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노란색 포스트잇이 손끝에서 바스라질 것처럼 구겨졌다.

[지안아, 미안해. 내 마지막 구원은 너를 떠나는 거야. 더 이상 아프지 마. 네 봄은 나 없이도 눈부시게 피어날 테니까.]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감각을 잃었다.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틀리에의 침묵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지안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목구멍에 뜨거운 모래가 가득 찬 것처럼 꺽꺽거리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언제나 이 화장대 거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어주던 서도진이었다. 늘 한 걸음 뒤에서, 무접촉 선을 지키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괜찮다고 말하던 바보였다.

그가 사라졌다.

지안의 시선이 흔들리며 거실 모퉁이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구석, 벽지와 가구 틈새에서 미세하게 명멸하는 붉은 빛이 있었다. 채승현이 심어둔 불법 도청 및 감시 장치였다. 가문의 결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숨겨둔 이질적인 기운이 그곳에서 독사처럼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끈 하나가 툭 끊어졌다.

‘채승현, 네가 결국…….’

지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유일한 감각은 가슴 한가운데가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공동(空洞)뿐이었다.

도진은 제 목숨을 제물로 바쳐 채승현과 거래를 하러 간 것이 분명했다. 지안을 가문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는, 그 미련하고 헌신적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안은 포스트잇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종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아카시아 향기. 그것은 도진이 지안의 고통을 흡수할 때마다 피어나던 구원의 냄새였다.

“어디 있어…….”

지안이 입술을 깨물며 일어섰다.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디 있는 거야, 도진아!”

그녀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

밤하늘은 검은 잉크를 쏟아부은 듯 어두웠고, 장대비는 사정없이 지안의 뺨을 때렸다.

우산도 없이 뛰쳐나온 지안의 머리칼과 옷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차가운 빗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지안은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공감각적 낙인의 저주가 빗방울의 타격음마저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환해 귓가를 찔러댔다. 차들이 내뿜는 매연은 목을 조르는 유독가스처럼 느껴졌고, 번쩍이는 가로등 불빛은 안구를 파고드는 바늘 같았다.

하지만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수많은 도시의 악취 속에서, 단 하나의 향기를 찾아야 했다.

도진의 향기.

그의 정화 성분이 품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포근한 아카시아 향.

길바닥에 고인 빗물 위로 옅은 금빛 입자들이 일렁이는 환각이 보였다. 공감각 능력이 극한으로 치닫자, 숨겨진 궤적이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야.’

지안은 빗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들이마시는 공기마다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왜 몰랐을까. 왜 그가 다가올 때마다 밀어내기만 했을까.

그의 손이 닿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기적 뒤에, 그가 짊어져야 했던 반사 통증의 무게를 왜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그는 매번 지안의 비명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던져 넣었던 것이다.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들이 비바람에 잎을 모조리 빼앗긴 채 앙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수명을 다해가는 도진의 모습 같아 가슴이 불타는 것처럼 아려왔다.

점층적인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안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사라져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내가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걸까?

어째서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지 못하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걸까?

“도진아…… 제발…….”

지안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함 끝에 비릿하고 무거운 철분 냄새가 섞여 있었다.

피비린내였다.

***

인적이 끊긴 폐공장 뒤편의 공터.

가로등 불빛마저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 연화 제약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차량 세 대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 차가운 불빛의 중심에, 도진이 있었다.

도진은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호흡은 찢어진 풀무질 소리처럼 거칠었다.

“서도진 씨, 스스로 걸어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사설 경호팀의 대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도진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쓰러지시면 곤란합니다. 채승현 상무님께서 당신의 신선한 혈액 샘플을 온전하게 회수하라고 지시하셨으니까요.”

도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온몸이 발작하듯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반사 통증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동안 지안의 고통을 대신 흡수하며 누적된 저주의 대가가, 비를 맞으며 체온이 떨어지자 폭발적으로 그를 덮친 것이다.

도진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빗물 고인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붉게 물든 손수건이었다.

그가 지안의 눈을 피해 몰래 피를 토할 때마다 사용했던, 비극의 증거물. 빗물에 젖은 손수건에서 붉은 핏물이 안개처럼 번져나가며 아스팔트를 적셨다.

“하아…… 흑…….”

도진이 고개를 숙인 채 피침 가득한 숨을 내뱉었다. 가슴을 쥔 그의 손가락 끝이 바르르 떨렸다. 생명 잔존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 육체는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경호원들이 그를 가차 없이 일으켜 세우려 다가서던 그 순간이었다.

