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끝까지 멋진 척이네, 서도진.”

강진우의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처럼 차갑고 끈적였다. 마비가 시작된 오른팔을 억지로 들어 올린 그가 가문의 특수 감각 마취탄이 장전된 권총을 서도진의 심장 정중앙에 정밀히 조준했다. 진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도진의 귀를 스치듯 낮고 음산한 저주를 속삭였다.

“네 그 잘난 심장, 이번엔 진짜로 멈춰 줄게. 저 쓸모없는 계집애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기분이 어때? 아주 눈물겹군.”

도진의 안색은 이미 하얗게 바랜 종이 같았다. 지안의 고통을 제 몸으로 전부 받아내느라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그럼에도 도진은 지안을 가로막은 제 팔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지만, 지안을 향한 시선만큼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덜커덩, 덜컥!

거실 한가운데의 대리석 바닥이 쪼개지며 연화 제약 본사 지하 격리실과 연결된 쇠사슬이 뱀처럼 대가리를 쳐들었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정밀 아틀리에의 사방을 메웠다. 승현이 심어둔 강제 회수 시스템이 무자비하게 작동하는 소리였다. 사슬 끝에 달린 강철 올가미들이 두 사람의 발목을 사냥하듯 조여 오고 있었다.

지안은 호흡을 멈췄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착각 속에서, 지안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거칠게 몸을 움직이던 찰나, 지안이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가 비틀어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하얀 천 조각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스르륵 펼쳐진 것은 얼룩덜룩하게 굳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박힌 손수건이었다.

순간, 아틀리에 거실 모퉁이에서 미세한 전기 스파크가 일었다. 4화에서 느꼈던 그 이질적이고 끈적한 마력의 파동. 채승현이 이곳을 완벽히 감시하고 도청하기 위해 교묘하게 숨겨두었던 불법 추적 장치가, 결계가 붕괴된 여파로 붉은 빛을 깜빡이며 정체를 드러냈다. 지안의 눈동자가 그 모퉁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가문의 더러운 손길이 이 피난처마저 짓밟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지안의 시선은 이내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으로 되돌아갔다.

붉다 못해 검게 변해버린 그 핏자국을 바라보는 지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 피는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자신이 공감각 저주의 발작에 시달리며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를 때, 도진의 손을 잡고 거짓말처럼 편안해지던 그 수많은 밤들. 그가 전해준 따스한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 때마다, 도진은 홀로 어두운 욕실에 들어가 이 피를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의 잔혹한 치유 계약의 대가. 상대를 치유할 때마다 심장이 타들어 가고 수명이 깎여 나가는 그 반사 통증을, 도진은 단 한 번도 지안에게 티 내지 않았다. 그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지안의 뺨을 어루만져 주었을 뿐이다.

‘왜 말하지 않았어?’

지안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질문이 솟구쳤다.

‘왜 미련하게 혼자 다 짊어진 거야? 내가 상처받을까 봐 밀어내는 동안, 너는 왜 바보처럼 네 목숨을 깎아 가며 내 곁을 지켰는데?’

점층적으로 밀려드는 의문들이 지안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지안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지만, 심장을 짓누르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을 보호해 주는 도진의 등 뒤에 숨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스스로의 나약함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웠다. 도진의 헌신을 애써 외면하며 차갑게 밀어내려 했던 방어기제가 비참할 정도로 부서져 내렸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 지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품에 안긴 도진의 창백한 이마를 적셨다.

“도진아.”

지안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슬픔 대신, 가문의 오랜 저주와 족쇄를 완전히 끊어내겠다는 서슬 퍼런 결의가 담겨 있었다. 지안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약자가 아니었다. 도진이 짊어진 잔혹한 대가를 반으로 나누어 가질 자격이, 그럴 힘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지안은 도진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가문의 공감각 저주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강제로 역행시키기 시작했다. 보통의 채씨 가문원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인의 통증을 정제하여 약으로 만드는 가문의 규칙을 비틀어, 도진의 심장을 갉아먹는 반사 통증의 전류를 자신의 몸속으로 직접 빨아들였다.

쩌적, 쩌적!

아틀리에의 공기가 기묘하게 진동했다. 지안의 온몸을 타고 흘러드는 도진의 반사 통증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두로 심장을 직접 지지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지안의 전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지안은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진을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제 안의 상생 물질과 도진의 생명력을 강제로 동기화시켰다.

