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너머로 뚝, 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기계음이 고요를 찢었다.
채승현의 경고는 차갑게 식어가는 찻잔 속의 찌꺼기처럼 아틀리에의 공기 중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반년. 서도진의 수명이 반토막 날 것이라는 그 서늘한 수치가 지안의 귓가를 집요하게 맴돌았다.
지안은 제 뺨에 닿아 있던 도진의 손가락을 거칠게 쳐냈다.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서둘러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등 뒤의 서늘한 유리 벽에 닿고서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제 손목을 움켜쥐었다.
"만지지 마."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지안은 도진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바닥에 그려진 붉은색 경계선이 두 사람의 거리를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도진은 쳐내진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끝에 남아 있는 지안의 온기가 아쉬운 듯,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의 눈빛에는 채승현의 협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오직 지안의 상처만을 염려하는 깊은 슬픔이 일렁였다.
"지안아. 그 인간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어. 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지안의 목소리가 아틀리에의 높은 천장을 때리고 흩어졌다.
"반년이래. 네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대, 도진아. 내가 너를 만질 때마다, 네가 내 아픔을 가져갈 때마다 네 심장이 타들어 가고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널 아무렇지 않게 만져? 어떻게 내가 네 온기를 바랄 수 있겠어!"
그녀의 눈가에 결국 투명한 눈물이 맺혀 뺨바탕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안은 소매 끝을 세게 쥐어뜯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방어기제가 그녀를 다시 단단한 고독의 껍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도진은 한 걸음 다가서려 했다. 그러나 지안이 반사적으로 몸을 잔뜩 웅크리며 뒤로 물러서자, 그의 발걸음이 허공에서 멈췄다.
"서도진, 제발."
지안의 애원 섞인 독설이 이어졌다.
"나를 동정하지 마. 네 그 잘난 헌신이 이제는 나한테 끔찍한 죄책감일 뿐이야. 그러니까…… 선 넘지 마."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인 뒤, 그대로 뒤를 돌아 격리실로 뛰어 들어갔다. 쾅, 하고 닫히는 문바람에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가늘게 흔들렸다.
홀로 남겨진 도진은 문이 닫힌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슬픔을 넘어, 지안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서글픈 자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묻은 손수건이 굳은 손가락 끝에 스쳤다.
***
다음 날 아침, 정밀 아틀리에의 공기는 밤새 내린 서리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지안은 이른 아침부터 거실로 나와 무접촉 생활 수칙을 철저하게 이행하려 애썼다. 1.5미터의 격리 거리. 그녀는 도진이 깨어나기 전에 식탁 위에 그가 마실 따뜻한 녹차를 올려두고, 자신은 거실 가장 먼 곳의 소파 끝에 자리를 잡았다.
머릿속이 밤새 몰아친 폭풍으로 번잡했다.
‘내가 정말 도진이를 죽이고 있는 걸까?’ ‘나를 구원하겠다는 저 다정한 손길이, 결국 저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독약에 불과한 걸까?’ ‘우리는 왜 평범하게 온기를 나눌 수 없는 걸까?’
점층적으로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가슴을 짓눌렀다. 지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귓가에서 이명과 함께 불쾌한 소음이 일기 시작했다.
지안의 가문에 내린 공감각적 낙인의 전조였다. 멀리 도심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다쳤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감돌았고 뼈가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환청이 되어 고막을 찔렀다.
"아윽……."
지안은 신음을 삼키며 찬장으로 향했다. 진정제를 찾기 위해 손을 떨며 찬장 깊숙한 곳을 뒤적였다.
그때였다. 싱크대 밑바닥과 거실 모퉁이가 맞닿은 어두운 틈새에서, 아주 미세하고 이질적인 마력의 파동이 지안의 감각 영역에 걸려들었다. 공감각적 저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그녀의 오감이 그 이질감을 놓칠 리 없었다.
