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가 거실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삐비빅, 비명 같은 전자음이 고요한 아틀리에의 공기를 난폭하게 흔들 때마다, 도진의 손목에 채워진 은색 메탈 밴드가 기괴한 안광을 뿜어냈다. 벽면의 반투명한 유리창 위로 투사된 홀로그램 수치가 가차 없이 깎여 내려갔다.

[Warning: 생명 에너지 잔존율 급감.] [Active Life Index: 12% -> 8%]

단 한 자릿수. 맹렬하게 점멸하는 숫자 '8'은 지안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날카로운 겨울 서리송곳을 박아 넣는 듯했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채, 지안은 제어 패드를 만지는 도진의 넓은 등 뒤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거실 구석에 놓인 벤자민 고무나무의 잎사귀들이 밤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이게…… 뭐야?"

지안의 목소리는 물기 어린 바람처럼 건조하고 갈라져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도진의 손목에 고정되었다. 메탈 밴드의 붉은 섬광이 그의 하얗게 질린 손등을 기분 나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머릿속을 스치는 '무접촉 생활 수칙'의 서늘한 감각에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1.5미터의 거리. 서로를 살리기 위해 그어 둔 보이지 않는 휴전선이 지안의 발끝을 무겁게 조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의 생명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보며, 이성 따위는 눈 녹듯 사라졌다.

"서도진. 내 말 안 들려? 저 화면에 뜬 숫자가 대체 뭐냐고!"

지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도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하게 휜 눈매,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얇은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입술이 비현실적일 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안아. 시스템에 일시적인 오류가 생긴 모양인데……."

"거짓말하지 마!"

지안의 절규가 높은 천장에 부딪혀 날카로운 메아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안 가득 쓴 침이 고였다.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가문의 저주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그녀 자신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생생한 통증이었다.

"오류라고? 12퍼센트에서 8퍼센트로 떨어지는 게 오류야? 한세아가 이 장치를 채울 때 경고했잖아! 네가 내 고통을 치환할 때마다, 네 심장이 타들어 가고 수명이 깎여 나간다고!"

지안은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가리켰다.

"너 방금 나 구하느라 내 살결에 닿았잖아. 그 짧은 접촉 때문에 네 목숨이 이 지경이 된 거잖아! 왜 미련하게 굴어? 왜 나 때문에 네 인생을 버리려고 하냐고!"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안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밤바다 같았다. 거실의 조명이 그의 속눈썹 아래로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침묵은 단단한 콘크리트 벽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안은 그의 침묵이 두려웠다. 그 어떤 모진 말보다, 자신을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맹목적인 헌신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상처받기 싫어 마음에 빗장을 걸어 잠갔던 방어기제가, 역설적으로 그를 밀어내기 위해 가장 날카로운 가시를 돋워 냈다.

"나 이런 거 싫어. 네가 날 위해 희생한다는 그 잘난 영웅 심리, 정말 진저리 처져."

말투에 독가시를 얹었다. 지안은 제 혀끝을 깨물고 싶을 만큼 아픈 말을 고집스럽게 뱉어냈다.

"네가 이러면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아니, 숨이 막혀 마셔버릴 것 같아. 내 몸에 닿지 마. 내 통증이 어찌 되든, 가문에서 나를 해부하든 말든 상관하지 말란 말이야! 네 목숨 값으로 연명하는 이 더러운 저주 따위, 차라리 끝내버리는 게 나아!"

모진 독설이 도진의 가슴에 가닿았을 텐데도, 그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한겨울의 모진 칼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겨우살이 나무처럼, 그는 지안의 날 선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스윽.

도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1.5미터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지안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도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규칙을 깨부수듯 거리를 완전히 좁혔다.

"도진아, 오지 마……!"

지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진은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지안의 뺨에 닿았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살이 닿는 순간, 지안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공감각적 소음들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하고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 그것은 지안의 고통이 도진의 몸을 거쳐 치환되면서 발생하는 구원의 냄새였다.

그와 동시에 도진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의 가슴 안쪽에서 심장을 찌르는 반사 통증이 몰아치고 있음을, 지안은 그의 손가락 끝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서도진, 놔…… 으읍."

"지안아."

도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의 손가락이 지안의 눈가를 가볍게 훔쳤다. 눈물이 닦여 나간 자리에 따스한 온기가 남았다. 지안은 이 모순적인 구원이 너무나 두려워 고개를 저었지만, 도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거두는 대신, 지안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하나만을 살포시 쥐었다. 전체를 쥐면 수명이 더 빠른 속도로 잠식될 것을 우려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럽고 애틋한 타협이었다. 오직 손가락 한 마디만을 잇는 미약한 접촉. 그러나 그 작은 연결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거실 전체의 냉기를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너한테 영웅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도진의 목소리가 지안의 귀가 아닌, 가슴속 깊은 울림판을 두드렸다.