두 사람의 영혼이 극도로 융합되는 순간이었다. 아틀리에를 채우고 있던 백색의 안개가 차가운 겨울 서리를 녹이는 봄볕처럼 포근한 온기를 품기 시작했다.

“무슨…… 짓거리냐, 채지안!”

강진우가 이를 갈며 방아쇠를 당기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지안은 진우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도진의 젖은 눈동자뿐이었다.

지안이 도진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찌르르한 전류와 함께 아카시아 향기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무접촉 생활 수칙 3계명 따위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세웠던 그 잔인한 경계선은, 이제 두 사람을 진정으로 하나로 묶어주는 구원의 촉매가 되었다.

지안은 눈물을 참아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진의 메마른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깊게 겹쳤다.

“읍……!”

도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접촉하는 매 순간 심장이 타들어 가던 그 가혹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온기로 변해 두 사람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지안의 입술을 통해 흘러든 상생의 기운이 도진의 찢겨 나간 심장 벽을 빠르게 메우고,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며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치유를 넘어선, 서로의 생명을 공유하는 완전한 쌍방 계약의 지배자가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그 찰나.

바람 한 점 없던 실내에 거센 아카시아 꽃바람이 몰아쳤다. 공기 중에 부유하던 백색의 안개들이 일제히 눈부신 순백의 아카시아 꽃잎들로 변하여 비처럼 흘러내렸다. 아틀리에 전체가 하얀 꽃비로 뒤덮이며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타앙!

그 순간, 강진우의 권총에서 마취 탄환이 발사되었다.

도진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붉은 궤적의 탄환. 하지만 탄환이 두 사람의 신성한 영역에 도달하기도 전에, 허공을 가득 메운 기체화된 아카시아 꽃비가 탄환을 둥글게 감싸 안았다.

치이이익!

강력한 상생의 온기와 접촉한 마취 탄환은 금속 외피부터 시작해 내부의 화학 약품까지 순식간에 하얗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가문의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특수 탄환이, 단지 두 사람이 만들어낸 향기로운 결계에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힘없이 바스라져 재가 되어 흘러내렸다.

“이, 이게 말이나 돼……?”

강진우의 권총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하 격리실에서 올라오던 거대한 쇠사슬들 역시 두 사람의 발목에 닿기 직전, 순백의 서리에 뒤덮인 채 쩍쩍 균열을 일으키며 멈춰 섰다. 가문의 통제 시스템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있었다.

입술을 뗀 지안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저주받은 낙인자의 슬픔을 담고 있지 않았다. 가문의 족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소중한 사람을 지켜낸 절대적인 지배자의 광채가 그곳에 깃들어 있었다. 지안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 위로, 아카시아 꽃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나 방심할 틈은 없었다.

아틀리에 거실 모퉁이에서 완전히 파괴된 줄 알았던 도청 장치 뒤편으로, 붉은색 홀로그램 영상이 지익 소리를 내며 허공에 떠올랐다. 가차 없는 실리주의자, 채승현의 차가운 얼굴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으며 나타났다.

태블릿 패드를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화면 너머의 지안과 도진을 향했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흥미롭군, 채지안. 스스로 시스템을 역행시키다니. 하지만 그 대가가 네 영혼을 얼마나 갉아먹을지 계산은 해봤나?”

승현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아틀리에 외부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붉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과연 지안과 도진은 가문의 마지막 덫을 넘어, 온전한 구원의 숲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쿠르릉, 쾅!

아틀리에를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통유리창들이 외부의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깨져 내렸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유리 파편들이 붉은 비상 경보등 불빛을 받아 마치 피 흘리는 보석처럼 사납게 반짝였다. 폭발의 충격과 함께 밀려든 매캐한 먼지와 탄내, 그리고 연화 제약이 배치한 특수 진압용 고주파 소음이 지안의 귓가를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보통 때였다면 고통의 공감각적 낙인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을 자극이었다. 날카로운 유리가 살을 베는 듯한 환각 통증과 뇌를 짓누르는 이명이 지안의 신경계를 사정없이 짓밟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안의 작은 손은 여전히 도진의 단단한 손언저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아카시아의 따스한 온기가 맥박을 타고 흘러들어와, 머릿속을 헤집던 모든 소음과 통증을 부드러운 안개처럼 감싸 안아 지워냈다. 꺾이고 상처 입은 대지 위에서도 기어이 싹을 틔우고야 마는 봄날의 수선화처럼, 두 사람의 결속은 외부의 폭력적인 자극 속에서 더욱 강인하고 선명한 자생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안아.”

