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민들의 임시 거처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태혁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손목 인터페이스 위로 반투명한 청색 홀로그램 스크린이 매끄럽게 떠올랐다.
낙원 빌딩의 모든 동력과 자원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경영 장부’의 관리자 페이지였다. 금빛으로 빛나던 장부의 메인 프레임 우측 하단에, 눈을 찌르는 적색 경고 아이콘이 0.1초 간격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장부 연동 모니터링 시스템 감지] [감지 위치: 지하 2층 자원 보관소 제3 구역] [상태: 비인가 복제 키를 통한 물리적 접근 시도 발생] [비인가 장부 입력 로그 갱신 중...]
태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감정의 동요로 인한 맥박 수 변화는 분당 2회 이내. 그의 뇌는 즉각적으로 상황을 수치화하고 효율적인 대응 시나리오를 산출하기 시작했다.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군."
태혁의 시선이 지하 2층의 3D 입체 투영 도면으로 향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침입자의 동선은 자원 보관소의 가장 깊숙한 격실, 즉 고가치 식료품과 희귀 금속이 보관된 구역을 정확히 지향하고 있었다.
* * *
지하 2층, 냉동 보존액의 푸르스름한 광채만이 복도를 비추는 음산한 공간.
입주민 대표 중 한 명이자 과거 유통업에 종사했던 오태식은 두 명의 측근을 거느린 채 제3 창고의 무거운 철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조잡하게 납땜질 된 구리선과 마도 칩이 엉겨 붙은 복제 마스터키가 들려 있었다.
치이익-.
압축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창고 내부에는 영하 40도의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황금보다 더한 가치를 지닌 물건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항목: 진공 포장된 청정우 등심 (원가: 12 마일리지/kg) - 잔여 수량: 450kg] [항목: 고순도 텅스텐-티타늄 합금 주괴 (원가: 45 마일리지/개) - 잔여 수량: 120개]
오태식의 침샘이 거칠게 자극받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배낭을 열어젖혔다.
"빨리 움직여. 그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데스크충 새끼가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폼 잡고 있을 때 챙겨야 한다. 이 고기랑 합금만 밖으로 빼돌리면, 마석두 대장님이 우리한테 강남 구역 보급관 자리를 주기로 약속하셨어."
"태식 형님, 진짜 괜찮을까요? 그 강태혁이라는 자,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던데……."
측근 하나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낙원 빌딩의 무적 결계를 직접 목격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공포였다. 하지만 오태식은 코방귀를 뀌며 합금 주괴를 배낭에 쓸어 담았다.
"빙신 같은 소리 하네. 그 새끼가 잘난 건 이 빌딩의 방어 시스템 덕분이지, 지 몸뚱이가 대단해서가 아니야. 하루 종일 의자에 처박혀서 타자나 두드리는 온실 속 화초 새끼한테 무슨 힘이 있어? 이 빌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오는 절름발이 새끼일 뿐이라고. 세상은 결국 발로 뛰는 우리 같은 베테랑들이 지배하는 법이야."
오태식은 품 안에서 소형 무전기를 꺼내 안테나를 뽑았다. 지익, 지이익 하는 기계음 끝에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블랙 하이에나의 수장, 마석두의 심복이었다.
- 물건은 확보했나?
"예, 형님. 약속하신 물건도 제시간에 도착한 거 맞지요? 지하 보일러실 환기구 쪽 연결 통로는 열어두었습니다."
- 약속은 지킨다. 마석두 대장님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고마력 산성 대포'다. 빌딩 내부에서 중앙 기둥을 향해 쏘면, 그 무적이라던 결계 발생기도 내부에서부터 녹아내릴 거다.
오태식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찢어졌다.
"알겠습니다. 물건을 넘겨받는 대로 중앙 수송로 쪽으로 이동해 방어선을 해체하겠습니다. 그 방구석 샌님 놈이 어떤 비명을 지를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
그들이 은밀한 모의를 나누는 동안, 천장에 매달린 소형 감시 센서의 렌즈가 아주 미세하게 회전하며 오태식의 안구 홍채를 스캔했다.
* * *
[위험 요소 분석 완료] - 대상: 오태식 외 2인 (낙원 빌딩 정식 입주민) - 혐의: 자원 무단 유출, 적대 세력과의 내통, 빌딩 파괴 모의 - 매개체: 고마력 산성 대포 (소유권: 블랙 하이에나 / 현재 빌딩 내부 반입 진행 중)
관리실의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태혁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톡, 톡 두드렸다.
