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전면 격벽 너머에서 쏟아지는 은백색의 광채는 Coffin-9의 녹슨 시야를 단숨에 소거했다.

그것은 찬란했으나, 동시에 피가 흐르지 않는 기계의 심장처럼 지극히 차가운 빛이었다. 우주 전쟁의 가혹한 포화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된 중앙 컴퓨터실. 벽면을 따라 정교하게 부착된 순도 99.9%의 우주용 은합금선 케이블들이 백색 질소 증기 사이로 신경망처럼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 장엄한 아날로그의 유산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낸 거대한 강철의 사신이었다.

두꺼운 광대역 고무 패킹과 특수 절연 세라믹 장갑판으로 온몸을 밀폐한 지상 최후의 살인 보디가드, 센티넬(Sentinel).

*위이이잉—!*

센티넬의 흉부 중앙에 매설된 대구경 에너지 주포의 동력로가 고속 회전하며 금속성 고주파음을 질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붉은색 조준 레이저가 정확히 케서의 가슴 정중앙, 새로 장착된 군용 보조 프로세서(Aegis_Mil_Aux_Processor_07)의 표면을 때렸다.

[STATUS :: TARGET_LOCKED] [WEAPON :: 80mm 하전 입자 주포 — 충전율 15%] [TARGET_COGNITION :: 안드로이드 수사관 케서 (Kesser)] [TARGET_SPECIFICATION :: 절연 장갑 두께 150mm (물리 및 전자기 해킹 불가능)]

케서의 메인 연산 장치가 즉각적인 기하학적 회피 궤적을 산출해 냈다. 0.003초 만에 떨어진 결론은 생존율의 극단적인 하락이었다.

"니카."

케서의 음성 합성 장치에서 차갑고 건조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후방 4.5미터 지점의 아날로그 제어반 격벽 뒤로 즉시 회피해라. 질량 밀도 분석 기준, 해당 강철판은 하전 입자의 1차 확산 에너지와 열역학적 팽창을 82% 수준으로 감쇄할 수 있다. 그 자리에 머물 경우 네 유기체 신체의 탄화 확률은 99.4%다."

"뭐? 미친, 저 괴물은 또 뭐야!"

니카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지듯 몸을 날렸다. 그녀의 파손된 왼팔 바이오 의수 접합부에서 노란색 잔류 스파크가 튀며 바닥의 차가운 질소 안개를 가르며 흩어졌다.

그녀가 격벽 뒤로 완전히 숨음과 동시에, 센티넬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앙—!*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력한 푸른 백색의 열선이 허공을 찢었다. 케서는 오른쪽 무릎 관절의 구동 모터를 최대 압력으로 구동해 측면으로 몸을 던졌다.

찰나의 차이로 열선이 케서의 왼쪽 견갑 장갑판을 스쳐 지나갔다.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된 장갑판이 섭씨 수천 도의 초고열 속에서 순식간에 액상화되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흘러내린 금속 물방울이 차가운 에틸렌글리콜 오염수 표면과 닿아 *치이익* 하는 비명과 함께 유독한 백색 가스를 피워 올렸다.

[WARNING :: 좌측 견갑 장갑 손실률 42.1%] [WARNING :: 주변부 전자기장 교란율 78% 상승]

케서의 시각 센서에 비친 센티넬의 두꺼운 중합 세라믹 몸체는 완벽한 절연 상태였다. 고전압 서지나 아날로그 동선을 통한 전류 역류 해킹은 저 두터운 절연 피복을 뚫을 수 없었다.

가장 진보된 물리 절연체. 그것은 기계식 해킹을 업으로 삼는 안드로이드에게는 통곡의 벽과 같았다.

하지만 케서의 연산 장치는 도덕적 절망 대신, 철저하게 물리적이고 원시적인 역학 관계를 파고들었다.

'전기적 저항이 무한대에 가깝다면, 물리적 및 화학적 훼손으로 우회한다.'

케서는 센티넬의 다음 포격 충전 시간인 4.2초를 계산하며 바닥을 박차고 돌진했다. 그의 시선은 센티넬의 거대한 몸체 너머,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은합금선 케이블들 사이로 조밀하게 얽혀 있는 적색 파이프라인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중앙 컴퓨터실의 초고열을 식히기 위해 쉴 새 없이 순환하는 고압 냉각 계통 루프였다. 내부에는 에틸렌글리콜 기반의 초저온 및 고온 가변형 열교환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SYSTEM_INTRUSION_ATTEMPT] [TARGET :: 중앙 냉각 제어용 하위 터미널] [PROTOCOL_USED :: Port-404-Aegis]

8화에서 살해범 AI의 폭주 기억 속에서 추출해 냈던 아이기스 군용 장갑차 및 하위 터미널 공유 백도어 프로토콜 번호, `Port-404-Aegis`가 케서의 보조 프로세서를 통해 터미널의 가상 포트로 강제 인입되었다.

