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는 사정없이 뺨을 때려 누르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혀 사방으로 튀는 빗방울들이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불빛을 받아 은색 침묵처럼 번쩍였다.
지안을 향해 일제히 포신을 겨누듯, 채승현의 정예 추적자들이 들고 있는 미가공 상태의 감각 살상기가 낮게 웅웅거렸다. 장비 상단의 인디케이터가 보랏빛으로 완전히 물드는 순간, 공기 중의 주파수가 사납게 뒤틀렸다.
키잉-.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고주파 음에 지안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이명이 두개골 안쪽을 헤집었다. 가문의 낙인자들에게만 작용하도록 설계된 악마적인 파동이 빗속을 뚫고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옆에 쓰러진 도진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미 생명 잔존율이 한계치에 다다른 그의 몸은 작은 파동 하나조차 버텨내기 힘겨운 상태였다. 그의 젖은 코트 안쪽,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비린내가 지안의 예민해진 후각 끝에 걸렸다.
‘피 냄새.’
그것은 타인의 피가 아니었다. 도진이 그녀 몰래 주머니 속 손수건에 토해내며 숨겨왔던, 그의 심장이 타들어 가며 뱉어낸 생명의 흔적이었다. 지안은 그 핏빛 향기를 맡는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빗장 걸어 잠갔던 방어기제가 산산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더는 밀어낼 수 없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그의 헌신이 무서워 뒷걸음질 치던 시간은 이 차가운 빗물 속에서 종말을 고해야 했다.
“도진아.”
지안은 도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친 빗속에서 그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미약한 맥박은 여전히 그녀만을 향해 뛰고 있었다.
차량 헤드라이트의 섬광이 두 사람의 실루엣을 하얗게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내리쬐는 순간, 지안은 자신의 영혼의 문을 거꾸로 개방했다. 언제나 도진에게 고통을 건네기만 했던 수동적인 통로를 스스로 비틀어 쥐었다.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공감각적 낙인의 흐름을 완전히 역방향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지안…… 아, 안 돼……. 손 놔…….”
도진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밀어내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톱 끝이 지안의 손등을 긁어내렸지만, 지안은 오히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어맸다.
두 사람의 손이 완전히 맞물리는 순간, 허공에 기묘한 균열이 일어났다.
파지직!
공감각적 치유 계약의 근간을 뒤흔드는 경고음이 지안의 귓가에서 적색 경보처럼 울려 퍼졌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법칙의 거부 반응이었다. 그동안 도진이 지안의 통증을 흡수할 때마다 피어오르던, 그의 심장을 태우던 노란 불향이 대기 중에서 사납게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흡사 메마른 가을날, 산불에 타들어 가는 소나무 군락의 매캐하고 서글픈 냄새와 같았다.
하지만 지안이 자신의 생명력을 역류시키기 시작하자, 그 노란 불향의 끝자락이 서서히 푸른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마치 매서운 겨울 서리를 뚫고 피어나는 푸른 설강화처럼, 서늘하면서도 극도로 맑은 온기가 두 사람의 접촉면을 타고 역류했다.
“아아아악!”
지안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진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던 타들어 가는 반사 통증의 세포들이, 그녀의 열린 영혼의 통로를 타고 지안의 몸속으로 사납게 들이닥쳤다. 칼날로 심장을 직접 저미는 듯한 고통이었다. 가슴뼈 안쪽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환청이 이명과 섞여 뇌리를 때렸다.
하지만 지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마주 서 있는 추적자들을 쏘아보았다.
“겨우 이딴 걸로…… 우리를 가둘 수 있을 것 같아?”
지안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묵직하게 울렸다.
감각 살상기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파동이 두 사람의 신체 경계선에 닿는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지안은 밀어닥치는 통증 주파수를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도진이 숄더백처럼 짊어지고 있던 치명적인 고통의 절반을 강제로 끌어당겨 한꺼번에 흡수해 버렸다.
이것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었다. 도진의 고통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서로의 생명력을 상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거대한 순환 고리를 만드는 상생의 발악이었다.