도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안을 불렀다. 그의 창백했던 뺨에 서서히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나, 도진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깊은 우려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가혹한 대가를 지안이 스스로 나누어 가졌다는 사실을, 그 영리한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도진은 지안의 손을 밀어내려 힘을 주었지만, 지안은 오히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깊숙이 얽어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나눈 두 사람의 시선은 그 어떤 말보다도 단단하게 얽혔다.

‘더는 혼자 아프지 마.’ ‘너를 잃는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소리 없는 눈빛의 대화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애틋한 서정성을 자아냈다. 지안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도진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왜 진작 이 손을 더 꽉 잡지 못했을까. 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서로를 밀어내며 그 기나긴 밤들을 차가운 유리벽 뒤에서 흘려보냈던 걸까.

“감동적인 재회는 거기까지 하지.”

홀로그램 너머에서 채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파편이 뒹구는 바닥 위로 투사된 그의 푸른 얼굴은 지독할 정도로 평온했고, 그래서 더 오싹했다. 승현은 태블릿 화면 위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너희가 나눈 그 기적 같은 ‘상생’의 데이터, 아주 훌륭한 표본이 되었어. 하지만 말이야, 지안아. 그 불완전한 역행 계약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한세아가 만들던 해독제 미완성본은 이미 내 손안에 있다.”

순간, 지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세아 언니가……?”

“그 영리한 의사 친구가 가문 몰래 임상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더군. 아주 기특한 시도였지만, 결국 내 감시망을 벗어나진 못했어.”

승현의 차가운 미소가 홀로그램의 푸른 안개 속에서 일그러졌다.

“지금 이 아틀리에의 메인 서버에 연결된 해독제 오리지널 소스 코드를 내 서버로 전송하는 중이다. 전송이 완료되는 순간, 이곳의 임시 허브에 남은 원본 데이터는 영구히 삭제될 거야. 그렇게 되면 너희는 평생 서로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서서히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소멸할 뿐이지.”

지안은 이를 악물었다. 승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아가 목숨을 걸고 연구해 온 ‘상생의 해독제’가 연화 제약의 손에 넘어가 영원히 가문의 자금줄이자 통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도진과 자신이 온전한 온기를 나누며 평범하게 살아갈 유일한 열쇠가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선택해라, 채지안.”

승현이 화면 너머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최후통첩을 던졌다.

“얌전히 가문으로 돌아와 연구에 협조한다면, 저 쓸모없는 아카시아 녀석의 목숨만큼은 살려두지. 하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소스 코드가 삭제되는 것과 동시에, 아틀리에 지하에 매설된 신경 가스 정제 장치가 작동하게 될 거다.”

치이이익—!

승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깨진 바닥 틈새와 환기구에서 짙은 회색의 가스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문원들의 공감각 능력을 강제로 폭주시켜 쇼크사를 유발하는 연화 제약 특제의 독성 기체였다.

회색 가스가 순백의 아카시아 꽃잎들을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하자, 도진의 가슴이 다시 한번 크게 들썩였다. 지안 역시 밀려드는 가스의 냄새에 폐부가 찌르는 듯 아파왔지만, 도진의 손을 잡은 손귀만은 결코 늦추지 않았다.

“도진아.”

지안이 도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를 믿어?”

그녀의 눈빛 속에 깃든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문의 오랜 저주가 만들어낸 잔혹한 룰을 제 손으로 완전히 재정의하겠다는, 절대적인 지배자의 확신이었다.

도진은 대답 대신 지안의 손을 더욱 강하게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헌신과 신뢰가 지안의 심장 깊은 곳에 존재하던 마지막 망설임마저 완전히 태워버렸다.

지안이 고개를 돌려 화면 속 채승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남은 한 손을 허공을 향해 천천히 뻗는 순간,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기이하게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지안은 세아의 해독제 데이터를 지켜내고, 승현이 파놓은 이 잔혹한 감옥에서 도진과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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