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미세한 진동이자, 코끝을 찌르는 칼칼한 탄내였으며, 귓가를 짓누르는 무거운 침묵의 압박이었다. 정전과 동시에 찾아온 공감각의 과부하가 지안의 숨통을 조여 왔다. 꺼진 전등 대신 허공을 가르는 파란색 미세 불빛이 그녀의 망막을 찌르르하게 마비시켰다. 숨이 막혔다. 허파 가득 차가운 시멘트 가루를 들이켠 것처럼 가슴이 턱 막혀 비틀거리는 그 찰나였다.
털실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온기가 지안의 뺨을 감싸 안았다.
도진이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든 것이었다. 그의 손바닥이 피부에 닿는 순간, 머릿속을 헤집던 기분 나쁜 기계음과 탄내가 한순간에 증발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카시아 꽃밭의 달콤하고 따스한 향기였다. 지안의 거칠던 숨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멎었다.
"지안아, 나를 봐."
어둠 속에서도 도진의 눈동자는 봄날의 젖은 흙처럼 깊고 단단하게 빛났다. 그의 손길은 너무나 다정해서 도리어 위험했고, 뺨에 닿은 온기는 당장이라도 온몸을 녹여 버릴 듯이 매혹적이었다. 지안은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주인을 찾아 안착한 나비처럼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
"여기서 나와 같이 지내자. 네가 저 비정한 가문으로부터 완전히 숨을 수 있을 때까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하지만 지안은 그의 손바닥 너머로 미세하게 전해지는 떨림을 느꼈다. 지안을 치유하는 대가로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을 가혹한 반사 통증. 도진은 고통을 숨기려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그의 턱 끝에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지안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안 돼……. 너 이러다 정말 죽어. 내 저주가 너를 갉아먹는단 말이야."
지안이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도진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아 두었다.
"상관없어. 네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 심장이 타들어 가든 수명이 줄어들든 아무래도 좋아.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 지안아. 이건 내 이기적인 제안이야."
그의 눈빛에 담긴 맹목적인 헌신이 지안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 남자는 왜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지려는 걸까. 지안은 소매 끝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었다. 거부하고 밀어내야 마땅한 제안이었지만,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아카시아 향기가 너무나도 달콤해서, 그리고 홀로 어둠 속에 남겨지는 것이 사무치게 두려워서, 그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정밀 아틀리에의 아침은 지극히 고요하고도 차가운 질서 속에서 시작되었다.
도심 한복판의 삼엄한 빌딩 숲 사이에 숨겨진 이 펜트하우스는, 오직 두 사람의 안전한 생존만을 위해 정교하게 개조된 기묘한 밀실이었다. 밤새 복구된 아틀리에의 조명 아래로 공간의 기하학적인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실을 동서로 정밀하게 양분하는 투명한 유리 벽이었다. 강화유리로 제작된 그 벽은 서로의 숨소리조차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을 것처럼 두꺼웠다. 바닥에는 짙은 황동색 금속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절대 넘어서는 안 될 경계선이었다.
"이게 우리가 이곳에서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야."
지안은 식탁 위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도진을 지키기 위해 겹겹이 두른 얼음 성벽의 온도가 묻어났다. 종이 위에는 밤새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작성한 '무접촉 생활 수칙 3계명'이 정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첫째, 지안의 공감각 발작이 심장의 한계치에 달해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만 도진의 맨살 접촉을 허용한다. 둘째, 일상적인 대화와 생활 속에서는 최소 1.5미터의 거리를 유지하며, 모든 물품은 거실 중앙의 회전식 중간 테이블을 통해서만 간접 전달한다. 셋째, 서로의 눈빛이나 감정의 동요로 인해 통제력을 잃을 조짐이 보일 경우, 즉각 각자의 격리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다.
도진은 유리 벽 너머에서 그 수칙을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가죽 장갑이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채운 족쇄처럼.
"마음에 들어. 아주 철저하네."
도진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리 벽에 설치된 스피커를 타고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안아, 네 몸 상태가 나빠지면 이 규칙들은 전부 무시할 거야. 내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너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 규칙을 어기는 순간, 난 당장 여기서 나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지안은 일부러 차갑게 쏘아붙이며 시선을 돌렸다. 도진의 올곧은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감정의 둑이 단숨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진이 자신 때문에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자신을 위해 희생할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죄책감이라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아틀리에의 현관문 인터폰이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도진이 조작 패널을 누르자,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의사 가운을 대충 걸친 한세아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소파 위로 툭 던지며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진짜 이 미련한 인간들아. 기어이 이 미친 짓을 시작했구나?"
세아는 오자마자 지안의 팔을 붙잡고 맥박을 짚었다. 그리고는 도진의 안색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혀를 쯧 차며 이마를 짚었다.
"채지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서도진 저 바보가 네 고통을 대신 가져가 주니까 마음이 좀 편해? 아주 살판났지?"
"세아 언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워. 내가 저번에 경고했잖아."
세아는 주사기를 꺼내 들며 도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진은 군말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고, 세아는 그의 팔에 거칠게 바늘을 찔러 넣었다. 붉은 혈액이 튜브를 타고 빠르게 주입되는 모습을 보며 세아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찌푸려졌다.
