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빗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뒤쫓아오는 구두굽 소리,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넘어져 무릎을 찧었을 때 발생한 미세한 둔탁음마저 지안의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해머로 두개골을 내리치는 듯한 굉음으로 번역되어 휘몰아쳤다.

허공을 가르는 비명 소리가 들린 적이 없는데도, 지안의 귀에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타인의 통증이 그녀의 감각계로 고스란히 흘러들어와 뼈를 으스러뜨리고 살을 찢는 환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린 맛은 흘린 적 없는 피의 맛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가누지 못한 채 젖은 시멘트 벽을 짚자, 손끝을 타고 들어오는 거친 질감이 꼭 손톱 밑을 파고드는 가시처럼 아팠다.

“저기 있다! 놓치지 마!”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손전등 불빛들이 지안의 시야를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채승현의 수하들이었다. 사촌의 얼굴을 한 포식자가 보낸 사냥개들이 좁혀오는 포위망 속에서, 지안은 막다른 골목 끝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는 순간, 차가운 빗물이 온몸을 적셨다. 온 몸의 감각이 과부하로 찢겨 나가기 직전이었다.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공감각적 고통에 지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차가운 바닥에서 감각의 감옥에 갇혀 죽어가는 걸까. 내 삶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받아내는 일회용 그릇에 불과했던 걸까.

그때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발소리가 일순간 뚝 끊겼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가 지안의 위로 드리워졌다. 굳게 닫힌 막다른 골목의 공기를 가르며, 익숙하고도 낯선 온기가 서서히 다가왔다.

“지안아.”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고막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지안이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빗물에 젖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도진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지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죽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진 그의 맨손이, 지안의 차갑게 얼어붙은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날카로운 이명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입안을 맴돌던 비린 피비린내가 깨끗이 씻겨 내려가고, 그 자리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맑은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 차올랐다.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기던 타인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봄날의 햇살처럼 온화하고 포근한 온기였다. 차가운 빗속에서 오직 도진의 손이 닿은 곳으로부터 시작된 온기가 지안의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허억, 하고 지안은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위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은 극적인 해방감이었다. 오감이 제자리를 찾으며 온전한 평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 잠겨 있다가 단숨에 따스한 온천수로 건져 올려진 듯한 감각이었다.

“도, 진아…….”

지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밀쳐내려 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이 본능적으로 작동했다. 그에게 의지하는 순간, 다시 찾아올 상실과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문의 규칙이 떠올랐다. 타인을 치유하는 대가로 그가 짊어져야 할 무게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손 끝바닥을 등 뒤로 감추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오지 마. 만지지 마, 제발…….”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밀어내려는 지안의 가녀린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움켜잡고, 그녀를 자신의 넓은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윽……!”

도진의 입술 틈새로 아주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안의 눈에 도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담겼다. 그의 심장 부근 옷자락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안의 공감각적 고통을 아카시아 향기로 치환해 흡수하는 순간, 그의 심장에는 가시 돋친 덩굴이 파고드는 듯한 반사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는 왜 또다시 제 목숨을 깎아 먹으며 내게 손을 내미는 걸까. 왜 매번 바보처럼 자신을 내던지는 걸까. 내가 뭐라고, 대체 왜.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가슴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지안은 그의 품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도진의 가슴에 뺨을 기댄 채,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전한 안도감에 취해 눈물을 삼켰다. 도진의 심장박동이 젖은 셔츠를 넘어 지안의 뺨으로 전해졌다. 빠르고, 불규칙하며, 고통으로 헐떡이는 맥박이었다.

“바보 같아…….”

지안이 소매 끝을 세게 쥐어뜯으며 읊조렸다.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원망과 애틋함이 뒤섞여 있었다.

“너 이러다 정말 죽어. 내가 어떤 저주를 품고 사는지 알잖아. 왜 자꾸 선을 넘어?”

도진은 대답 대신 지안의 등을 더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비에 젖어 차가웠지만, 지안의 가슴에 닿는 그의 온기만큼은 한여름의 밤공기보다 뜨거웠다. 도진이 고개를 숙여 지안의 귀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아카시아 향기가 더욱 짙게 번졌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그 빌어먹을 공감각 저주.”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지안의 귓가에 명확하게 내리꽂혔다.

“타인의 아픔을 네 몸으로 번역해 느끼는 그 잔혹한 낙인. 네가 평생을 도망쳐 온 그 지옥에서, 너를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나야, 지안아.”

그가 천천히 지안을 품에서 떼어내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내 피부가 네게 닿으면 그 고통은 아카시아 향기가 되어 사라져. 하지만 그 대가로 내 심장은 타들어 가지. 네 감정이 깊어질수록 내 수명이 단축되는 치유 계약의 규칙…… 다 알고 있어.”

“알면서 왜 이래! 당장 손 놓아!”

지안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도진의 손아귀는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도진의 눈빛에 서린 애절함과 고집스러움이 지안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놓지 않아. 절대로.”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네가 온전한 온기를 나누며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내 생명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어. 3년 동안 널 찾아 헤맸어, 채지안.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아.”

