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을 폭파해 강물을 이리로 흘려보내겠다고?"
한서윤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영하 40도의 칼바람보다 더 차가운 공포가 그녀의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한파에 물이 밀려들면 보일러실이고 배수관이고 전부 끝장이야. 강태혁, 너 들었잖아! 저 미친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녀가 다급하게 태혁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태혁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타인의 체온이 닿는 비효율적인 접촉을 원천 차단하는 정교한 회피 기동이었다.
"거리 유지하십시오, 한서윤 씨. 당신의 급박한 호흡에서 발생하는 수증기가 제 태블릿 액정의 가독성을 떨어뜨립니다."
태혁의 시선은 손에 들린 은색 태블릿에 고정되어 있었다. 화면 위로 푸른빛의 3D 홀로그램 도면이 떠올랐다. 낙원 빌딩의 지하 설계도였다.
[시스템: '경영 장부' 활성화] [조회 대상: 낙원 빌딩 지하 보구 및 보일러실] [구조재 특성: 나노 탄소 복합 방제 합금 (물리적 차단율 100%)] [현재 기온: 영하 40.2℃ / 지하 내부 온도: 영상 18.5℃ 유지 중]
"저들은 물리 법칙을 오해하고 있군요."
태혁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화면을 가볍게 쓸어내리자, 수십 개의 수치 데이터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낙원 빌딩의 지하는 아포칼립스 기후 변화 시나리오에 대비해 설계된 특수 방제 재질입니다. 압력 한계치 500bar, 열전도율 0.001W/m·K 미만. 한강의 전 수량이 역류해 들이닥친다 해도 내부 보일러실의 온도는 단 0.1도도 하락하지 않습니다. 수문이 터져 물이 들어차는 순간, 얼어붙는 것은 빌딩이 아니라 빌딩 외벽에 부딪힌 강물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럼……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거야?"
서윤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태혁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기계적인 호선율을 그리며 올라갔다. 냉혹한 계산기 조작음 같은 미소였다.
"가만히 있는 것은 자원의 낭비입니다. 마석두가 제 장부에 스스로 채무를 적어 넣으려는데, 채권자로서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채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외주 퀘스트를 발행하겠다는 뜻입니다."
태혁이 태블릿을 톡 두드리자, 서윤의 호주머니 속 단말기가 날카로운 비프음을 울렸다.
[알림: 낙원 빌딩 공급망 보호 외주 계약 수신] [임무: 한강 동부 수문 제어실 탈환 및 폐쇄] [보상: 낙원 마일리지 15,000 P / 빌딩 내 개인 숙소 온수 공급권 30일 연장 / 식료품 원가 구매 한도 200% 증액] [실패 패널티: 없음 (단, 미수행 시 향후 3일간 온수 공급 차단)]
"선택하십시오, 한서윤 씨."
태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서윤을 응시했다.
"그들이 수문 제어실을 점령하고 허둥대는 지금이 가장 취약한 타이밍입니다. 당신이 저 무능한 약탈자들의 뒤통수를 치고 수문을 완벽히 폐쇄한다면, 저는 당신의 유민 캠프에 약속된 온수 공급 외에도 추가적인 상업 마일리지 특혜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제 계산에 따르면, 당신들의 생존 확률은 이 계약의 체결 유무에 따라 정확히 47.2% 변동합니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혁의 제안은 잔인할 만큼 명확했다. 실패 패널티가 없다고 적혀 있지만, 온수 공급이 사흘간 차단된다는 것은 이 추위에 얼어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제시된 보상은 유민들의 생존을 완전히 보장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너 진짜 악마 같은 장사꾼이구나."
서윤이 이를 악물며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악마는 계약을 위반하지만, 저는 계약을 철저히 이행합니다. 신용등급의 차이를 구분해 주시길 바랍니다."
태혁의 대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서윤은 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로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군화가 대리석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 * *
서윤이 떠난 로비에 고요가 찾아왔다. 태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수온 변화 그래프를 모니터링했다. 그때, 로비 안쪽의 간이 데스크에서 서류 뭉치를 정리하던 신지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대표님."
