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협상이라."
태혁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영하 40도의 바깥 날씨만큼이나 건조했다.
그는 집무실 데스크에 놓인 크리스탈 컵을 가볍게 흔들었다. 미지근한 물 표면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가 이내 완벽한 수평을 되찾았다. 요동치는 외부의 정세와 달리, 이 공간의 엔트로피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태혁 씨, 저들의 제안을 수락하실 건가요?"
한서윤이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블랙 하이에나의 악명은 지상 생존자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마석두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수락과 거절은 감정의 영역이다, 서윤 씨."
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셔츠 소매 단추를 정돈했다.
"상업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신규 수입원 거래 제안'에 불과해. 적대 세력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와 장부에 이름을 적겠다고 하는데, 굳이 문을 닫아걸 이유가 없지."
"하지만 마석두는 교활한 자입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예요."
신지혜가 태블릿 PC를 품에 안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거들었다. 태혁은 대답 대신 신지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꿍꿍이를 분석할 정량적 데이터가 필요하겠군. 지혜 씨, 어제 정리하라고 지시했던 낙원 빌딩 마스터 키의 하위 장부 대여 로그 분석 결과를 가져와."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신지혜가 다급히 태블릿을 조작해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복잡한 이진법 코드와 암호화된 시스템 로그가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태혁의 냉철한 안광이 데이터의 나열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의 뇌신경은 이미 시스템 장부의 알고리즘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노이즈를 걷어내고, 오직 수치와 경로만을 추적하는 이성적 판단 장치가 가동되었다.
[낙원 빌딩 마스터 키 하위 장부 - 비인가 대여 로그 검출] - 최초 변조 시점: 튜토리얼 5일 차 - 누적 유출 자원: 정제 밀가루 4.2톤, 고농축 난방유 1,800리터, C급 마력석 45개 - 백도어 접속 IP 경로: 외부 망 식별 코드 [BH-09]
태혁의 손가락이 특정 로그 체인을 가리켰다.
"오태식이 사용했던 백도어 결제 경로군."
"맞아요." 신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오태식이 내부에서 자원을 빼돌릴 때 사용한 장부 대여 로그를 추적해 보니, 그 자원들의 최종 수신처가 전부 블랙 하이에나의 전방 보급 기지였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신지혜가 화면을 쓸어 넘기자, 기하학적인 마력 전도 그래프가 나타났다.
"오태식이 빼돌린 C급 마력석 45개는 블랙 하이에나가 암시장에서 구매한 마력 무기들의 전력 공급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마력석들은 우리 빌딩의 '하위 장부 대여' 형식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지배권 계약의 하위 범주에 귀속되어 있겠군."
태혁이 단번에 핵심을 짚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수학 공식의 난제를 풀어낸 공학자의 차가운 만족감에 가까웠다.
"그렇습니다. 마석두가 보유한 마력 무기들은 본인들이 정당하게 획득한 자산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시스템 법리상 그 무기들은 여전히 '낙원 빌딩에서 무단 대출된 미납 자원'으로 분류됩니다. 즉, 무기들의 전력 공급원이 대표님의 경영 장부가 지정한 독점 영혼 계약 담보물에 자동으로 연동되어 있는 상태예요."
"완벽하군."
태혁이 중얼거렸다.
오태식이라는 기생충을 박멸하고 남은 잔해가, 오히려 마석두의 목을 죌 가장 완벽한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마석두가 아무리 강력한 마력 무기로 낙원 빌딩을 위협하려 해도, 그 무기의 방전 레버는 이미 태혁의 손가락 끝에 쥐어져 있었다.
"협상단을 1층 로비로 들여보내라. 단, 방역 절차는 철저히 진행하도록."
태혁이 차갑게 지시했다.
***
낙원 빌딩 1층 로비.
웅장한 대리석 바닥 위로 매끄러운 투명 유리 격벽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유리가 아니었다. 낙원 빌딩의 100% 물리 반사 역장을 분할하여 설계한 '절대 격리 장벽'이었다.
격벽 너머로 세 명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가장 앞에 선 사내는 육중한 체구에 얼굴 절반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가진 자였다. 블랙 하이에나의 행동대장이자 이번 협상단의 단장인 '독니' 강철두였다. 그의 가죽 코트 자락 사이로 묵직한 마력 권총과 도끼가 얼핏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격벽 뒤의 대기석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기계적인 시스템 안내음이 로비에 울려 퍼졌다.
[경고: 안전 구역 진입.] [비접촉 상호작용 프로토콜이 가동됩니다.] [모든 무장 및 외부 마력 방출이 100% 비활성화됩니다.]
위이잉-.
강철두의 허리춤에 서려 있던 붉은 마력이 신기루처럼 사그라들었다. 마력 권총의 격발 장치가 내부적으로 고정되고, 도끼날의 예기가 시스템의 권능에 의해 강제로 억제되었다.