지안의 체내로 들어온 보랏빛 파동은 그녀의 푸른 온기와 부딪히며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짓눌린 통증 세포들이 아카시아 꽃향기로 치환되며 그녀의 호흡을 통해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후우-.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빗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짙고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공감각적 낙인을 무력화시키는 거대한 물리적 장벽이었다.
“어, 어떻게…… 기계 수치가 역류하고 있습니다!”
감각 살상기를 조작하던 추적자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지안이 흡수하여 정화한 에너지가 역방향으로 증폭되어 살상기를 향해 몰아쳤다. 보랏빛 인디케이터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장치 내부에서 타들어 가는 기계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장치를 꺼! 당장 차단해!”
부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콰아아앙!
지안이 방출한 푸른 빛의 파동이 대기를 강타하자, 정예 추적자들이 들고 있던 서너 개의 감각 살상기가 동시에 폭발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깨진 부품들이 빗속으로 사방에 흩어졌다. 장비를 들고 있던 비명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들은 손을 감싸 쥐고 진흙 바닥으로 뒹굴었다.
단 한 번의 역전으로, 가문의 최첨단 병기가 고철 덩어리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헉…… 헉…….”
지안은 무릎을 꿇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잔여 통증에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 도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항상 그녀의 고통을 짊어지느라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던 그의 안색에 미약하게나마 붉은 혈색이 돌고 있었다.
“지안아…… 너 대체…… 무슨 짓을…….”
도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짜던 그 지독한 타는 듯한 갈증이 기적처럼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지안이 전해준,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푸른 아카시아의 온기뿐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안이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안 피해. 네가 날 위해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같이 아프고, 같이 살 거야.”
그녀의 말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가문의 잔혹한 등가교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전포고였다.
도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밀어내며 날 선 독설을 내뱉던 소꿉친구는 없었다. 그곳에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불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 한없이 강인하고 아름다운 구원자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다시 한번 꽉 맞잡혔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공간만큼은 봄날의 온실처럼 따스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스스-.
그러나 그 온기를 비웃듯, 어둠 저편에서 검은 세단 한 대가 천천히 굴러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사그라지며 차가 멈춰 섰다. 추적자들의 부대장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차 문 앞으로 다가갔다.
스르륵.
뒷좌석의 짙게 선팅된 유리창이 아주 느린 속도로 내려갔다. 창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채승현이었다.
그는 무릎 위에 태블릿 패드를 올려놓은 채, 여전히 화면에 찍히는 수치들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지안과 도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미련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흥미로운 실험체를 바라보는 듯한 건조한 호기심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흥미롭군.”
승현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를 가르고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박혔다.
“낙인의 공감각을 역방향으로 제어해 상전이(相轉移)를 일으키다니. 내 시뮬레이션에는 없던 변수다, 지안아.”
“채승현…….”
지안이 도진을 감싸 안으며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승현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아주 잔인하고, 모든 상황을 움켜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
“하지만 말이야. 그런 극적인 반발력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네가 그 알량한 상생의 힘으로 서도진을 살렸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가 태블릿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너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숨어 지내던 그 정밀 아틀리에. 거실 모퉁이에 내가 심어둔 작은 선물이 드디어 제 역할을 끝마쳤더군.”
지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4화에서 발견했던, 거실 구석의 이질적인 마력의 흔적이 뇌리를 스쳤다. 단순한 도청 장치인 줄 알고 차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가?
“무접촉의 방을 유지하던 미세 차단 결계의 주파수를 역추적해 완전히 해킹했다.”
승현이 차창 밖으로 태블릿 화면을 돌려 지안에게 보여주었다. 화면 속에는 그들이 머물던 아틀리에의 내부 카메라 피드가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면은 이내 붉은색 오류 메시지와 함께 노이즈로 뒤덮이며 암전되었다.
“이미 그 아틀리에의 보안과 결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너희가 돌아갈 안식처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의 차가운 음성이 빗속으로 흩어졌다.
지안과 도진이 머물던 마지막 피난처가 적들의 손에 완벽하게 장악당했다는 선언이었다. 세단의 유리창이 다시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가운데, 지안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유리창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 사정없이 몰아치는 빗방울이 가죽 시트 대신 차가운 유리 표면을 때리며 흘러내렸다. 승현의 무감각한 시선이 흐릿한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짧고 건조한 명령이 추적자들의 수신기 너머로 울려 퍼졌다.