"너희가 맺은 그 공감각 치유 계약 말이야. 겉보기에는 아주 눈물겨운 상호 구원 같아 보이지? 천만에. 이건 철저하게 한쪽의 생명력을 쥐어짜서 연명하는 기생 계약이야."
세아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아틀리에 안을 울렸다. 그녀는 주사기를 정리하며 지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진이가 너한테 닿을 때마다, 너한테서 흘러나오는 온기가 어디서 오는 건 줄 알아? 저 녀석의 심장 근육을 이루는 세포들이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면서 내뿜는 열기야. 감정이 깊어져서 접촉 빈도가 늘어나면? 저 바보의 수명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지금 상태로 가다간 몇 년도 못 버티고 심장마비로 급사할 거라고."
지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도진이 아픔을 참고 자신을 향해 지어 보였던 그 수많은 미소의 이면에 이토록 잔인한 공식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반사 통증뿐만 아니라, 수명 자체가 단축되고 있었다니.
"도진아…… 정말이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지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눈물이 가득 고인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도진은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세아를 제지하려 했다.
"한세아, 그만해. 지안이가 들을 필요 없는 이야기야."
"왜 들을 필요가 없어? 알아야 조심할 거 아냐!"
세아는 서류 봉투에서 임상 차트 한 장을 꺼내 중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이건 가문 몰래 내가 계속 분석하고 있는 데이터야. 아직은 가설 단계지만…… 이 계약에는 이면의 가혹한 생명력 흡수 공식이 존재해.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이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부작용의 가능성도 엿보이지. 만약 지안이 네가 스스로의 저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도진이의 생명력을 일방적으로 빼앗는 게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영원히 무력화하는 상생의 길을 찾을 수도 있어."
세아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안에게 보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무조건 접촉 금지야. 선을 넘는 순간, 너희 둘 다 파멸이라는 걸 명심해."
세아가 경고의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아틀리에를 빠져나가자, 공간에는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만이 서글프게 들려올 뿐이었다.
* * *
세아가 떠난 후, 지안은 거실 한구석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부채감과 슬픔이 소용돌이쳤다. 도진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얻어내는 안온함이라니. 차라리 자신이 가문의 실험실로 끌려가 해부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도진만은 평범하고 온전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지안아."
어느새 도진이 다가와 중간 테이블 너머에 서 있었다. 정확히 황동색 경계선에서 1.5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머그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향긋한 캐모마일 티의 연기가 공기 중으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도진은 찻잔 하나를 회전식 중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돌려 지안의 방향으로 보냈다.
"너무 세아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도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마치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홀로 피어난 동백꽃처럼, 그의 눈빛은 얼어붙은 지안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지안은 테이블 위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따스한 온기가 찻잔을 타고 전해져 왔지만, 그것을 잡으려 뻗으려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진의 다정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 순간, 지안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주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다. 도진의 헌신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깊은 애정.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웅웅거렸다.
'안 돼, 흔들리면 안 돼. 그를 살리려면 내가 더 차가워져야 해.'
지안은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냉소를 지어 보였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참 단순하네, 서도진. 네 그 영웅 심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숨 막히는지 알아? 난 네 동정표 따위 필요 없어."
잔인한 독설을 내뱉었지만, 정작 지안의 소매 속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진은 그녀의 가시 돋친 말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그저 깊고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침묵과 시선이 지안의 방어기제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지안아, 그게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알아."
"아니, 진심이야. 그러니까 더는 나한테 신경 쓰지 마!"
지안은 도진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급히 몸을 돌려 제 방으로 걸어가려 했다. 마음이 너무 조급했던 탓일까. 그녀의 발끝이 거실 카펫의 모퉁이에 툭 걸리고 말았다.
"어……!"
중심을 잃은 지안의 몸이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기울어졌다.
"지안아!"
유리 벽의 빈틈, 황동색 경계선 너머에서 도진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수칙도, 1.5미터의 거리도, 가죽 장갑을 껴야 한다는 이성조차도 그의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린 듯했다.
도진이 몸을 던져 쓰러지는 지안의 허리를 낚아채듯 받아안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거실 바닥 위로 거칠게 엉켰다. 그리고 찰나의 정적이 찾아왔다.
지안은 허리에 닿은 단단하고 뜨거운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도진의 가죽 장갑은 이미 바닥 저편으로 날아가 있었고, 그의 맨손가락이 지안의 얇은 셔츠 너머 살결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동시에 폭발적인 아카시아 향기가 두 사람의 호흡 사이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의 향기가 아니었다. 도진의 얼굴이 고통으로 거칠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가슴 안쪽에서 뼈가 타들어 가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이 지안의 공감각을 타고 환청처럼 들려왔다.
"도, 도진아……!"
지안이 경악하며 밀어내려 했지만, 도진은 밀려오는 극심한 가슴 통증에 신음하면서도 지안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풀려버린 금기의 수칙 속에서, 두 사람의 가쁜 숨결이 엉망으로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