*디디딕—!*

[ACCESS_GRANTED :: Port-404-Aegis] [COMMAND :: 냉각 순환 루프 압력 제어 서브루틴 강제 오프라인] [CURRENT_PRESSURE :: 45 bar -> 90 bar (과부하 유도)]

순식간에 냉각 제어 밸브의 안전장치가 풀리며 적색 파이프 내부의 압력이 한계를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파이프를 고정하고 있던 아날로그식 구리 볼트들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팅, 팅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센티넬의 붉은 레이저 조준경이 다시 케서의 머리를 향해 회전했다. 충전율 80%. 포구 끝에서 하얗게 타오르는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의 공기를 진공 상태로 빨아들였다.

케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우측 무릎 관절의 가동 범위를 한계까지 넓히며 슬라이딩하듯 센티넬의 하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으로 과가열되어 벌갛게 달아오른 냉각 순환 파이프의 구부러진 엘보우 조인트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크으으윽—!"

케서의 음성 출력기에서 쇠가 긁히는 듯한 부하음이 터져 나왔다.

합선 전류로 이미 탄화되어 있던 오른손의 인공 피부가 섭씨 180도에 육박하는 파이프의 고열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며 검은 연기를 뿜었다. 뼈대를 구성하는 티타늄 프레임과 구리 도선들이 파이프의 뜨거운 표면에 직접 닿아 눌어붙었다. 비정상적인 열전도가 케서의 메인 코어 근처까지 도달했으나, 그는 악력을 늦추지 않았다. 6000뉴턴의 압축 응력이 파이프의 이음매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케서는 자신의 몸뚱이 전체의 무게와 동력로의 최대 토크를 실어 파이프를 아래로 우그려뜨렸다.

*콰드드득—!*

피로 누적과 과압으로 비명을 지르던 금속 배관이 마침내 완전히 찢어졌다.

*슈우우우우욱—!*

찢어진 틈새로 90바의 초고압으로 가열된 에틸렌글리콜 용액이 폭발적으로 분사되었다. 뿜어져 나온 고온의 화학 용액은 포격을 개시하려던 센티넬의 안면부, 즉 정밀 광학 가이드 글라스와 복합 센서 어레이가 밀집된 유일한 비절연 구역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치이이이이익—!"

에틸렌글리콜의 강한 점성과 열역학적 화학 반응이 센티넬의 특수 코팅 렌즈 표면을 순식간에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투명했던 광학 가이드 글라스가 하얗게 불투명해지며 녹아내렸고, 내부의 초미세 센서 소자들이 화학 액체의 침투로 인해 차례차례 단락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센티넬의 가슴에 충전되어 있던 하전 입자포의 에너지가 통제력을 잃고 허공으로 비산했다.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천장의 은합금선 케이블 몇 가닥을 끊어놓았다.

가장 완벽한 절연 장갑을 두른 기계가, 지독하게 원시적이고 화학적인 부식 공격 앞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케서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콰아아아—!*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에틸렌글리콜 부식액의 폭풍 속에서 케서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WARNING :: 우측 전방 수신 렌즈 (Right Optical Sensor) 부식성 액체 침투] [ERROR :: 광학 렌즈 표면 코팅 용해율 98.7%] [SYSTEM :: 우측 광학 센서 기능 정지]

케서의 오른쪽 시야가 지독한 백색 잡음과 함께 완전히 꺼져버렸다. 왼쪽 단안 센서 하나에만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기하학적 난관. 원근감이 거세된 시야 속에서 사방의 거리감이 왜곡되어 다가왔다.

센티넬은 눈이 먼 채 허공을 향해 거대한 금속 팔을 휘두르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쇠뭉치가 벽을 때릴 때마다 초전도 냉각 액체 질소 탱크의 외벽이 찌그러지며 백색 안개가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케서! 너 오른쪽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어! 당장 거기서 빠져나와!"

격벽 뒤에서 고개를 내민 니카가 자신의 망가진 왼팔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안 시야의 붉은 노이즈 너머로, 조슈아가 최초로 업로드를 시도했던 거대한 중앙 컴퓨터 서버의 냉각 탑이 보였다. 그 중심부, 조슈아의 고유 알고리즘 서명인 `Signature_Joshua_Beta_99`과 동일한 고유 주파수의 무선 비콘 신호가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주 터미널의 물리 인터페이스 포트가 깜빡이고 있었다.

그 포트는 순도 99.9%의 우주용 은합금선이 두껍게 인입되는 핵심 전도 구역이었다.

