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경고등이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우며 기괴하게 점멸했다. 본사 연구소의 철옹성 같던 방화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채승현이 파놓은 잔혹한 올가미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네 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냉혹한 침묵이 끊어진 뒤에도, 정밀 아틀리에의 거실에는 얼음 같은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거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서도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안색은 며칠 전보다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뺨의 핏기는 가시고, 입술은 겨울 서리를 맞은 잎사귀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안의 가슴속에서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타인의 아픔을 제 것처럼 느끼는 공감각적 저주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롯이 그를 향한 날 것 그대로의 두려움이었다.
“가지 마.”
지안이 유리 벽에 이마를 기댄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함정이야. 채승현은 처음부터 널 그 지하 실험실로 끌어들이려고 이 연극을 꾸민 거라고. 가면 안 돼, 도진아.”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유리 벽 너머 지안의 실루엣을 어루만지듯 허공을 쓸었다. 그의 손끝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와 차가운 유리 표면에 하얗게 김을 서리게 했다. 지안은 그 온기조차 아까워 숨을 죽였다.
“내가 가지 않으면 그 자는 네 숨통을 조여올 거야.”
도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결의는 벼려진 칼날처럼 단단했다.
“나한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지안아. 하지만 너에게는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봄이 있잖아. 그걸 채승현의 손아귀에 더럽혀지게 둘 순 없어.”
“내 봄에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제발…….”
지안이 유리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으나, 도진은 그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서늘한 마찰음이 아틀리에의 고요를 깨뜨렸다. 지안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거실 모퉁이, 가구 틈새에서 미세하게 깜빡이는 이질적인 붉은 빛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발견했던 채승현의 감시 장치였다. 검은 거미처럼 숨어 아틀리에의 숨소리까지 빨아들이는 저 흉물스러운 기계가, 결국 도진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
연화제약 본사 지하 4층.
일반 사원들의 통행이 엄격히 제한된 비밀 연구실의 통로는 온통 질식할 것 같은 은색 중금속 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가운 백색 형광등 불빛이 먼지 하나 없는 바닥에 반사되어 눈을 시리게 했다.
도진은 짓눌리는 듯한 가슴을 움켜쥐고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부 깊은 곳에서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피가 얼룩진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훔쳤다. 이미 그의 심장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지안의 공감각적 고통을 대신 짊어질 때마다 심장이 타들어 가던 반사 통증은, 이제 스킨십이 없어도 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독소가 되어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남은 생명 잔존율은 단 8%.
“어이, 쥐새끼처럼 잘도 기어들어 왔군.”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복도 모퉁이에서 덩치 큰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채승현이 고용한 사냥개, 강진우였다. 그의 손에는 고주파 진동을 유발하는 특수 진압봉이 쥐어져 있었다.
“도련님이 널 아주 곱게 모셔 오라고 하셨거든. 순순히 굴면 덜 아플 거야.”
강진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고주파 소리가 도진의 고막을 때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뇌가 뒤흔들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을 터였다. 하지만 도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가라앉았다.
“비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동시에 도진이 지안을 지키기 위해 단련했던 몸을 날렸다. 8%밖에 남지 않은 생명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파괴적인 움직임이었다. 강진우가 당황하며 진압봉을 찔러왔으나, 도진은 가볍게 상체를 틀어 피한 뒤 그의 손목을 꺾었다. 콰직, 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진압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미친 새끼가……!”
강진우가 비명을 지르며 반대쪽 주먹을 휘둘렀지만, 도진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두꺼운 중금속 격벽에 처박았다. 쿵 하는 굉음이 지하 복도를 울렸다. 도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수록, 그의 전신에서 짙은 아카시아 향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향기가 아니라, 생명을 불태워 만들어내는 마지막 보루였다.
“채승현에게 전해.”
도진이 강진우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려 강진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지안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는 날에는, 이 건물을 통째로 무너뜨려서라도 네놈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고.”
