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의 미세 차단 결계가 영원할 줄 알았나 보군.”
수입 세단의 뒷좌석 유리창이 아주 느리게 내려갔다. 반쯤 열린 틈새 사이로 채승현의 서늘한 안경테가 빗물에 젖은 가로등 빛을 반사했다. 그의 손가락 끝은 여전히 태블릿 PC의 매끄러운 화면 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아무리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가 숨어도, 결국 그 상자는 내가 짜놓은 미로의 안쪽에 불과해. 지안아.”
승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인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마저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웠다. 도진은 지안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젖은 옷가지 사이로 전해지는 지안의 체온은 이미 얼음장처럼 식어 가고 있었다. 계약의 반사 작용이 그녀의 심장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음이 도진의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자, 지안아.”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승현을 향해 단 한순간의 시선도 낭비하지 않은 채, 지안을 안아 올리듯 부축하며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승현이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빗물이 눈앞을 가리고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절박함 속에서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오직 서로만을 격리하기 위해 지어진 도심의 외딴 성, 정밀 아틀리에였다.
지문 인식기에 도진의 떨리는 손가락이 닿자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차단된 고요한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은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 평소라면 차분한 라벤더 향이 감돌던 공간이었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이질적인 마력의 잔재가 피부를 찔러왔다. 지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실 한구석, 하얀 벽면과 천장이 만나는 모퉁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4화에서 그녀가 발견했던, 벽지 안쪽에 미세하게 숨겨져 있던 은색의 불법 수신기. 당시에는 그저 단순한 도청 장치인 줄로만 알고 경계했던 그것이, 지금은 핏빛처럼 붉은 광륜을 뿜어내며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승현이 아틀리에의 결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심어둔 비장의 쐐기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도진아, 저거.”
지안의 목소리가 잘게 갈라졌다.
그 순간, 벽면의 수신기에서 귀를 찢는 듯한 고주파의 살상 음파가 거실 전체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아악!”
지안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공감각적 낙인의 저주가 그녀의 온 신경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고음이 아니었다. 지안의 뇌리 속에서 그것은 수천 개의 유리 파편이 두개골 안쪽을 사정없이 긁어대고, 뼈마디가 하나하나 역방향으로 꺾이는 듯한 잔혹한 촉각적 고통으로 번역되어 들이닥쳤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비린내가 고였다.
“지안아! 내 손 잡아! 어서!”
도진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지안에게 채 닿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거친 기계음이 울렸다.
쿠구구궁!
거실 중앙을 가로지르며 설치되어 있던 투명한 강화 유리 격벽이 거칠게 하강했다. 무접촉 생활 수칙 3계명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생명력을 갉아먹지 않도록 안전거리 1.5미터를 유지해 주던 그 방어선이 승현의 해킹으로 인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쿵!
바닥에 처박힌 격벽 유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시스템 제어 장치는 빨간 경고등을 깜빡이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도진의 심장 박동이 지안의 고통과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면서, 아틀리에의 생체 인식 시스템이 두 사람의 상태를 '이상 과부하'로 판단해 가둬버리려는 기계적 오류였다. 유리 격벽은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서서히 좁혀지며 압사시킬 듯 거실의 공간을 분할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도진이 주먹으로 유리 격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쾅! 쾅!
둔탁한 타격음이 거실을 울렸다. 그의 손등이 찢어져 붉은 피가 유리에 번졌지만, 시스템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격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살상 음파의 진동이 유리를 매개로 증폭되어 지안의 전신을 짓눌렀다.
지안의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갔다. 사방에서 시커먼 가시덩굴이 돋아나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환각이 그녀의 이성을 잠식했다. 가쁜 숨을 쉴 때마다 가슴속에서 마른 장미 가시가 돋아나 허파를 찌르는 것 같았다.
너는 왜 언제나 나를 위해 부서지려 하는 걸까? 내 안의 어둠이 너를 삼키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도 다정하게 나를 부르는 걸까? 이 손을 잡으면 너의 심장이 또다시 타들어 갈 텐데. 너의 수명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스러질 텐데.
지안은 격벽 너머에서 피를 흘리며 유리창을 두드리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주머니 틈새로, 지난번 그가 몰래 피를 토하고 숨겨두었던 붉게 물든 손수건의 깃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손수건을 보는 순간, 지안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의 빗장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더 이상은 물러서지 않아.’
지안은 이빨을 악물었다. 입술이 터져 흘러내린 붉은 선이 턱끝을 타고 내렸다. 그녀는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부서지는 듯한 공감각적 고통 속에서, 오직 도진의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이정표 삼아 발걸음을 옮겼다.
“지안아, 오지 마! 유리가 깨지면 위험해!”
도진이 소리쳤지만 지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 격벽의 제어 패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벽면의 수신기와 격벽 제어 장치의 틈새. 지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맨손을 그 고주파 전류가 흐르는 틈새로 밀어 넣었다.
지지직!
