 감촉이 뺨을 스칠 때마다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대는 참으로 기묘한 여자군. 위기 속에서도 내 숨통을 틔워 줄 방법을 귀신같이 알고 있으니.”
그의 호칭이 미묘하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단순한 감사관과 용의자의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지략가 대 지략가로서의 기묘한 연대감이 어둠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대공 전하의 안전이 곧 제 안전이니까요.”
엘리샤는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그의 시선을 피해 통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무너지지 않은 석조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철제로 단단히 봉인된 낡은 금서 원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아르덴 가문의 문양이 붉은 왁스로 선명하게 찍힌 책이었다.
엘리샤는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 금서를 집어 들었다. 평판 장부의 보조 광채가 책 표지를 투사하자, 그들의 눈앞에 믿기 힘든 고대 제국어 텍스트가 번역되어 떠올랐다.
[‘아르덴 가문의 역모와 소멸은, 교황청의 제국 영토 침탈 및 조세 포탈 음모를 선제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황실과 가문 수장이 합의하에 연출한 거대한 자작극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엘리샤를 덮쳤다.
아르덴 가문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멸문당한 진짜 이유가, 사실은 교황청의 음모를 막기 위한 황실과의 동맹이자 자작극이었다니? 그렇다면 그녀가 그토록 피해 다니려 했던 단두대의 운명 뒤에는, 제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음모의 소용돌이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건…….”
칼리안 역시 금서에 새겨진 아르덴의 문양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 책을 이곳에 둘 순 없습니다. 바스토프 추기경의 손에 들어가면 영원히 인멸될 테니까요.”
엘리샤는 신속하게 금서를 품에 안았다.
“대공 전하, 이 금서 원본을 전하의 안전한 기사 영지로 피난시켜야 합니다. 그곳이라면 교황청의 마수도 함부로 닿지 못할 테니까요.”
칼리안은 그녀의 영리한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직속 정예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북부 지휘 대궁정으로 기동한다. 그곳은 내 허락 없이는 황제라도 함부로 군사를 들일 수 없는 성역이다.”
그들은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대공가 직속의 철갑 기사들과 합류했다. 사방이 붉은 불길로 뒤덮인 아카데미를 뒤로한 채, 그들은 어둠을 뚫고 신속하게 북부 지휘 대궁정으로 향했다.
마침내 견고한 검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궁정의 대문이 그들을 맞이했다. 삼엄한 경비와 서늘한 공기가 흐르는 대궁정 내부로 들어서자, 엘리샤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야 살았네. 이 정도면 안전 자산 확보에, 은퇴 비자금 계획도 다시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겠어.’
그녀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차가운 대리석 의자에 몸을 기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다닥—!
대궁정의 철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망토를 걸친 전령이 숨을 헐떡이며 안뜰로 들이닥쳤다.
“대공 전하! 황실 특사령이 발부되었습니다!”
전령은 극도의 공포에 질린 얼굴로, 황제의 황금색 인장이 찍힌 붉은 서신을 칼리안에게 바쳤다.
칼리안이 서신을 받아들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그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칼리안의 싸늘한 시선이 천천히 엘리샤를 향했다.
엘리샤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령이 사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이로스 아카데미 역사 보관소 폭발 및 황실 금서 탈취의 주동자로…… 엘리샤 폰 아르덴 교수가 지목되었습니다! 황실 특사께서는 그녀를 ‘역사 보관소 파괴 도발범’으로 규정하고, 발견 즉시 현장에서 즉각 처형하라는 황제의 칙령을 내리셨습니다!”
지독한 침묵이 대궁정의 넓은 홀을 가득 채웠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의 단두대가, 다시 한번 엘리샤의 목덜미 바로 뒤바짝 다가와 칼날을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