“그 손 치워.”

갈라지고 젖은, 그러나 서슬 퍼런 목소리가 골목길의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경호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지안이 서 있었다. 온몸이 비에 젖어 엉망이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떤 때보다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도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잃어가던 그의 눈동자가 지안을 발견하자마자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 안아……?”

그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약했다.

“왜…… 왜 여기 있어…… 돌아가…… 어서!”

도진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갈라져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격한 기침과 함께 붉은 선혈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다가오지 마! 내 몸에 닿으면…… 너까지 죽어! 어서 가란 말이야!”

그는 지안이 자신에게 닿을 때 일어날 반사 작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접촉할 때 가해지는 통증과 수명 단축의 속도는 배가 된다. 도진은 지안이 그 고통을 감당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방어적으로 물러서며,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채지안은 이제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도진이 먼저 내밀어 주었던 손을,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뻗기로 결심했다.

“내가 아프지 않은 봄은 필요 없어.”

지안의 목소리가 빗속에서 단단하게 울렸다.

“너 없는 구원 따위, 나한테는 지옥이야.”

“지안아, 제발……!”

도진이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그의 무릎은 이미 힘을 잃고 꺾여 있었다.

지안은 망설임 없이 빗속을 뚫고 달려갔다.

경호원들이 그녀를 가로막으려 손을 뻗었지만, 지안은 그들의 사이를 날렵하게 빠져나가 도진의 앞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대로, 도진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무접촉 생활 수칙 3계명. 선을 넘지 말라는 잔혹한 규칙.

그 모든 금기가 두 사람의 살결이 맞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깨어졌다.

지안이 도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젖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도진의 전신이 굳어졌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두 사람을 때리던 차가운 빗물이 그들의 살결에 닿는 순간, 따스한 온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비린내와 매연의 악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폭발적인 아카시아 향기가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한겨울의 한복판에 갑자기 찬란한 봄날의 정원이 들어선 것처럼,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잎들이 환각처럼 두 사람의 주위를 감싸며 흩날렸다.

“아…….”

도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던 불길 같은 통증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얼어붙었던 혈관에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했고, 흐려지던 시야가 맑게 개었다.

지안은 느낄 수 있었다. 도진의 생명력이 자신의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동시에 도진이 짊어지고 있던 깊은 고통의 잔재가 자신의 심장으로 역류하는 것을.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왔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지안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지안은 도진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게 네가 느끼던 아픔이었구나.’

지안은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온전한 상생의 안도감이었다.

“도진아, 나 봐.”

지안이 도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도진의 차가운 피부가 지안의 온기로 인해 서서히 따뜻해지고 있었다.

“이제 도망치지 마. 내가 너 절대 안 놓아.”

도진은 멍하니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밀어내기 바빴던 소꿉친구가, 이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규칙을 깨부수고 무릎을 꿇어 안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을 향한 단단하고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지안아…… 너 정말…….”

도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지안의 손등을 적셨다.

두 사람의 체온이 완벽하게 맞물리며, 골목길은 오직 그들만의 온기로 가득 찼다.

***

그러나 그 따뜻한 구원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스스스-.

빗소리 사이로 이질적이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끼어들었다.

경호원들이 일제히 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채승현의 최측근이자, 연화 제약의 정예 추적자들을 이끄는 부대장이었다. 그의 손에는 일반적인 무기가 아닌, 정밀하게 설계된 검은색 원통형 장치가 들려 있었다.

“아름다운 재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채지안 씨.”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상무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접촉을 통한 정화 반응이 극대화되었을 때, 미가공 상태의 감각 살상기를 작동시키라고.”

장비의 상단에 달린 인디케이터가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주파수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것은 공감각 낙인을 지닌 자들의 신경계를 강제로 뒤흔들어 극도의 통증을 유발하는, 가문의 비인도적인 신형 병기였다.

지안의 귀에 고주파의 이명이 꽂히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엄습했고, 도진 역시 다시금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추적자들이 두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듯 장치를 조준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자극이 가해질수록, 당신들의 신경은 완전히 파괴될 테니까요.”

보랏빛 파동이 두 사람의 발밑까지 뻗어 나왔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빗속의 공터. 도진을 품에 안은 지안의 눈동자에 거대한 위기감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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