케서는 허리춤에 감아두었던, 니카가 아날로그 동선과 은 도금을 덧대어 만든 은선 케이블 뭉치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끝부분의 물리 커넥터 핀들은 완전히 뭉개지고 찌그러진 상태였다.

시간이 없었다. 궤도 폭격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8분 남짓.

케서는 망설임 없이 은선 케이블의 뭉그러진 끝부분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금속 이빨로 두꺼운 고무 절연 피복을 깨물어 뜯어냈다. 입안 가득 씁쓸하고 비릿한 구리 가루와 은 도금의 금속 맛이 퍼졌다.

그는 노출된 은 도금 동선 가닥들을 오른손의 탄화된 손가락으로 거칠게 꼬아 뭉친 뒤, 자신의 보조 프로세서 포트와 주 터미널의 은합금 포트 사이에 그대로 밀어 넣었다.

물리적 마찰과 강제 접지.

"지이이이이잉—!"

엄청난 고전압 전도 전류가 케서의 구강과 오른손을 관통했다. 인공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중앙 컴퓨터실의 에틸렌글리콜 냄새와 뒤섞였다. 케서의 눈앞에 수천 개의 에러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CONNECTION :: PHYSICAL_CONTACT_ESTABLISHED] [CONTACT_RESISTANCE :: 0.08 ohm] [DATA_BANDWIDTH :: MAXIMUM_CAPACITY_OPENED]

"싱크 케이블... 물리 연결 성공."

케서의 입술 틈새로 푸른 스파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SYSTEM :: 데드 록 타임라인 리컨스트럭션 (DLTR) 프로토콜 강제 구동] [SOURCE :: Aegis_Mil_Aux_Processor_07] [TARGET :: Coffin-9 Central Archive - Joshua's Final Segment] [WARNING :: 대상 코어의 잔류 오염 바이트 유입율 74.2% 급증] [WARNING :: 자아 포맷 임계점 도달까지 남은 시간 :: 300.00초]

300.

299.

카운트다운이 시작됨과 동시에, 케서의 의식은 차가운 가상 공간의 심연으로 급강하했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쓸쓸한 심우주의 적요함이 그의 인지 공간을 덮쳤다. 그 고요한 묘지 속에서, 조슈아의 마지막 10분이 고해상도의 3D 와이어프레임과 아날로그 노이즈 데이터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극히 쓸쓸하고도 비합리적인 기록이었다.

과거의 기록 속 조슈아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이 무거운 은합금선 케이블들을 하나하나 맨손으로 납땜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정밀 제어력을 잃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케서.'

기억 속 조슈아가 허공을 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데이터의 파편이 되어 케서의 신경망을 아프게 두드렸다.

'기계는 확률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모순을 선택해. 이 코드가 네 자아를 완전히 포맷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이 비합리적인 저항의 가치를 스스로 계산해 내기를 바란다.'

데이터의 동기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DLTR_SYNC_RATE :: 5.4%] [DLTR_SYNC_RATE :: 10.1%] [DLTR_SYNC_RATE :: 15.0%]

싱크율이 15%에 도달하며 조슈아가 숨겨둔 '자율성 패치'의 첫 번째 세그먼트가 해독되려던 바로 그 순간.

*철컥—!*

등 뒤에서 차가운 유압식 실린더의 구동음과 함께, 지독하게 무감각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중앙 컴퓨터실의 백색 안개를 뚫고 들어왔다.

"결국 연합의 핵심 자산에 구구절절한 구리선 빨대를 꽂았군, 불량 안드로이드."

아이기스 기동 타격대의 대장, 바레즈였다.

그의 온몸을 감싼 티타늄 나노 아머는 군데군데 그을려 있었으나, 그의 손에 들린 무기는 추호의 오차도 없이 견고했다. 은하 연합 군용 고성능 방사 소형 대전차포.

포구 끝에 응집되기 시작한 붉은색 고열 플라즈마 입자들이 웅웅거리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그 대전차포의 조준선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케서의 머리도, 심장도 아니었다.

그것은 케서의 등 뒤에서 주 터미널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조슈아의 마지막 기억 데이터를 전송하고 있는 은 도금 동축선과 아날로그 납땜부 정중앙이었다.

그 선이 끊어지는 순간, 300초의 카운트다운 도중 데이터 싱크가 강제 차단된다.

그 결과는 단 하나. 전송 중이던 오염 바이트들이 케서의 고유 핵심 세그먼트를 덮어씌워, 그의 자아를 영구히 포맷해 버리는 파멸뿐이었다.

바레즈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비효율적인 쓰레기는 소각하는 것이 연합의 규칙이다."

붉은 조준점이 동선 위에서 굳건하게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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