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안 헤스벨트의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턱끝을 죄어오는 힘은 굳건했다. 맹수의 송곳니가 목덜미에 닿은 듯한 소름 끼치는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타오르는 의혹과, 억누를 수 없는 지독한 혼란이 뒤섞여 일렁였다. 사르릉, 하며 칼집에서 미세하게 빠져나온 검날이 어스름한 저녁 빛을 받아 서늘한 은광을 뿜어냈다.
단 한 번도 사냥감을 놓쳐본 적 없는 북부의 지배자가, 생애 처음으로 검을 쥔 손끝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엘리샤 폰 아르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마치 대지를 울리는 한겨울의 빙하 균열 소리 같았다.
“방금 전의 그 마력 융합…… 그리고 그대의 이 완벽한 알리바이. 그대는 대체 내게 무엇이지? 내가 사냥해야 할 아르덴의 마지막 잔당인가.”
그의 시선이 엘리샤의 붉은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그녀의 맑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니면……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소유해야 할 동반자인가.”
엘리샤는 턱을 쥔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마음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아니, 동반자고 사냥감이고 간에 내 턱뼈가 먼저 바스러지겠는데요, 대공님? 그리고 퇴근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이 고밀도 감정 노동을 수당도 없이 받아줘야 하는 거지?’
그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매끄러운 입꼬리를 들어 올려 우아한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품속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마기를 소매 안쪽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제국 평판 장부]를 구동했을 때 발생하는 사악한 보랏빛 입자, ‘악녀 지치’를 억누르기 위한 본능적인 조치였다.
“대공 전하.”
엘리샤는 가볍게 턱을 움직여 그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칼리안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칫하며 아쉬운 듯 가볍게 쥐어졌다. 엘리샤는 마호가니 책상 위에 단정하게 놓인 고대 은제 깃펜을 손끝으로 톡, 톡 건드렸다. 백은색 깃털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사냥감이니 동반자니 하는 자극적인 수식어는 피차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그저 제 밥그릇을 지키고 싶은 평범한 아카데미 교수일 뿐이랍니다. 그리고 여기, 제 평화로운 은퇴 계획을 방해하려던 벌레의 흔적이 아주 명확하게 남아 있지요.”
엘리샤가 은제 깃펜의 펜촉 부분을 칼리안을 향해 돌려 보였다. 깃펜의 은제 배럴 부분에 미세하게 남아 있던 푸르스름한 각인이 빛났다.
“세드릭이 제 연구실에서 훔쳐갔던 이 고대 은제 깃펜 말입니다. 전하께서 돌려주신 덕분에 제자리에 돌아왔지요. 하지만 전하, 이 펜에 새겨진 마력 지문을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칼리안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했다. 그가 허리춤의 검자루에서 손을 떼고, 엘리샤가 가리키는 깃펜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은제 깃펜은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닙니다. 아르덴 가문의 고대 학술 마법이 깃든 물건으로, 소유주의 마력 파동을 실시간으로 기록하지요. 세드릭이 이 펜을 훔쳐 제 논문을 위조하려 했을 때, 펜의 내부 코어에는 이미 그의 비열한 마력 지문이 고스란히 박제되었습니다. 즉, 그가 학술제에서 제시했던 모든 ‘원본 초고’는 이 펜으로 위조된 가짜라는 명백한 물증이지요.”
엘리샤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세드릭은 저를 대역죄로 옭아매려 위증을 일삼았으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훔친 이 깃펜의 기록에 의해 완벽한 반역 및 위증죄로 처단당한 것입니다. 인과응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법이지요.”
칼리안은 깃펜에 선명하게 떠오른 세드릭의 푸른 마력 반응을 보며,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내다보고 그 비열한 쥐새끼를 덫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제 평판과 직장을 건드리는데 가만히 있을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제 자산 가치를 훼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자를 쳐서 돌려주는 편이라서요.”
엘리샤가 깃털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사이다 같은 해소가 연구실 안의 공기를 가볍게 가라앉혔다. 1화에서 시작해 6화를 거쳐 지금까지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혔던 세드릭의 절도 행각과 음모가, 그가 훔쳤던 바로 그 은제 깃펜의 물증에 의해 완벽하게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세드릭은 이제 황실 감사원의 엄중한 지하 감옥에서 평생 빛을 보지 못할 터였다.
그때, 연구실의 박살 난 문짝을 거칠게 밀치며 누군가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교, 교수님! 허억, 교수님!”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안경이 콧등까지 흘러내린 조교, 멜리사 로렌이었다. 그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무언가 소중한 것이 꽉 쥐여 있었다.