그의 눈앞에는 오태식이 입주 당시 지장을 찍었던 '낙원 빌딩 정식 입주 보증 계약서'가 가상 화면으로 투영되어 있었다. 수십 장에 달하는 계약서 문서 중, 일반인이라면 결코 읽지 않고 넘어갔을 제77조 제14항의 미세한 주석 조항이 태혁의 손끝에 의해 활성화되었다.
"물리적인 무력을 사용해 진압하는 것은 자원 소모를 야기합니다. 한서윤을 고용하는 비용도 발생하죠."
태혁의 음성에는 그 어떤 분노도, 배신감도 없었다. 오직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의 살상 효율을 내기 위한 수치 계산만이 뇌리를 지배할 뿐이었다.
"가장 비접촉적이며, 합법적이고, 회계 장부상으로 이득이 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혁이 태블릿 화면을 슬라이드했다.
[특수 권능: '경영 장부 - 악성 이자 보증법' 가동] [대상자 오태식에 대한 실시간 서비스 이용 요금 소급 적용 개시]
소급 적용이 시작되자마자, 지하 복도를 걸어가던 오태식의 발걸음이 돌연 무거워졌다.
"어……? 어라?"
오태식은 가슴을 쥐어짜며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폐부가 찢어질 듯이 아파왔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마치 뜨거운 모래알처럼 목구멍을 긁어내렸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
오태식은 허덕이며 벽을 짚었다. 그의 눈앞에 불투명한 붉은색 경고창이 둥실 떠올랐다. 그것은 시스템이 발송한 개인 청구서였다.
[알림: 귀하의 계약 위반 행위(자산 무단 반출 및 파괴 모의)가 감지되어 '입주 보증 계약'에 의거, 빌딩 내 모든 자원 이용 요금이 '범죄적 특별 복리 세율'로 전환됩니다.] - 현재 산소 흡입 요금: 1회 호흡당 50 마일리지 (실시간 복리 120% 가산 중) - 현재 체온 유지 요금 (바닥 난방 및 대기 제어): 초당 100 마일리지 - 현재 바닥 마찰 요금 (보행 시 인프라 마모 방지): 1보당 200 마일리지 - 현재 누적 연체 금액: 42,500 마일리지
"이,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숨 쉬는 데 돈을 내라고?!"
오태식이 비명을 지르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시스템의 마일리지 잔고가 초고속으로 깎여 나갔다.
[홉! -50 마일리지] [흡! -110 마일리지] [흡! -242 마일리지]
"커흑! 컥!"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하는 산소 요금에 오태식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공포로 다가왔다. 동행하던 측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마력의 잔재가 강제로 뜯겨 나가며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태식 형님! 제 스탯이…… 제 근력 스탯이 깎이고 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마법이야?! 당장 그 새끼를 찾아가서 죽여버려야……!"
[알림: 잔고가 부족합니다. 보유 마일리지가 '0'에 도달함에 따라, 계약서 제89조 '신체 담보 강제 압류' 조항이 발동합니다.] - 1차 압류 대상: 근력 스탯 (보유치 15 -> 8로 조정) - 2차 압류 대상: 민첩 스탯 (보유치 12 -> 5로 조정)
쩍,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오태식의 허벅지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했다. 마치 온몸의 수분과 영양분을 보이지 않는 빨대가 통째로 빨아들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뼈마디를 타고 흘렀다.
오태식은 바닥에 주저앉아 개처럼 기기 시작했다. 단 세 걸음을 기어가는 동안, 그의 무릎 가죽이 쓸려 나가며 바닥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마찰 요금 미납으로 인한 강제 압류: 대상자의 하체 관절 가동 범위 30% 제한]
"악! 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 안 움직여!"
오태식은 흙빛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 가공할 만한 압박감이었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다. 단지 숨을 쉬고, 서 있고, 움직이는 일상적인 행위 자체가 거대한 사법적 칼날이 되어 그들의 육체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비접촉식 데스크 상인의 권능은 이 얼어붙은 세계의 그 어떤 물리적 폭력보다도 잔혹하고 정교했다.
그 시각, 관리실의 태혁은 찻잔을 들어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이 데스크에 닿는 가벼운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인간의 생체 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을 시스템적으로 유료화할 때의 효율성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그는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신지혜가 이전에 정리하다 발견했던 '하위 장부 대여 로그'가 화면에 떠올랐다.
"오태식 씨. 당신이 그동안 뒤로 빼돌린 자원의 원가와, 그로 인해 발생한 연체이자, 그리고 지금 청구되고 있는 실시간 특별 이용료까지 합산하면……."
