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허리가 단단하게 감겨오는 감각은 지독하리만치 뜨거웠다.

경계선 앞에서 발이 걸려 쓰러진 찰나, 가죽 장갑이 벗겨진 서도진의 맨손이 채지안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쳐 안았다. 쿵, 하는 묵직한 소음이 거실 바닥을 울림과 동시에, 사방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기적 같은 구원의 향기였다. 하지만 그 향기는 이내 지안의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탄내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하윽!"

도진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짧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안은 밀착된 그의 가슴팍에서 전해오는 기괴한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지안의 공감각적 저주는 타인의 통증을 물리적인 감각으로 번역해 낸다. 지금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날카로운 불꽃이 마른 나뭇가지를 태우며 타닥타닥 뼈를 갉아먹는 듯한 섬뜩한 마찰음이었다. 그의 심장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그녀를 만진 대가였다.

"이거 놓아, 도진아! 얼른!"

지안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도진은 고통으로 미간을 붉게 찌푸리면서도, 지안을 붙잡은 손귀에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바닥에 부딪혀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더 깊숙이 품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자, 달콤하면서도 쓸쓸한 아카시아 향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 왔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 지안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 심장이 지금 어떤지 내가 다 듣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지안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도진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마와 콧날을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턱끝에서 툭 떨어져 지안의 얇은 셔츠 깃을 적셨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반사 통증. 가문의 잔혹한 등가교환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진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지안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밀어내지 못했을까? 왜 또 상처를 주면서도 이 온기에 매달리려 했을까?'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이 점층적인 질문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안은 억세게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마침내 결속이 풀리자, 도진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본능적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얇은 니트 너머로 갈비뼈가 들썩일 정도로 거친 호흡이 이어졌다.

"수칙을 어겼어."

지안이 뒷걸음질 치며 차가운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바닥에 그어진 황동색 경계선은 이미 두 사람의 엉킨 몸짓 아래에서 무의미하게 가로놓여 있었다. 무접촉 생활 수칙 제1조. 지안의 발작이 심장의 한계치에 달했을 때에만 접촉을 허용한다. 하지만 지금 지안은 발작 상태가 아니었다. 단순한 부주의로 넘어진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도진은 장갑조차 끼지 않은 맨살로 그녀를 안았다.

"수칙 같은 게 무슨 상관이야."

도진이 고개를 들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고통을 참느라 눈가에 붉은 핏줄이 서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지안을 향해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다치는 것보다 그 수칙이 더 중요할 리 없잖아."

"하, 참 쉽네. 서도진, 넌 네 몸이 부서지는 것보다 내 손가락 끝에 든 멍 하나가 더 아깝다는 거지? 그거 아주 오만하고 멍청한 영웅 심리야. 난 네 그 대책 없는 친절이 끔찍하게 싫어."

지안은 모진 독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소매 끝을 세게 쥐어뜯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아픔보다, 제 눈앞에서 쓰러져 가는 소꿉친구를 보는 고통이 훨씬 더 컸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차가운 벽을 세워 그를 멀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지안의 스마트폰이 신경질적인 진동을 울렸다.

징, 징.

고요한 아틀리에의 공기를 깨트리는 소음에 지안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뜬 것은 가문의 동태를 감시하며 그녀에게 은밀히 정보를 제공하는 개인 비서의 연락이었다. 지안은 서둘러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채지안 씨, 지금 당장 아틀리에 안에서 꼼짝 말고 대기하셔야 합니다. 채승현 전무가 보낸 감시자들이 빌딩 주변을 완전히 에워쌌습니다. 아까 저녁부터 검은색 차량 세 대가 사각지대를 교대로 지키고 있어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 쇠붙이가 강하게 부딪히는 듯한 찌릿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감시자라고요? 벌써 여기까지 찾아낸 건가요?"

- 예, 아틀리에의 차단 결계를 무력화할 틈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절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물리적인 마찰이 생기면 서도진 씨의 존재도 가문에 완전히 노출될 겁니다.

통화가 끊기고, 지안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채승현. 가문의 실권자이자 자신을 그저 고통 데이터의 표본으로만 취급하는 냉혹한 사촌 오빠. 그가 마침내 이곳까지 마수를 뻗쳐온 것이다. 지안의 특이체질을 해부해 통증 무력화 백신을 만들겠다는 그의 집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문의 수뇌부들이 개입하는 순간, 도진의 목숨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얇은 평화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날 터였다.