지안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뻗었다. 싱크대 하단 가림막 뒤편, 어둠 속에 숨겨진 작은 기계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검은색 실린더 형태였다. 그 표면에는 연화 제약의 상징인 연꽃 문양이 아주 미세하게 음각되어 있었고, 내부에서는 붉은빛의 액체 반응물질이 기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불법 도청 및 감시장치였다.
지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채승현의 짓이 분명했다. 이 정교한 아틀리에의 미세 차단 결계를 뚫고 이런 것을 심어둘 수 있는 자는 가문 내에서도 극소수뿐이었다.
"이걸로 우리를 보고 있었던 건가, 채승현……."
지안이 그것을 떼어내려 손가락을 뻗은 순간, 아틀리에의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딩동―.
고요한 아틀리에에 울려 퍼진 마찰음에 지안은 깜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현관문 너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달 공무원입니다. 채지안 씨 앞으로 온 연화 제약 가문 특별 서류가 있어 본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연화 제약의 서류라는 말에 지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채승현이 벌써 또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것일까. 지안은 경계심을 가득 품은 채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연화 제약의 로고가 새겨진 단정한 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지안을 보더니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 패드를 내밀었다.
"여기에 지장 서명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내민 패드를 향해 지안이 손가락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그 손 치워."
등 뒤에서 낮고 서늘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언제 나왔는지 도진이 지안의 뒤편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 지안을 바라볼 때의 하염없이 다정하고 따스하던 기색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도진은 지안의 어깨를 가볍게 뒤로 밀어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탄탄한 등판이 지안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서도진 씨? 비켜주세요, 본인 확인이……."
배달원이 당황하며 말을 흐렸지만, 도진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남자를 압도했다. 그의 큰 키와 넓은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좁은 현관 통로를 가득 메웠다.
"누구 마음대로 지안이 몸에 손을 대려고 해."
도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독점욕과 분노는 무거웠다. 그의 시선은 배달원의 손끝과 지안의 거리를 매섭게 잰 뒤,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꿰뚫어 볼 듯이 노려보았다.
"연화 제약 소속 배달 공무원은 오늘 비번일 텐데. 채승현이 보낸 프락치인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 그냥 배달을……."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도진은 비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거침없이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평소 지안 앞에서는 장갑조차 함부로 벗지 않던 그 부드러운 손이, 지금은 사냥감을 포획한 맹수의 앞발처럼 단단하고 잔인하게 남자의 목덜미를 조여갔다.
"돌아가서 전해라."
도진의 입술이 남자의 귀 바로 옆에서 멈췄다. 서늘한 숨결이 남자의 뺨을 스쳤다.
"한 번만 더 내 여자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그땐 네 가문이고 뭐고 내 손으로 다 찢어발겨 놓겠다고. 채승현 그 인간한테 똑똑히 전해."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지안의 곁에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괴물이 깨어난 듯했다. 숨 막히는 질투와 소유욕이 도진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남자는 겁에 질려 태블릿 패드마저 떨어뜨린 채, 도진이 손을 놓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도진은 그 자리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넓은 등이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지안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도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여자…….’
그가 뱉은 거침없는 단어가 가슴속에서 간지럽게 소용돌이쳤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설렘이, 그녀가 세워둔 방어벽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도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지안을 향해 돌아서는 그의 눈빛에는 방금 전의 살벌함은 온데간데없이, 오직 지안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지안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는 반사적으로 지안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가, 이내 어젯밤 그녀가 했던 모진 말들을 떠올린 듯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그의 손가락 끝이 허탈하게 허공을 맴돌다 쓸쓸히 내려앉았다.
그 애틋하고도 고독한 거리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안은 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무모하게 굴지 마."
그녀는 애써 차가운 톤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발걸음을 돌려 거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따랐다.
그때였다.
지안이 거실 중앙,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바로 밑을 지나던 찰나였다.
찌르릉―!