태혁의 손가락이 엔터 키를 가볍게 눌렀다.
"이미 당신들의 가치는 제 장부상에서 '마이너스'입니다. 즉, 합법적인 처분 대상이라는 뜻이죠."
한편, 지하 보일러실 환기구 방면에서 마석두의 하이에나 약탈자 패거리들이 마침내 고마력 산성 대포를 끌고 빌딩 내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바깥 암시장에서 수많은 생존자의 목숨을 대가로 구해온 흉물스러운 병기였다. 대포의 포신 끝에는 초록색의 걸쭉한 마력 산성 액체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발사되면 철근 콘크리트는 물론, 마도 방벽마저 분자 단위로 부식시켜 무너뜨리는 파괴력을 지닌 물건이었다.
"태식 형님! 가져왔습니다! 이걸로 중앙 수송로의 기둥을 날려버리면……!"
약탈자 무리의 대장이 기세등등하게 외치며 대포의 조준경을 중앙 기둥에 맞추었다.
바닥을 기며 피를 토하던 오태식은 광기에 찬 눈으로 소리쳤다.
"쏴! 당장 쏴버려! 그 데스크충 새끼의 대가리를 이 산성에 녹여서 마셔버릴 테니까!"
검붉은 기계 장치가 요란한 구동음을 내며 에너지를 차징하기 시작했다. 포신 끝의 녹색 광원이 극도로 압축되며 주변의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바로 그 순간.
태혁의 모니터 위에 오태식의 잔고 현황을 나타내는 프로필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잠겼다.
[띡-!] [경고: 대상자 '오태식' 외 2인의 총자산 가치가 최하한선(0.00%)에 도달.] [보증 한도 초과 (Guarantee Limit Exceeded)] [시스템 자동 조항: 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즉각적인 '강제 도산 및 물리적 압류 결산'을 집행합니다.]
"지급 불능이군요. 파산을 선언합니다."
태혁이 건조한 어조로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산성 대포의 발사 버튼을 누르려던 오태식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태식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져온 배낭 속의 텅스텐 합금 주괴와 고기, 그리고 침입자들이 자부하던 고마력 산성 대포의 표면에 황금색의 시스템 사슬 문양이 쉴 새 없이 휘감기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왜 안 움직여?!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안 움직여!"
오태식이 절규했다. 하지만 시스템의 무자비한 집행은 멈추지 않았다.
[압류 품목 등록 완료] - 소유권 이전 대상: 고마력 산성 대포 (낙원 빌딩의 자산으로 귀속됨) - 채무자 소유 스킬 압류: 오태식의 고유 스킬 '유통망 감지(D급)'가 강태혁에게 양도됩니다. - 신체 포기 각서 효력 발동: 채무자들의 생명력을 연체 이자로 환수합니다.
"사, 살려줘……! 강 사장님! 태혁 씨! 살려주세요! 내가 잘못했……!"
쿵!
오태식의 신체가 바닥으로 완전히 고꾸라졌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색 마력 입자들이 공중에서 정제되더니, 낙원 빌딩의 중앙 동력로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두 측근 역시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온몸이 하얗게 풍화되며 바닥의 먼지로 화했다.
그들이 가져왔던 고마력 산성 대포는 이제 완벽히 강태혁의 소유가 되어, 포신을 역으로 돌려 환기구 틈새로 침입하려던 남은 블랙 하이에나 조직원들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상황 종료."
태혁은 태블릿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장부 잔고는 오태식 일당의 파산 절차를 통해 오히려 이전보다 2,400 마일리지가 더 늘어나 있었다. 완벽한 흑자 전환이었다.
터벅, 터벅.
태혁이 로비로 내려서자, 한서윤과 신지혜가 유민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혜는 태혁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태혁 씨, 지하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사소한 장부 정리 프로세스가 있었습니다. 신경 쓸 가치는 없습니다."
태혁의 대답은 기계처럼 명료했다. 서윤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의 손에 들린 세련된 푸른빛의 합금 판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그건 뭐야? 아까 말했던 그 지옥열 합금 강판인가 하는 그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 빌딩의 외곽 방어선에 배치될 새로운 '원격 자산'의 재료이기도 하죠."
태혁의 시선이 차가운 유리창 너머, 영하 40도의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둠 속을 향했다.
그곳에는 낙원 빌딩의 자원을 탐내며 고사 작전을 준비하던 블랙 하이에나의 본진이 숨어 있을 터였다. 태혁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계산된 각도로 호선을 그렸다.
"이제, 적자 요인을 완전히 뿌리 뽑을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