“멜리사?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아카데미를 서성이고 있는 거지? 야근 수당은 예산안에 반영되지 않았을 텐데.”
엘리샤의 지극히 현실적인 핀잔에도 멜리사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소리쳤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방금, 방금 역사 보관소 지하 입구 쪽에서 세드릭의 남은 잔당들이 사제들과 접선해 보관소를 습격하려던 것을…… 칼리안 대공 전하의 서북 기사단분들이 발견하고 아주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완전히 밟아버리셨다고요!”
멜리사의 보고에 칼리안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감히 내 허가도 없이 아카데미 지하 보관소로 접근한 자들이 있었단 말인가.”
“예, 예! 그런데 그 소동 와중에 보관소 폐기물 더미가 무너지면서…… 예전에 제가 주웠던 그 이상한 가죽 조각이랑 똑같은 무늬를 가진 상자가 부서져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목숨을 걸고 이걸 챙겨왔습니다!”
멜리사가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 것은, 5화에서 그녀가 역사 보관소 폐기물 더미에서 주웠던 바로 그 ‘아주 오래된 붉은 인장 양가죽 조각’이었다.
양가죽 조각은 세월의 때가 묻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지만, 그 가장자리에 찍힌 선명한 붉은 왁스 인장은 기묘한 마력의 잔흔을 풍기며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리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 양가죽 조각을 받아 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녀는 마음속으로 고요히 속삭이며, 시야 한구석에 [제국 평판 장부]를 활성화했다.
웅성거리는 반투명한 푸른 장부가 허공에 펼쳐지며, 멜리사가 가져온 양가죽 조각의 정보가 붉은 글씨로 갱신되기 시작했다.
[아이템: 교황청 비밀 세금 포탈 증서의 원본 봉인 조각] * 세부 정보: 수백 년 전 교황청이 제국 영토의 경계를 침범하여 불법적으로 징수해 간 천문학적인 조세의 영수증 원본을 봉인하던 인장. 바스토프 추기경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역사 보관소의 서류들을 위조하고 소각하려 함. * 가치: 백억 골드 상당의 불법 비자금 경로 증명 불가피.
장부를 갱신하는 순간, 엘리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검은 연기 같은 ‘악녀 지치’가 스르륵 피어올라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핏, 하고 칼리안의 콧날이 좁혀졌다. 그의 예민한 마력 감지 능력이 엘리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하고도 매혹적인 아르덴 특유의 마기를 귀신같이 포착한 것이다. 칼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눈빛은 사냥감을 향한 적의가 아니었다.
엘리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가죽에 새겨진 고대 제국어와 교황청의 비밀 서체를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제국 북부 카르파 영지의 세 수확물 중 반을 신의 제단으로 바치나니.’ 이 문장은 전형적인 14세기 교황청의 불법 징세 서식입니다. 그리고 여기, 붉은 인장에 새겨진 문양을 보십시오.”
엘리샤가 손가락으로 붉은 인장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닙니다. 제국 영토법 제3조를 우회하기 위해 교황청이 고안한 ‘비밀 면세 결계’의 마법 기하학적 공식이지요. 즉, 이 양가죽 조각은 교황청이 우리 제국의 영토에서 황실의 눈을 속이고 수백 년 동안 백억 골드에 달하는 세금을 불법으로 갈취해 갔음을 증명하는 ‘진짜 영수증의 봉인 조각’입니다.”
그녀의 청아하고도 거침없는 목소리가 어두운 연구실 안에 울려 퍼졌다.
칼리안은 양가죽 조각을 든 채 고문서를 해독해 나가는 엘리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찢어지고 훼손되어 그 어떤 고고학자도 해독하지 못했던 고대 양가죽의 텍스트가, 그녀의 입을 거치자 마치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진실이 되어 눈앞에 구현되고 있었다.
그녀의 천재적인 고문서 해독력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압도적인 지적 우아함.
칼리안의 가슴속에서 수십 년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렸다.
‘아르덴의 피를 이은 자는 모두 제국의 반역자이며, 멸절해야 할 사냥감이다.’
그 단단하던 철칙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이토록 고결하고 천재적인 지략가를, 제국의 안정을 위해 단두대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오히려 이 여인을 내 곁에 두고, 그녀의 지혜를 내 칼의 방패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냥감으로 시작했던 의심은, 이제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수호하고자 하는 지독한 집착과 독점욕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에 서린 살기가 완벽하게 걷히고, 그 자리에 깊고 어두운 소유욕이 들어찼다.