강진우는 도진의 눈에 서린 진짜 광기를 보았다. 목숨을 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한 초연함 앞에서, 잔인함을 자처하던 용병조차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도진은 그를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팽개치고, 굳게 닫힌 실험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철컥, 하며 그의 등 뒤로 격벽이 이중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로 걸어 들어간 감옥이었다.
***
그 시각, 지안은 아틀리에를 뛰쳐나와 세아의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세아의 연구실 문을 부서질 듯 두드리자, 헝클어진 머리의 세아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채지안?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세아야, 제발 도와줘. 도진이가…… 도진이가 채승현한테 갔어.”
지안이 세아의 가운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툭툭 떨어졌다. 세아는 지안의 초췌한 몰골과 떨리는 손을 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내가 뭐라 그랬어. 그 무모한 짓거리 좀 그만하라고 했잖아!”
세아가 책상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올려두었던 유리 비커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너희 둘이 살을 맞댈 때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진짜 몰라서 이래? 2화 때 내가 경고했지. 그 계약 이면에 숨겨진 가혹한 생명력 흡수 공식 말이야!”
세아가 벽면의 스크린을 켰다. 복잡한 화학 기호와 결합 공식, 그리고 도진의 심전도 그래프가 붉은색 하강 곡선을 그리며 나열되어 있었다.
“도진이의 몸은 네 고통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야. 하지만 그 스펀지는 무한하지 않아. 네 공감각적 저주를 아카시아 향기로 정화해 소멸시키는 대가로, 도진이의 심장은 가루가 되고 있어. 이대로 가면 다음 단계는 부작용으로 인한 완전한 소멸이야. 도진이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다고!”
지안은 귀를 막고 싶었다. 잔인한 현실이 송곳처럼 고막을 찔렀다.
“그럼 어떡해? 내가 어떻게 해야 도진이를 살릴 수 있는데? 그냥 이대로 그 애가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세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면을 조작했다. 이윽고 화면 중앙에 푸른빛을 띠는 입체 분자 구조가 나타났다. 겨울날 피어나는 매화처럼 차갑고도 고결한 푸른빛이었다.
“이걸 봐.”
세아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가문의 저주를 영원히 가둘 수 있는 유일한 열쇠야. 고밀도 상생 촉매제.”
지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상생…… 촉매제?”
“그래. 지금까지는 도진이가 일방적으로 네 고통을 흡수하기만 하는 일방통행 계약이었어. 그러니까 도진이의 생명력이 바닥난 거지. 하지만 이 촉매제가 결합한다면 공식이 완전히 뒤집혀. 도진이의 혈청 속에 남아있는 아카시아 정화 에너지를 특수 원소와 결합시켜 역반응을 일으키는 거야.”
세아가 지안의 양손을 꼭 쥐었다. 차가웠던 지안의 손끝에 세아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이 촉매제가 발현되면, 네 양손에 깃든 공감각적 저주는 영구적으로 정화되어 봉인돼. 더 이상 도진이가 네 고통을 대신 가져갈 필요도 없고, 네가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아. 서로의 몸을 만져도 생명력이 깎이지 않는, 진짜 '상생'이 가능해진다고.”
절망으로 가득했던 지안의 세계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번졌다. 가슴속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응어리가 봄눈 녹듯 스르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야? 정말 도진이를 살리고, 우리 둘 다 평범하게 손을 잡을 수 있는 거야?”
“이론상으로는 확실해.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 촉매제를 완성하려면 도진이의 혈청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신선하고, 정화 반응이 활성화된 상태의 혈청이.”
세아의 말에 지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진은 지금 채승현의 지하 비밀 연구실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채승현은 도진을 해부하거나 그의 능력을 강제로 추출하려 할 것이 뻔했다.
“내가 갈게.”
지안의 눈빛에서 방어적이고 유약했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늘 도진의 뒤에 숨어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발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도진이를 데려올 거야. 그리고 그 촉매제를 완성해서, 채승현이 만든 그 더러운 굴레를 우리 손으로 직접 부숴버리겠어.”