"이, 이게 무슨……!"
뒤를 따르던 호위병들이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이제 플라스틱 장난감과 다를 바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강철두가 이빨을 드러내며 호위병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격벽 너머, 정갈한 철제 데스크 뒤에 앉아 있는 강태혁을 노려보았다.
태혁은 비서인 신지혜가 건넨 서류철을 정리하며, 마치 구청의 말단 공무원이 민원인을 대하듯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그 냉담함과 여유에 강철두는 묘한 모욕감을 느꼈다.
"네놈이 이 빌딩의 주인, 강태혁이군."
강철두가 유리 격벽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격벽은 그의 타격 에너지를 완벽히 흡수하여 소멸시켰다.
"마석두 대장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직접 협상의 기회를 주셨다. 네놈이 남서쪽 전력 허브에서 부린 잔재주는 높이 평가하지.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이 빌딩 주변을 영원히 포위할 수 있다.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굶겨 죽여 주겠다는 말이다. 지상에서 나오는 모든 원자재와 식량은 우리 블랙 하이에나의 통제하에 있으니까!"
강철두의 도발은 매서웠다. 낙원 빌딩의 결계가 아무리 무적이라 한들, 내부의 인간들이 먹고살 자원이 끊기면 결국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협박이었다.
그러나 태혁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턱을 괴고 강철두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혜 씨."
"네, 대표님."
"방금 이자가 한 말에서 논리적 오류를 몇 개나 찾아냈지?"
신지혜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낙원 빌딩의 식수 및 기본 식량 비축량은 자급자족 시스템을 통해 영구 보존되므로 외부 공급망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둘째, 현재 한강 유역의 원자재 유통권은 블랙 하이에나가 아닌 저희 외주 용역망이 64% 이상 점유하고 있습니다. 셋째……."
"셋째는 내가 말하지."
태혁이 서류철을 덮으며 강철두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는 상대를 향한 분노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경멸만이 수치화되어 담겨 있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빌딩 주변을 맴돌며 짖어대는 개떼들의 협박치고는 너무 구태의연하다는 거다."
"뭐라고? 이 새끼가……!"
강철두가 격분하여 소리쳤지만, 태혁의 목소리는 격벽의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그들의 고막을 안정적으로 짓눌렀다.
"마석두가 너희를 보낸 진짜 이유를 모를 줄 알았나? 협박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법이다. 지금 너희 블랙 하이에나의 식량 창고에는 단 3일 치의 밀가루밖에 남지 않았지. 지난번 한파로 난방용 마력석이 고갈되면서 지하 대피소의 온도가 영하 25도까지 떨어졌고,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해 급식량을 절반으로 줄였다더군."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강철두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내부 기밀이 격벽 너머의 온화해 보이는 청년의 입에서 막힘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혁은 데스크 밑에 활성화된 가상 장부의 인터페이스를 보고 있었다. 마석두 세력이 유출했던 마력석의 에너지 흐름과 소비 패턴을 실시간으로 역추적한 결과였다. 시스템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소비 전력의 급감과 자원 이동 경로의 정체는 곧 극심한 보급난을 의미했다.
"공급망을 차단해 우리를 굶겨 죽이겠다고?"
태혁이 펜을 가볍게 돌렸다.
"오히려 굶어 죽기 직전인 건 너희 쪽 아닌가. 마석두는 지금 당장 부하들의 입에 풀칠할 밀가루 한 포대가 아쉬워서, 종전 협상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거래의 물꼬를 트려 하는 거지."
강철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태혁의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남서쪽 전력 허브가 무력화되면서 그들의 에너지 유통망은 붕괴했고, 극심한 한파 속에서 식량 수급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마석두는 이 판국에 낙원 빌딩과의 전면전을 치를 여력이 없었다. 당장 내부 폭동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바라는 게 뭐냐."
강철두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협박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이다.
태혁은 가상 장부에서 서류 한 장을 허공으로 드래그했다. 시스템의 푸른 빛이 격벽 표면에 디지털 계약서의 형태로 투사되었다.
"정제 밀가루 100톤."
태혁의 제안에 강철두의 눈이 번쩍 뜨였다. 100톤이면 블랙 하이에나의 전 구성원이 겨울을 나고도 남을 엄청난 양이었다.
"그, 그걸 우리에게 넘기겠다고? 대가는 뭐지? 설마 빌딩의 결계를 풀라거나 하는 허무맹랑한 요구는 아니겠지?"
"나는 비현실적인 거래는 하지 않는다."
태혁이 계약서의 조항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가는 간단해. 너희가 보유한 마력 무기 전량, 그리고 너희 간부진의 사설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시스템 자산의 소유권을 '담보'로 지정한다. 물건은 즉시 인도하되, 대금 결제는 유예해주지."
"담보라고? 무기를 넘기라는 건가?"