지혜의 목소리는 신중했다. 그녀는 품에 안은 서류철을 고쳐 잡으며 태혁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한서윤 씨에게 제시하신 외주 계약서의 상세 항목을 검토했습니다. 보상 수치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것 아닙니까? 현재 낙원 빌딩의 마일리지 보유고 대비 이 정도의 지출은 장부상 일시적인 '적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전직 회계사답게 수치적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태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신지혜 씨. 장부의 표면적 수치만 보는 것은 하급 회계사의 한계입니다."
"예?"
"이번 수문 제어실 점령 작전의 핵심은 단순한 방어가 아닙니다. 한강 동부 수문 제어실 내부에는 대재앙 이전, 구 문명의 마도 공학 기술이 집약된 '고마력 퓨즈'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마석두의 하이에나 패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수문을 부술 생각만 하고 있겠지만, 한서윤 씨가 그 장치들을 수거해 온다면 장부의 자산 가치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태혁이 화면을 튕기자, 신지혜의 눈앞에 예상 가치 변동 그래프가 펼쳐졌다. 붉은색 곡선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모습이 선명했다.
"고마력 퓨즈의 장부 등록 원가는 개당 5,000 마일리지. 한서윤 씨에게 지급할 보상 총액을 상회하고도 남는 이익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고수익 자산을 매입하기 위한 선급금 투자입니다."
지혜는 침을 삼켰다. 태혁의 정밀하고 냉혹한 설계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서윤의 생존 의지마저도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의 톱니바퀴로 소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태혁이 서류철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난민 보육 담당 유민들의 이번 주 식료품 대여 이자율을 기존 5.2%에서 1.2%로 감면 처리하십시오."
지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감면이요? 대표님께서 이자를 깎아 주신다고요? 비효율적인 자선 행위는 절대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면서……."
"자선이 아닙니다. 계산적 보정입니다."
태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보육 담당 유민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될 경우, 영유아 사망률이 증가합니다. 이는 미래의 잠재적 노동력 및 외주 용역 공급망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지금 식료품 이자를 감면해 주는 것은, 향후 5년 뒤 낙원 빌딩이 확보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의 잔존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유지 보수 비용입니다. 감정에 휘둘려 베푸는 온정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지혜는 태혁의 얼굴에서 단 하나의 인간적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인간의 얄팍한 동정심은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지만, 태혁의 이 차가운 계산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신뢰의 보증수표였기 때문이다.
"……대표님의 판단이 맞습니다. 즉시 이자율 조정 조항을 장부에 반영하겠습니다."
지혜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태혁은 다시 태블릿의 모니터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약 두 시간 뒤.
쿠구구궁-!
멀리 한강 동쪽에서 나직한 진동이 빌딩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수문 제어실 방향이었다. 일반적인 폭발음이 아니었다. 수문이 강제로 닫히며 수압이 급격히 차단될 때 발생하는 수격 현상의 진동이었다.
[알림: '한강 동부 수문 제어실' 제어권 변동 감지] [점유 세력: 낙원 빌딩 외주 용역 (한서윤 외 2명)] [알림: 수문 완전 폐쇄 완료. 우회 침수 경로 차단됨.]
"해냈군."
지혜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로비 한편에서 추위에 떨며 상황을 지켜보던 유민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강물이 들이닥쳐 보일러가 멈추고 몰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태혁의 시선은 오직 장부의 실시간 정산 화면에만 꽂혀 있었다.
터벅, 터벅.
로비의 자동문이 열리며 한서윤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가죽 갑옷 여기저기에 검붉은 피가 튀어 있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었다.
"하아…… 하아……. 똑똑히 봐, 강태혁. 약속대로 수문은 완전히 걸어 잠갔어. 방해하던 하이에나 놈들은 전부 다리 밑으로 던져버렸고."