"네가 아침에 눈을 떠서 통증 없이 맑은 하늘을 보고, 누군가의 아픔에 귀를 막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 난 오직 그것만 바랄 뿐이야."

"하지만 네 수명이……."

"상관없어."

도진이 단호하게 지안의 말을 자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너만 온전할 수 있다면, 난 오늘 하루만 살고 사라져도 괜찮아.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도 말고, 날 밀어내려고 애쓰지도 마. 그게 내 선택이고, 내 유일한 구원이니까."

지안의 목구멍이 꽉 막혔다.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로 그를 밀어내려 했던 방어벽이, 그의 깊고 맹목적인 눈빛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 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아카시아 향기가 지안의 심장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설렘과 슬픔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지안은 마침내 깨달았다. 이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 또한, 그가 흐려져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동등한 가치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구원은 파멸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도진이 제 생명을 바쳐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면, 자신은 이 저주의 룰 자체를 부수고 그를 살려내야만 했다. 지안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슬픔이 서서히 단단한 결의로 변해 갔다.

지안은 슬그머니 손가락을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도진은 아쉬운 듯 손을 거두었지만, 그녀의 눈빛에 깃든 변화를 알아챈 듯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세아가 했던 말이 있어."

지안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계약의 이면에 가혹한 생명력 흡수 공식이 존재하지만, 그걸 뒤집을 수 있는 미세한 균열이 있을 거라고 했어. 우리 가문이 처음 이 저주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의 기록들…… 그 안에 실마리가 있을 거야."

도진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지안아, 그건 너무 위험해. 연화제약의 초기 연구 자료는 전부 최고 보안 등급으로 지정되어 있어. 채승현이 직접 관리하는 서브 서버에만 보관되어 있을 텐데……."

"그래서 내가 직접 가져올 거야."

지안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거실 한구석에 놓인 작업용 데스크로 걸어갔다. 모니터 세 대가 차가운 푸른빛을 뿜어내며 켜졌다. 지안의 가문인 채씨 가문에서 자라나며 어깨너머로 배웠던 보안 체계, 그리고 3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며 익힌 해킹 기술을 총동원할 때가 왔다.

"채승현은 나를 단순한 고통 데이터 표본으로만 봐. 내가 가만히 갇혀서 지켜보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더는 그렇게 안 둬."

지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하는 경쾌한 소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화면 위로 복잡한 보안 코드와 연화제약 본사 네트워크의 가상 맵이 그려졌다.

"도진아, 넌 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지? 난 널 살리기 위해 이 저주의 사슬을 끊어낼 거야. 연화제약 본사 연구소의 메인 서버를 해킹해서 초기 설계 보고서를 확보하겠어."

그녀의 눈동자가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아 차갑고 똑똑하게 빛났다. 더 이상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던 나약한 소꿉친구가 아니었다. 도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든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고도 애달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틀리에의 미세 차단 결계 사이로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질 즈음, 지안의 화면에 붉은색 진행 바가 90%를 넘어서고 있었다.

본사 연구소의 1차 방화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초기 설계 보고서의 암호화된 디렉토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안의 개인 스마트폰이 요란한 진동음과 함께 테이블 위에서 덜덜 떨렸다.

지안과 도진의 시선이 동시에 스마트폰 화면으로 향했다. 발신자 제한 번호. 그러나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연락을 취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지안이 침을 삼키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을 켰다.

- "역시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더니, 내 귀여운 사촌 동생이 쥐새끼처럼 내 서버를 갉아먹고 있었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채승현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냉혹했다. 대화 중에도 태블릿 패드를 두드리는 듯한 건조한 타자음이 배경음으로 섞여 들었다.

- "지안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 손바닥 안이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살리고 싶어 하는 그 소꿉친구 녀석 말인데."

승현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서도진이 내 비밀 연구실 주위를 아주 열심히 기웃거리고 있더군. 아주 충직한 사냥개야. 하지만 너무 깊이 들어왔어."

순간, 지안의 모니터 화면이 강제로 전환되며 새로운 창이 띄워졌다. 그것은 연화제약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은밀한 실험실의 실시간 CCTV 화면이었다.

어두컴컴한 복도, 그리고 그 복도의 끝에 위치한 중금속 격벽. 화면의 한구석에는 열감지 센서로 추적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도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진이 지안 몰래 단독으로 채승현의 배후를 캐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던 흔적이었다.

- "그 비밀 연구실은 한 번 들어가면 안쪽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특수 격벽으로 통제되지. 조만간 그 녀석을 위해 아주 아늑한 감옥을 마련해 줄 생각이다. 스스로 그 올가미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만들지, 아니면 네 발로 직접 나를 찾아올지…… 기한은 오늘 자정까지다."

뚝.

냉혹한 단절음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동시에 지안의 모니터 화면에 거대한 경고창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승현이 보낸 최후통첩성 올가미가 두 사람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지안은 떨리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고, 도진의 눈빛 역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드러난 채승현의 거대한 음모와 덫. 두 사람은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위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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