날카로운 금속 파열음이 아틀리에의 정적을 깨뜨렸다. 천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야 할 거대한 크리스털 조명이, 기이한 마력의 스파크와 함께 고정쇠가 끊어지며 지안의 정수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지안아!"
도진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지안이 미처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전에, 눈앞이 온통 하얗게 번쩍였다.
쾅―!
무자비한 파괴음과 함께 크리스털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서, 도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려 지안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바닥으로 굴렀다.
두 사람의 신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동시에 지안의 귓가를 괴롭히던 모든 불쾌한 환청과 비린내가, 도진의 가슴팍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하고 진한 아카시아 꽃향기와 함께 한순간에 소멸했다.
그러나 그 기적 같은 안도감도 잠시, 지안은 자신의 품에 안긴 도진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굳어지며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윽…… 하아……."
도진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심장 부근이 붉게 타들어 가듯 요동치고 있었다. 접촉 제한 규칙이 깨진 대가였다.
지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도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창백해진 얼굴 위로, 천장에서 떨어진 크리스털 파편에 긁힌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윽…… 하아……."
도진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안은 심장이 발끝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온몸을 떨었다. 그의 목덜미에 닿은 손가락 끝으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맥박 치는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놔, 도진아. 제발 놔 줘……!"
지안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도진은 오히려 그녀를 품에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온기는 한겨울 눈밭 속에 홀로 피어난 동백꽃처럼 위태롭고도 붉었다.
"싫어……."
갈라진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진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잠시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네가 아프지 않은 이 짧은 순간이, 나한테는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니까."
어째서 이 사람은 매번 자신을 갉아먹으며 나를 살리려 하는 걸까? 내 고통이 그에게는 제 목숨을 던질 만큼 가치 있는 일인 걸까? 도대체 우리는 왜, 서로를 안아줄 때마다 죽음에 가까워져야만 하는 걸까?
점층적인 의문이 지안의 목구멍을 옥죄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도진의 가슴팍에서 풍겨오는 아카시아 향기는 지독하도록 달콤해서, 오히려 잔인한 독약처럼 느껴졌다.
지안은 이를 악물고 도진의 품에서 강제로 몸을 빼냈다. 스킨십이 끊어지는 순간, 거실을 가득 채웠던 따스한 온기와 꽃향기가 거짓말처럼 흩어지고 버석거리는 겨울의 냉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아, 윽……!"
도진은 중심을 잃고 거실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손이 제 가슴팍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가슴속에서 가시 돋친 불길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반사 통증에, 도진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잘게 떨렸다.
지안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움켜쥔 주먹을 등 뒤로 감추며 뒤로 물러섰다. 닿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수명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내릴 뿐이었다.
그때, 지안의 시선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난 크리스털 조명 더미에 닿았다.
화려한 파편들 사이로 기이한 무언가가 보였다.
고정 고리가 부러진 단면이 매끄럽지 않았다. 인위적인 부식 촉진제, 연화 제약에서 특수 제작한 산성 약물의 푸르스름한 흔적이 금속 고리에 묻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지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싱크대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소형 마력 장치의 붉은 반응물질이, 조명이 떨어진 순간과 정확히 일치하여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설치된 홈 네트워크 시스템의 대형 모니터가 지익,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켜졌다.
어두운 화면 위로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디지털 숫자가 어지럽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실험체 2호, 접촉 감지.] [공감각 고통 치환율: 98%.] [반사 통증 피드백 개시―심박수 임계치 도달.]
기계적인 시스템 음성이 정밀 아틀리에의 사방을 울렸다. 지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채승현은 단순히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안전해야 할 아틀리에 자체를, 두 사람의 접촉 반응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분석하는 거대한 실험실로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도진아…… 일어나야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지안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도진을 부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던 그때였다.
철컥.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어야 할 아틀리에의 이중 보안 현관문이,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스스로 잠금을 해제하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너머에서, 가죽 구두가 바닥을 디디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