극도의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자, 지안의 공감각 저주가 다시 기지개를 켰다.

귓가에서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커졌고, 아틀리에 구석진 곳의 공기가 끈적하고 붉은 피비린내로 변하는 환각이 보였다. 관자놀이를 강하게 짓누르는 고통에 지안은 신음을 삼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안아,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도진이 여전히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어린 걱정은 지안의 숨을 더욱 가쁘게 만들었다.

"오지 마! 들어오지 마, 도진아. 채승현의 사람들이 밖에 있어. 우리가 접촉하는 걸 보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지안은 벽 쪽으로 물러서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제발 그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기를, 그래서 더는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한 비명이었다.

하지만 도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실 중앙의 투명한 유리 벽의 틈새를 지나, 1.5미터라는 금기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도진이 성큼 다가와 지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체온과 아카시아 향기가 그녀의 코끝에 닿았다.

"난 상관있어! 네가 나 때문에 죽어가는 걸 보라고? 난 못 해! 난 괴물이야, 도진아. 내 곁에 있으면 넌 결국…!"

지안이 흐느끼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도진이 그녀의 차가운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순간, 지안의 손가락 끝에 닿는 뜨거운 온기와 함께 깊고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날렸다. 도진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제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유리그릇을 다루듯 지안의 손가락 끝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쪽,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지안의 머리를 짓누르던 극심한 두통이 거짓말처럼 씻겨 내려갔다.

시야를 가리던 붉은 환각이 순식간에 투명하게 걷히고, 포근한 온기가 온몸의 신경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완벽한 치유였다. 도진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원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도진의 어깨가 눈에 띄게 크게 떨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불타는 유황처럼 뜨거웠고, 그의 심장 소리는 마치 찢어지는 북소리처럼 지안의 공감각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의 가슴 안쪽에서 뼈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한층 더 거세게 몰아치고 있음이 전해졌다.

"도진아, 제발… 그만해…."

지안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힘을 주었지만, 도진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을 더 단단히 움켜쥐며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밀어내지 마, 지안아."

"……."

"네가 나를 괴물이라 부르든, 네가 가진 저주가 얼마나 가혹하든 난 절대 도망치지 않아. 채승현이든 가문의 규칙이든, 그 어떤 것도 내게서 널 빼앗아 갈 수 없어."

그는 고통에 젖은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지안의 뺨에 고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닿는 곳마다 아카시아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낄 때, 내가 네 안전장치가 되어 줄게. 그러니까 나를 밀어내려고 애쓰지 마. 네 아픔을 가져가는 게 내 존재 이유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지안만을 향한 맹목적이고도 거대한 헌신만이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그 압도적인 사랑 앞에서 지안은 더 이상 모진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방어기제가 그의 뜨거운 온기에 녹아내려 툭,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애틋하고도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는 지안의 개인 휴대폰에서 울리는 기괴한 벨 소리였다.

화면에는 이름 없는 발신 제한 번호가 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지안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 좋은 밤이군, 지안아. 아틀리에에서의 소꿉장난은 즐거운가?

채승현이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얼음 송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지안은 도진의 손을 쥔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죠?"

- 네 옆에 있는 그 기특한 사냥개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임상 데이터를 얻어서 말이지. 한세아가 개발 중인 해독제의 기초 공식을 훔쳐봤는데,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어.

채승현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 남자가 네 고통을 흡수할 때마다 심장 세포가 괴사하는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더군. 지안아, 네가 그 남자의 온기에 취해 계속해서 그를 착취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잔인한 확신에 지안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

- 앞으로 채 반년도 안 돼서, 서도진의 수명은 반토막이 날 거다. 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평범한 사랑이, 결국 그 남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독약이 된다는 뜻이지. 선택해라. 그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네 만족을 위해 서서히 말려 죽일 것인지.

뚝.

무자비한 경고만을 남긴 채 전화가 끊겼다. 아틀리에 안에는 오직 도진의 거친 호흡 소리와, 사정없이 흔들리는 지안의 가쁜 눈동자만이 남아 서로를 마주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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