“그대는…… 진정 기적을 행하는군, 엘리샤.”
칼리안의 나직한 음성에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아, 북부대공의 레이더망에서 대역죄인 낙인은 확실히 지워진 것 같네. 이제 남은 건 이 찢어진 가죽 쪼가리로 교황청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거지.’
그때, 학술제의 소란을 틈타 연구실 복도 너머로 발걸음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교황청의 눈치를 보며 엘리샤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났던 아카데미의 귀족 학파 교수들과, 바스토프 추기경의 사주를 받은 교황청 사절단 대리인들이었다.
“엘리샤 교수! 도대체 연구실에서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건가! 세드릭 자작을 무고하게 연행하게 만들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앞장서서 들어온 슈테인 교수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뒤로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사제복을 입은 교황청 대리인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가세했다.
“아카데미가 아무리 자치권을 주장한들, 교황청의 권위를 훼손하는 학설을 유포하는 것은 명백한 이단 행위요! 당장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단 행위라뇨.”
엘리샤가 차갑게 웃으며 그들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는 단상 위 교수석으로 천천히 걸어가, 멜리사가 가져온 양가죽 조각을 책상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오히려 무릎을 꿇고 제국 황실과 북부 영민들에게 석고대죄해야 할 자들은 당신들, 교황청인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망발을……!”
“이 양가죽 조각을 보십시오.”
엘리샤가 손가락으로 붉은 인장을 가리켰다.
“이것은 14세기 교황청이 제국 북부 자치령에서 불법으로 징수한 조세의 영수증 봉인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성당 건립 기금이라는 명목 하에, 실제로는 제국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무려 다섯 배나 초과한 백억 골드 상당의 조세를 갈취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불법 자금을 은닉하기 위해 역사 보관소의 장부들을 위조했지요.”
그녀의 정연한 논리와 구체적인 수치 제시에 교황청 대리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무슨 해괴망측한 위조품을 가지고……!”
“위조품인지 아닌지는 여기 계신 북부의 지배자, 칼리안 대공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요?”
엘리샤의 시선이 칼리안에게 닿았다. 칼리안은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책상을 탁, 두드리며 싸늘한 마력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내 영지인 북부에서 그런 거대한 규모의 조세 포탈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이 양가죽에 담겨 있다면, 이는 제국 영토권 침해이자 명백한 선전포고다. 감사관의 명예를 걸고, 이 양가죽의 마력 인장은 진품이 확실하다.”
북부대공의 서슬 퍼런 보증이 더해지자, 슈테인 교수와 교황청 대리인들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백억 골드 규모의 주교청 조세 사기극. 그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엘리샤가 제시한 단 한 조각의 양가죽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교황청 대리인 중 한 명은 숨을 쉬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혼절해 버렸다.
완벽한 격상 반격이자, 아카데미 교수로서의 학술적 권위와 평판을 은하수 끝까지 끌어올린 통쾌한 사이다였다.
엘리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은퇴 후 남부 휴양지의 저택 평면도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완벽해. 이 정도로 교황청의 치부를 쥐고 흔들 수 있다면, 종신 교수 자리는 물론이고 황제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면책 특권을 얻을 수 있어.’
그러나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쿠우우웅—!
갑작스럽게 온 건물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강력한 신성 마력이 역사 보관소 지하 깊은 곳에서 폭발하며 발생한 충격파였다.
연구실 창유리에 금이 가며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 내렸다.
“꺄악!”
멜리사가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고, 칼리안은 즉시 엘리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유리 파편들을 자신의 넓은 등과 망토로 막아냈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의 눈빛이 극도로 사납게 변했다.
그때, 깨진 유리창 너머로 붉은 화염과 함께 거대한 신성의 빛이 지하 보관소 방향에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것이 보였다.
복도 끝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서북 기사단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바스토프 추기경이 직접 교황청 사절단 기사들을 이끌고 지하 보관소의 결계 기둥을 마력 폭탄으로 날려버렸습니다! 안쪽의…… 역대 황실 금서고가 강제로 개방되었습니다!”
금서고가 열렸다.
그곳은 아르덴 가문의 진짜 비밀과, 황실의 아킬레스건이 담긴 금서들이 봉인된 제국의 가장 어두운 심장부였다.
바스토프 추기경이 파멸을 각오하고 마지막 도박을 시작한 것이다.
엘리샤는 칼리안의 품에 안긴 채, 붉게 타오르는 지하 보관소 방향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소리 없는 두뇌 싸움은 이제, 피와 화염이 튀는 거대한 전쟁터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