세아는 단호한 지안의 태도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기집애야. 이제야 좀 채씨 가문 핏줄답네. 준비해. 내가 뒤를 봐줄 테니까.”
***
한편, 지하 실험실의 두꺼운 격벽 안쪽.
도진은 차가운 수술대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방이 불투명한 유리로 차단된 공간, 스피커를 통해 채승현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대단하군, 서도진. 그 몸 상태로 내 경호원들을 전부 무력화시키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지안이를 향한 그 맹목적인 집착은 과학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야.”
도진은 피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모니터 너머의 승현을 응시했다.
“지안이를 놔줘. 네가 원하는 건 공감각 저주의 치료제잖아. 내 몸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 지안이만큼은 평범하게 살게 놔두란 말이다.”
- “평범하게?”
승현의 나직한 비웃음이 들렸다.
- “지안이는 우리 가문의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이야. 그 아이의 고통 데이터가 있어야 완벽한 통증 무력화 백신을 완성할 수 있어. 그런데 네가 나타나서 그 고통을 전부 치유해 버리니, 내 연구가 자꾸 지체되는 거다. 네 존재 자체가 방해물이라는 뜻이지.”
도진은 가슴을 짓누르는 극심한 통증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닿는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반사 통증이 전신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도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채승현은 지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안의 곁에 머물수록, 계약의 잔혹한 규칙 때문에 결국 지안 역시 서서히 말라 죽어갈 터였다.
‘내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도진의 안구에 붉은 핏발이 섰다. 그가 지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하여 계약을 파기하는 것뿐이었다. 지안이 가문에게 영원히 볼모로 잡히지 않으려면, 자신이 이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했다.
“채승현.”
도진이 피를 토하듯 무겁게 뱉어냈다.
“내가 죽으면…… 네 백신 연구도 끝이야. 내 피 속에 든 정화 성분이 사라질 테니까.”
- “협박인가?”
“제안이다. 내 생명력을 전부 추출해 네 연구 자료로 써라. 대신, 지안이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약속해.”
스피커 너머로 승현이 태블릿을 두드리는 건조한 타자음이 잠시 멈췄다.
- “흥미로운 제안이군. 자정까지 생각해보지.”
통화가 끊기고, 비밀 연구실에는 독가스처럼 차가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도진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 한 장과 펜을 꺼냈다. 손이 덜덜 떨려 글씨를 제대로 쓰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적어 내려갔다. 지안에게 남기는 마지막 진심이었다.
***
새벽 두 시.
세아의 도움으로 채승현의 눈을 피해 무사히 정밀 아틀리에로 돌아온 지안은 다급히 거실 문을 열었다.
“도진아! 서도진!”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지만, 거실을 가득 채운 것은 허공을 떠도는 쓸쓸한 먼지뿐이었다. 언제나 지안이 돌아오면 유리 벽 너머에서 따뜻한 눈빛으로 자신을 맞아주던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거실 바닥에 그어진 투명한 차단선이 유난히 시릴 정도로 선명하게 빛났다.
“도진아…… 제발 대답 좀 해봐…….”
지안은 불안감에 휩싸여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방 안은 도진이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것처럼 아카시아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침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지안의 시선이 화장대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늘 지안이 쓰던 거울 앞에,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이 예쁘게 접힌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접힌 종이를 펼치자, 도진의 곧고 단정한 글씨체가 눈물로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지안아, 미안해. 내 마지막 구원은 너를 떠나는 거야. 더 이상 아프지 마. 네 봄은 나 없이도 눈부시게 피어날 테니까.]
“아니야…… 아니야, 도진아……!”
지안은 포스트잇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이 고요한 아틀리에의 밤을 날카롭게 갈랐다. 도진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안의 손에는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설계도가 쥐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남겨진 시간이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르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