“회수해라. 두 사람 다 상하지 않게.”
검은 우산들이 일제히 좁혀왔다. 사방을 가로막은 정예 추적자들의 발소리가 젖은 아스팔트를 밟으며 고요하면서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이제 단순한 감각 살상기가 아닌, 도망칠 구멍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물리적인 구속구들이 들려 있었다.
“지안아, 내 뒤로…….”
도진이 이를 악물며 지안의 앞을 가로막으려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지안의 가슴 속에서 가시나무가 돋아나 심장을 찌르듯 극심한 통증이 치솟았다.
“아윽……!”
지안은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과 통증. 그것은 가문의 잔혹한 등가교환 법칙이 내리는 차가운 벌이었다. 도진의 고통을 억지로 나누어 짊어지며 계약을 역전시킨 대가. 타인의 고통을 정화하는 이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녀 역시 심장의 수명을 깎아내는 반사 통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고였다. 시야가 붉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코끝을 찌르는 것은 지독하도록 시린 겨울 동백의 향기였다. 한겨울의 모진 눈바람 속에서 붉은 꽃잎을 채 피우지도 못한 채 툭툭 떨어져 내리는 동백꽃의 단말마. 그것이 지금 지안의 심장 안쪽에서 울리는 고통의 주파수였다.
우리는 정말로 평범한 온기를 나눌 수 없는 운명인 걸까?
서로를 구하고자 마주 잡은 손이, 결국 서로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뿐인 걸까?
왜 우리의 계절은 단 한 번도 따스한 봄을 허락받지 못하고, 이토록 잔인한 겨울의 한복판에만 멈춰 서 있는 걸까?
“지안아! 정신 차려, 내 눈 봐!”
도진이 다급하게 지안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자신의 숨통을 조이던 통증이 사라진 대신, 그 대가가 고스란히 지안의 약한 몸으로 전이된 것을 알아챈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도진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숨겨둔, 피 묻은 손수건보다 더 깊고 짙은 절망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자비롭고 헌신적이던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여 빗물과 함께 처참하게 흘러내렸다.
“왜 그랬어…… 왜 내 아픔을 네가 가져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
“싫어…….”
지안은 도진의 젖은 뺨을 떨리는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며 숨이 턱끝까지 막혀왔지만, 그녀의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도진을 담아내고 있었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숨 쉬는 건 아무 의미 없어. 같이 아플 거야, 도진아. 그게 내 선택이야.”
그들의 애절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는 순간, 출발하려던 승현의 세단이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차 문이 다시 한번 미세하게 열리며, 승현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감동적인 신파극이군. 하지만 너희의 그 무모한 결속도 여기까지다.”
승현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오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태블릿의 화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쐐기를 박듯 마지막 사실을 읊조렸다.
“한세아 박사가 가문 몰래 만들던 그 '상생의 해독제' 포뮬러 말이다. 그 완벽한 설계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지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한세아. 두 사람의 소멸을 막기 위해 가문의 눈을 피해 임상 실험을 진행하며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주었던 아군이었다.
“설마…… 세아 언니를…….”
“방금 전 본사 특별 격리실로 이송을 완료했다. 설계도의 마지막 키는 결국 가문의 자산으로 귀속되었지.”
승현의 비정한 선언과 함께, 그의 태블릿에서 짧은 음성 파일 하나가 재생되었다.
- [지안아! 도망쳐! 도진이 데리고 당장…… 아악!]
지지직하는 거친 노이즈와 함께 끊어지는 세아의 비명 소리.
그것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희망의 동아줄마저 완벽하게 잘려 나갔음을 의미했다.
돌아갈 아틀리에는 파괴되었고, 유일한 치료제를 쥐고 있던 세아마저 납치되었다. 지안의 체온은 계약의 반사 통증으로 인해 급격히 떨어져 가고 있었고, 사방을 둘러싼 추적자들의 그림자가 마침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도진은 지안을 품에 안은 채 주머니 속에서 피 묻은 손수건을 찢어질 듯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에 다 타버린 재 속에서 피어오르는 마지막 불꽃 같은, 처절한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