서윤이 등 뒤에 매고 있던 커다란 금속 배낭을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배낭 지퍼가 열리며 푸른빛의 마력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원통형 부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쇠막대기 같은 것들도 싹 긁어왔어. 제어실 구석 구석에 처박혀 있더라고.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야?"
태혁은 지체 없이 다가가 장부의 스캔 기능을 활성화했다. 푸른색 레이저 가이드 선이 부품들을 훑고 지나갔다.
띠링!
[시스템: 특수 자원 발견 - '구 문명의 고마력 퓨즈' 12개] [장부 원가 평가 중...] [평가 결과: 개당 가치 8,500 마일리지] [총 자산 가치 상승: 102,000 마일리지] [경영 장부 누적 자산액 기준치 초과!]
화면 전체가 황금빛 경보로 가득 찼다.
[축하합니다! 낙원 빌딩의 자산 가치가 이전 대비 1,000% 폭등하였습니다.] [시스템 영토 등급 상승: 레벨 1 → 레벨 2 (철벽의 요새)] [낙원 빌딩의 물리 방사 역장 반경이 50m에서 150m로 확장됩니다.] [신규 원가 구매 목록이 해금되었습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빌딩 전체가 가볍게 요동쳤다. 빌딩 외곽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역장이 바깥쪽으로 거대하게 팽창하며 쌓여 있던 눈더미들을 밀어내는 광경이 로비 유리창 너머로 선명하게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서윤이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태혁은 요동치는 빌딩의 진동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빠르게 갱신되고 있었다.
[레벨 2 달성 특전: 신규 원가 등록] - 품목: 지옥열 합금 강판 (원가: 장당 150 마일리지) - 특성: 초고온 마법 열 처리된 특수 장갑판. 물리 관통 저항력 S급. 무인 포탑 및 외벽 보강의 핵심 자재.
"격차가 벌어졌군요."
태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마석두와 그의 약탈자 집단은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수문을 폭파하려 했지만, 결국 그 행위는 태혁에게 막대한 문명 유산을 헌납하는 꼴이 되었다. 적들의 위협을 역으로 이용해 완벽한 격차 상승을 이루어낸 것이다.
"지옥열 합금 강판이라……."
태혁은 즉시 머릿속으로 기하학적인 설계를 시작했다. 이 합금 강판과 고마력 퓨즈를 결합한다면, 빌딩 외곽에 배치할 수 있는 무인 방어 포탑의 제작 원가를 90% 이상 절감할 수 있었다.
이제 빌딩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도, 침입하려는 적들을 입구에서부터 분자 단위로 분해해 버릴 무인 자동 방어 체계를 구축할 준비가 끝난 것이다.
"계약에 따른 보상은 즉시 지급되었습니다. 당신의 단말기를 확인하십시오, 한서윤 씨."
태혁의 말에 서윤이 단말기를 확인하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늘어난 마일리지와 연장된 온수 권한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치사한 장사꾼인 줄 알았더니…… 약속 하나는 칼 같네."
서윤이 땀을 닦으며 픽 웃었다.
"신용은 제 장부의 핵심 가치니까요."
태혁은 그렇게 말하며 태블릿을 품에 넣었다. 로비 안의 유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서윤을 맞이했고, 신지혜 역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모든 상황이 완벽한 통제 하에 흑자 궤도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태혁의 시야 구석에 붉은색 경고등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위이잉-.
[경고: 장부 연동 모니터링 시스템 감지] [감지 위치: 지하 2층 자원 보관소 제3 구역] [상태: 비인가 복제 키를 통한 물리적 접근 시도 발생] [비인가 장부 입력 로그 갱신 중...]
태혁의 차가운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신지혜가 안심하며 유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 평화로운 등 뒤로, 낙원 빌딩의 가장 깊숙한 어둠 속에서 쥐새끼 한 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빌딩 내부의 자원창고 장부 입력 키를 은밀하게 복제해 유물을 빼돌리려던 기회주의자, 오태식의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