푸른 불꽃이 튀며 지안의 손가락 끝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낙인의 힘을 역행시켜, 아틀리에를 장악하고 있던 승현의 해킹 마력을 자신의 몸속으로 강제로 빨아들였다. 고통을 오감으로 수용하는 그녀의 저주받은 체질이, 역설적으로 해킹 마력의 가학적인 전류를 흡수하는 도가니가 된 것이다.
“아아아악!”
비명이 아틀리에를 가득 채웠다.
“지안아!!!”
도진의 절규와 동시에, 지안은 온 힘을 다해 제어 장치의 메인 케이블을 뜯어냈다.
파지직! 콰쾅!
거실 모퉁이의 수신기가 불꽃을 일으키며 완전히 폭발했다. 사방을 짓누르던 살상 음파가 거짓말처럼 멈추고,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투명한 격벽 시스템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앉으며 열렸다.
먼지와 연기 속에서 지안의 몸이 무너지듯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녀가 바닥에 닿기 전, 도진이 격벽의 선을 넘어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지안아! 정신 차려, 지안아!”
도진의 목소리가 떨림을 넘어 오열에 가까워졌다.
지안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자신의 손을 뻗었다. 평소라면 서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넘지 않았던 무접촉 수칙 3계명. 1.5미터의 미련한 거리감.
그 모든 수치와 제약을, 지안은 스스로 깨부수었다.
그녀는 타들어 간 자신의 손가락을 도진의 마른 손등 위에 얹고, 그대로 손가락을 얽어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틈 없이 맞물리며 완벽한 결속을 이루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지안의 전신을 찢어발기던 그 가학적인 고통과 전류의 통증이, 도진의 피부가 닿는 촉점을 시작으로 찬란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움은 포근한 온기로 변했고, 이명으로 가득했던 귀에는 잔잔한 봄바람의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입안과 아틀리에의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짙고 감미로운 아카시아 꽃향기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서로의 체온이 융합되며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하나의 궤적으로 포개어졌다.
도진의 심장 깊은 곳에서 가시가 돋아나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반사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의 얼굴에는 고통 대신 안도와 희열의 미소가 번졌다. 지안 역시 도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낙인의 힘을 역으로 가동해 그가 받는 반사 통증의 절반을 자신의 가슴으로 기꺼이 받아안았다.
두 사람의 피부가 하나의 호흡처럼 긴밀하게 얽혔다.
그것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대가를 나누어 짊어지는, 온전한 동등한 가치의 대가 지불이자 진정한 쌍방구원의 에너지가 아틀리에 전체를 정화하듯 쓸고 지나갔다. 거실을 짓누르던 붉은 경고등이 모두 꺼지고, 은은한 아카시아 향기만이 두 사람의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안이 도진의 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살았어.”
그녀가 속삭였다. 도진은 그녀의 뺨에 묻은 먼지와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래. 우리가 해냈어, 지안아.”
하지만 안도의 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짝. 짝. 짝.
어두컴컴한 현관 통로 쪽에서, 느리고 기괴한 박수 소리가 정묵을 깨뜨렸다.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듯 굳어버렸다. 어둠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실루엣.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사내, 강진우였다.
“야, 눈물겨워서 차마 못 봐주겠네. 진짜 삼류 신파극이 따로 없어.”
진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반적인 총기와는 궤를 달리하는, 묵직하고 기괴한 형상의 권총이 들려 있었다. 연화 제약의 극비 연구소에서 개발된, 피격자의 모든 감각 신경을 일시에 마비시키고 심장을 강제 정지시키는 '특수 감각 마취탄'이 장전된 무기였다.
도진은 반사적으로 지안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앞을 가로막았다.
“강진우.”
도진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총의 총구를 들어 올렸다. 검고 깊은 총구는 정확하게 도진의 심장 정중앙을 매섭게 겨냥하고 있었다.
진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도진의 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뱀이 기어가는 듯한 축축하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귓속말을 내뱉었다.
“서도진. 네 그 잘난 심장이 멈추면, 저 기집애는 어떻게 될까? 이번엔 진짜로 해부실 침대 위에서 네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게 될 텐데. 안 그래?”
진우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딸각, 하는 미세한 금속음이 정밀 아틀리에의 고요한 공기를 찢고 두 사람의 귓가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도진은 뒤로 뻗은 자신의 손으로 지안을 제 등 뒤로 완강하게 밀어냈다. 뼈마디가 하얗게 동틀 만큼 강한 힘이었으나, 지안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도진의 허리를 양팔로 단단히 감싸 안으며, 그의 넓은 등에 이마를 지긋이 기댔다.