두 사람 사이로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두 사람의 경계를 메우며 흘러내렸다. 지안은 그의 헌신이 고마우면서도, 자신 때문에 그가 서서히 소멸해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그의 끈질긴 구원이 도리어 잔인한 독약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다시금 추격자들의 다급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불빛들이 어두운 골목 벽을 가로지르며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안의 가쁜 숨이 마침내 안정을 찾으며 잦아들자, 도진이 천천히 손을 올려 그녀의 젖은 뺨을 다시금 감싸 쥐었다. 차가운 빗물 사이로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지안의 살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입가에 매혹적이면서도 위태로운 미소가 아주 옅게 걸렸다.

“방법이 있어. 우리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

도진의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무접촉 생활 수칙을 지키는 거야. 내 아틀리에로 가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지키되, 선은 넘지 않는 동거를 시작하는 거지.”

그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하고, 동시에 지독하게 위험했다. 지안은 그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우리는 서로의 생명을 갉아먹지 않고 이 잔혹한 규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도진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지안은 다시 찾아올 차가운 고독과 고통의 공포를 느끼며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의 제안은 달콤한 독약 같았다. 지안은 도진의 젖은 속눈썹 너머로 일렁이는 단단한 의지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숨을 쉬어도 되는 걸까? 내 이기심이 이 다정한 심장을 기어이 멈추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만약 우리가 그 선을 넘어서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서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비극 앞에 마주 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수많은 물음표가 가슴을 짓눌렀지만, 골목 초입을 비추는 날카로운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선택을 재촉했다.

"시간이 없어, 지안아."

도진이 그녀를 가볍게 부축해 일으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단단한 팔이 몸에 닿는 순간, 다시 한번 미세한 온기가 전류처럼 흘러들었다. 지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구원에 대한 묵시적인 동의였다.

도진은 지안을 품에 안듯 감싸고 빗속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다. 추격자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멀어져 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도심 한가운데,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완벽히 숨겨진 펜트하우스였다. '정밀 아틀리에'라 불리는 그곳의 문이 열리자, 은은한 편백나무 향과 함께 아늑한 온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하지만 내부의 풍경은 지안이 상상했던 따스한 보금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실 중앙을 완벽하게 양분하고 있는 것은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 벽이었다.

"여기서는 안전할 거야."

도진이 먼저 유리 벽 너머의 공간으로 걸어가 젖은 코트를 벗어두며 말했다. 그가 서 있는 곳과 지안이 서 있는 곳 사이에는 바닥에 선명하게 그어진 붉은색 경계선이 존재했다. 정확히 1.5미터의 거리. 서로의 손을 뻗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잔인하고도 안전한 거리였다.

"이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첫 번째 규칙이야."

도진이 가죽 장갑을 다시 손에 끼우며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목소리는 유리 벽에 장착된 인터콤 스피커를 통해 지안의 귀에 건조하게 전달되었다. 공기를 타고 직접 전해지던 그의 따스한 숨결이 차단되자, 지안은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메마른 겨울 정원에 가만히 내려앉은 낙엽처럼, 쓸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발작이 일어나 너의 감각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코 서로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아. 소품이나 물건을 건넬 때도 저기 중간 테이블을 이용하고."

도진의 시선이 거실 중앙에 놓인 길쭉한 아일랜드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은 정확히 유리 벽의 틈새를 관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안은 멍하니 그 식탁을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결코 온기를 나눌 수 없는 기묘한 동거. 얼어붙은 나뭇가지 끝에서 위태롭게 겨울을 버텨내는 봄날의 꽃봉오리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도 아슬아슬했다. 이 잔혹한 규칙 속에서 우리는 정말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서로의 소멸을 늦추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뿐일까?

그녀의 마음속 방어기제가 다시금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 도진의 헌신이 깊어질수록, 그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도 가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안아, 방에 들어가서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 감기 걸리겠어."

도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지안을 다그쳤다. 하지만 지안은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도진의 안색이 숨길 수 없을 만큼 창백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마에는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액체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가죽 장갑을 낀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방금 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치유의 대가'가 그의 심장을 시퍼렇게 멍들게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유리 벽 쪽으로 한 걸음 내딛으려 했다.

"도진아, 너 괜찮은 거야? 설마 아까 나 때문에……."

"괜찮아. 걱정하지 마."

도진이 급히 말을 가로막으며 벽 뒤로 사선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며 지안을 피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도진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가 숨을 들이쉬는 기색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지안은 그의 떨리는 손이 주머니 속으로 다급히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였다.

지이잉-, 하고 기분 나쁜 진동음이 아틀리에의 침묵을 깨뜨렸다. 거실 벽면에 설치된 소형 보안 모니터의 화면이 붉은빛으로 거칠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틀리에 외부의 미세 차단 결계에 무언가 이질적인 충격이 가해졌음을 알리는 경고였다.

동시에, 지안의 시선이 거실 모퉁이의 어두운 가구 틈새로 향했다.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파란색 미세 불빛이 기분 나쁘게 점멸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 비밀스러운 공간 전체를 실시간으로 훔쳐보고 있다는 듯한, 소름 끼치는 이질감이었다.

"도진아, 저거……."

지안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모퉁이를 가리키는 순간, 거실의 전등이 일제히 파르르 떨리며 꺼져 버렸다. 암전된 어둠 속에서 오직 그 파란 불빛만이 두 사람의 경계를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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