"아니. 무기는 너희가 그대로 가지고 써도 좋다. 단지 '소유권'의 명의만 이 낙원 빌딩의 장부에 담보물로 임시 등록하는 것뿐이다. 기한 내에 대금을 정상 납부하면 담보는 자동으로 해제된다. 무기를 압수당하지도 않고 당장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너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자선 사업이지."
강철두는 계약서의 텍스트를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확실히 이상한 조항은 보이지 않았다. 당장 무기를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식량을 먼저 준다니 굶주린 부하들을 살릴 유일한 돌파구였다. 단지 계약서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몇 가지 표준 약관이 마음에 걸렸지만, 눈앞의 굶주림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놓았다.
[낙원 빌딩 표준 거래 약관 제14조 (복리 이자 조항)] - 본 계약은 시스템이 보증하는 원칙에 귀속됩니다. - 대금 연체 시, 연체 이자는 시간당 2.5%의 복리로 누적됩니다. - 채무 한도 초과 시, 시스템 권한에 의거하여 등록된 모든 담보물의 소유권이 영구히 채권자(강태혁)에게 귀속되며, 강제 집행이 단행됩니다.
"시간당 2.5% 복리라…… 이자가 좀 세군."
강철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굶어 죽어가는 부하들의 목숨값 치고는 저렴하지 않나?"
태혁의 차가운 미소가 유리창에 비쳤다.
"선택은 자유다. 서명하지 않고 돌아가서 마석두와 함께 밀가루 대신 눈보라를 씹어 먹던가. 아니면 이 계약서에 서명하고 따뜻한 빵을 구워 먹던가."
강철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석두 역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단 식량 확보가 우선'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어차피 나중에 힘으로 빼앗으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도 들었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계약서 따위가 지닌 물리적 강제력이 얼마나 되겠냐는 무법자 특유의 오만이었다.
"좋다. 서명하지."
강철두가 격벽에 마련된 시스템 입력 패드에 거칠게 손바닥을 대고 지장을 찍었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정제 밀가루 100톤의 양도가 확정되었습니다.] [대금 상환 기일: 7일 후.] [담보 설정: 블랙 하이에나 소유 마력 무기 145점 및 간부진 사설 인벤토리 자산.]
"식량은 내일 아침까지 지정된 지점으로 송출하겠다."
태혁이 서류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해 주어서 감사하군, 강철두 단장."
"흥, 후회하지 마라. 강태혁 대표."
강철두는 계약서 사본을 챙겨 들고, 승리감에 도취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의 등 뒤로 호위병들이 기세등등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방금 목에 교수형 밧줄을 걸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로비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신지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정말로 저들에게 7일의 시간을 주실 건가요? 7일이면 저들이 식량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공격해올 수도 있습니다."
"7일이라."
태혁이 데스크 위의 시스템 제어 콘솔을 활성화했다.
그의 눈앞에 블랙 하이에나와의 계약서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태혁의 손가락이 계약서 우측 상단에 위치한, 아주 작고 정교한 톱니바퀴 모양의 아이콘을 터치했다.
그것은 오태식을 처단하고 획득했던 낙원 빌딩 시스템의 숨겨진 권한이자, 수지타산 보정 조항의 하위 규칙이었다.
[낙원 빌딩 관리 시스템 - 수지타산 보정 조항 제12조 가동] - 채권자의 권한으로 계약의 결산 주기를 임의 조정할 수 있습니다. - 단, 결산 주기 단축 시 소정의 시스템 마력이 소모됩니다. (소모 마력: 10)
태혁의 마력 수치가 10만큼 깎여 나갔다. 그와 동시에 계약서의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7일이라고 했지?"
태혁이 무심히 중얼거렸다.
"상환 기일은 7일이지만, '결산 주기'는 계약서 표준 약관 제24조에 의거해 채권자의 재량으로 변경할 수 있다."
띠링-!
[경고: 블랙 하이에나 세력과의 계약 결산 주기가 변경됩니다.] [기존: 주간 마감 (7일) -> 변경: 일일 마감 (24시간)] [이에 따라 복리 이자의 적용 주기가 '시간당'에서 '분당'으로 가속화됩니다.]
"일일 마감……!"
신지혜가 비명을 지르듯 숨을 들이켰다.
"이러면 저들이 빌딩 경계를 벗어나 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첫 번째 이자 연체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확해."
태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콘솔의 최종 확인 버튼을 눌렀다.
딸깍-.
사인을 하고 낙원 빌딩의 정문을 나선 강철두의 발걸음이 아직 눈밭 위에 몇 자국 찍히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시스템의 무자비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최초 결산까지 남은 시간: 00:00:10] [9…… 8…… 7……]
태혁은 창밖의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는 블랙 하이에나의 뒷모습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서 붉은빛의 마력 전도 스킬이 차갑게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