두 사람의 심장이 닿은 척추를 타고 하나의 박동으로 요동쳤다. 지안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마치 한겨울의 매서운 서리 속에서도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설중매(雪中梅)처럼, 처절하리만치 매혹적인 아카시아 향기가 다시금 뿜어져 나왔다. 가문의 규칙이 그들의 결속을 징벌하듯 심장을 불로 지지는 듯한 반사 통증을 들이부었지만, 지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절규보다 단단했고, 도진을 향한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를 잃은 세상에서 나는 과연 단 하루라도 온전히 숨을 쉴 수 있을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그의 아카시아 향기가 없는 방은 얼마나 시릴까? 왜 우리는 이토록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면서도, 늘 죽음의 벼랑 끝에 서서 서로의 손을 쥐어야만 하는 걸까?’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가슴 시린 질문들이 지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질문의 끝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명징한 의지뿐이었다. 죽더라도 그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가문의 저주받은 낙인을 부여잡고 태어난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내린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 지안아. 내 뒤로 숨어.”
도진이 낮게 신음하며 그녀를 떼어내려 했으나, 지안은 얽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싫어. 이제 네 등 뒤에서 비겁하게 숨만 쉬는 인형 노릇은 끝났어, 도진아.”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강진우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타인의 절망을 자양분 삼아 피어나는 그의 가학적인 희열이 눈동자 속에서 번뜩였다.
“서로 죽고 못 사는 꼴이라니, 정말 눈물겹군. 하지만 그 끈질긴 장난질도 이제 끝이다.”
진우의 검지손가락이 마침내 방아쇠를 끝까지 당겼다.
쉬익―!
화약이 터지는 폭음 대신,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푸른 빛을 띠는 침 형태의 특수 마취탄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도진의 가슴 정중앙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들었다.
그 순간, 지안은 도진의 몸을 강제로 돌려세우며 그의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안아!!!”
도진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아틀리에의 천장을 강타했다.
마취탄은 지안의 어깨 아래쪽, 결코 치명상은 아니지만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혈자리에 정확히 박혔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에 충전되어 있던 연화 제약의 특수 감각 마취 성분이 지안의 혈관 속으로 무자비하게 주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마비가 아니었다. 타인의 고통을 오감으로 느끼는 지안의 공감각적 낙인을 강제로 자극하여, 뇌가 느낄 수 있는 극단의 고통 수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뒤 신경계를 완전히 셧다운시키는 잔혹한 화학 무기였다.
“아…… 윽……!”
지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온몸의 뼈가 차가운 얼음 송곳으로 잘게 부서지는 듯한 환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피부 위로 하얀 서리가 내리는 듯한 극심한 오한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지안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쥐어짜며, 도진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제 안에 휘몰아치는 그 끔찍한 감각 마비의 고통을 도진에게로 역행시켜 흘려보냈다.
“……아아!!”
도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안이 겪는 마비의 고통이 치유 계약의 통로를 타고 도진의 전신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진을 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안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어 뇌가 파괴될 정도의 고통을, 도진이 제 생명력을 나누어 지탱하며 희석하는 ‘상생의 역전 계약’이 작동한 것이다.
두 사람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 도가니처럼 얽혀 격렬하게 진동했다.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그들의 발밑에서 시작된 아카시아 향기가 눈에 보일 듯한 짙은 백색의 안개가 되어 거실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 향기는 너무나도 짙고 강렬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던 강진우의 코끝에까지 닿았다.
“이, 이게 무슨……!”
진우가 당황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마취탄을 맞고 즉사하거나 쓰러졌어야 할 두 사람이, 오히려 서로의 몸을 단단히 밀착시킨 채 기이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상처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은하게 빛나는 순백의 진액이었고, 그것이 공기 중으로 기화될 때마다 진우의 몸을 옥죄는 듯한 기묘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지안의 역전 계약이 만들어 낸 감각의 파동이 아틀리에 전체로 확장되고 있었다.
진우가 다시 한번 총구를 겨누려 했으나,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안과 도진의 차원 높은 감각 동기화가 만들어 낸 무형의 장막이, 진우의 신경계마저 교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오른팔이 서서히 감각을 잃고 뻣뻣하게 굳어갔다.
“커헉……! 무슨 짓을 한 거냐, 채지안!”
진우가 제 팔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지안은 진우를 보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에는 오직 제 품에 안겨 숨을 헐떡이는 도진뿐이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맞닿은 곳에서, 가문의 규칙이 내리는 불길이 그들의 영혼을 사정없이 태우고 있었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잔혹한 통증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 고통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마침내 온전하게 하나가 되었다.
그때였다.
아틀리에의 천장에 설치되어 있던 비상 감시 카메라가 붉은빛을 번쩍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의 콘크리트 바닥이 서서히 갈라지며, 연화 제약 본사와 직통으로 연결된 지하 격리실의 거대한 쇠사슬이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승현이 심어둔 또 다른 강제 회수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었다.
사슬 끝에 달린 강철 올가미들이 뱀처럼 대가리를 치켜들고 두 사람의 발목을 향해 무자비하게 돌진해 왔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도진의 품에 안긴 채, 지안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하고 어두운 가문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들은 이 지독한 감각의 감옥을 깨부수고, 온전한 구원의 내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