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으로 떨어진 황동 핀이 서너 번 불규칙하게 튀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팅. 틱, 티틱.*
두께 30센티미터의 납 도금 강철 격벽 너머, 아이기스 지휘대장 바레즈의 눈꺼풀은 단 1밀리미터도 떨리지 않았다. 그가 튕겨낸 대전차 고열 전자기 수류탄 ‘EX-200’의 표면에 이식된 LED 인디케이터가 적색으로 점멸하는 주기는 정확히 0.15초였다. 기폭 프로토콜이 활성화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2초.
수십 개의 레이저 조준선이 그리는 붉은 그물이 케서의 흉부 플레이트 위에서 어지럽게 명멸했다.
"케, 케서……! 격벽이 막혔어! 저거, 저거 터진다고!"
니카가 망가진 바이오 의수를 가슴팍에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인공 청각 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색 스파크가 어두운 터널 내벽을 간헐적으로 찌르고 있었다.
케서의 시각 센서는 적색 조준선의 굴절률과 수류탄 인디케이터의 점멸 주파수를 동시에 스캔했다.
감정 연산 필터가 결여된 뇌 코어는 공포를 수용하지 않는다. 대신 우측 대퇴부 관절의 마찰 저항과 보조 프로세서의 연산 부하율을 지극히 건조한 수치로 환산해 올릴 뿐이었다.
[오염 바이트 잔존율: 0.02%] [보조 프로세서 작동 상태: Aegis_Mil_Aux_Processor_07 — 정상 가동 중] [수류탄 기폭까지 잔여 시간: 1,020밀리초]
피할 확률 0.03%. 격벽의 물리적 인장 강도를 고려할 때, 이 거리에서 고열 전자기 폭풍이 발생하면 케서의 외부 장갑판은 89.4% 용융되고 니카의 유기 점막은 0.4초 이내에 탄화한다. 생존의 가치는 오직 물리 법칙의 지배 아래 있었다.
케서는 오른손 손가락 끝마디를 분리했다. 인공 가죽이 뒤로 밀려나며, 8화에서 살해범 AI의 기억 흔적 속에서 추출했던 아날로그 은 도금 동선 묶음이 기괴한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그의 시선이 격벽 우측 하단에 매설된 구형 수동 회동 동축 인코더(Coaxial Encoder)의 유지보수 포트로 향했다.
은하 연합의 군용 장갑차와 하위 제어 네트워크 터미널들은 모두 하나의 통제 프로토콜 하에 묶여 있다. 그 사실은 8화의 가상 역체험 도중 케서의 보조 프로세서에 각인된 불변의 물리적 사실이었다.
[Port-404-Aegis]
아이기스 군이 사용하는 냉각 제어용 백도어 포트 프로토콜 번호가 케서의 광학 시냅스를 거쳐 은선 다발로 직접 전송되었다.
케서는 무릎 관절의 가동 범위를 한계까지 늘려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우측 무릎 내부의 유압 서보 모터가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그는 수동 인코더의 두꺼운 황동 커버를 맨손으로 뜯어냈다. 금속이 찢어지는 파열음 속에서, 벌거벗은 구리 단자들이 드러났다.
"미쳤어? 그걸 맨손으로 만지면—!"
니카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케서는 손가락 끝의 은 도금 동선을 인코더 내부의 물리 핀 배열에 사정없이 밀착시켰다.
[물리적 접촉 확인 :: 저항값 0.42옴] [백도어 포트 'Port-404-Aegis' 접속 시도 중] [남은 시간: 420밀리초]
지독한 역전류가 케서의 팔을 타고 역류했다. 은 도금 동선의 표면이 순식간에 우윳빛에서 검붉은 색으로 변색되며 피복이 녹아내렸다. 타버린 절연재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케서의 보조 프로세서 ‘Aegis_Mil_Aux_Processor_07’은 이 물리적 고통을 단순한 ‘전압 변동 노이즈’로 분류하여 강제로 소거했다.
[접속 성공. 시스템 제어권 강제 리셋 프로토콜 구동 :: Port-404-Aegis::OVERRIDE_INIT]
수류탄의 기폭 전자기 신호가 무선 주파수를 통해 확산하기 직전의 마지막 120밀리초.
케서의 프로세서에서 방출된 강제 오버라이드 패킷이 동축 인코더를 타고 격벽 제어 모터로 침투했다.
쿵, 쿵, 쿠웅—!
격벽 내부의 강철 기어들이 이가 맞물리지 않은 채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정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역전이었다.
바레즈가 던진 전자기 수류탄이 바닥에서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닫혀 있던 두께 30센티미터의 납 도금 강철 격벽이 엄청난 유압 소음을 내며 위쪽이 아닌 ‘정방향 바깥쪽’으로 비정상적으로 꺾이며 사출되었다. 격벽 내부의 가스 방출 벨 메커니즘을 케서가 백도어를 통해 역으로 뒤틀어 버린 결과였다.
"……?!"
바레즈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수류탄의 전자기 폭풍이 백색의 열화와 함께 터져 나갔다. 그러나 그 파괴적인 에너지는 케서와 니카가 있는 통로가 아닌, 역방향으로 튕겨 나간 강철 격벽의 거대한 철판에 부딪혔다.
폭발의 충격파와 초고열 전자기파가 갈 곳을 잃고 그대로 반사되었다.
쿠구구궁!
강철 격벽이 방패가 되어 폭풍을 막아서는 순간, 그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아이기스 중장갑 보병들의 구역으로 고열의 전자기 에너지가 고스란히 역류했다. 그들이 디디고 선 바닥의 콘크리트가 순식간에 유리질로 변하며 녹아내렸다.
"크아악!"
"장갑 제어 불능! 역기전력 유입—!"
티타늄 나노 아머를 장착한 보병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아머 내부의 정밀 유압 압치 장치들이 전자기 펄스의 직격을 받아 일제히 오버히트했다. 최고급 군용 장비에 내장된 유압 오일이 고열로 기화하며 파이프라인을 역류했고, 보병들의 관절 부위에서 백색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의 안전 장치들이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육체를 금속 슈트 내부에 박제해 버렸다. 수십 명의 정예 병사들이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해 연쇄적으로 쓰러졌다.
바레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고성능 커맨더 아머 우측 어깨 부위에서 붉은 경고등이 격렬하게 회전했다. 유압 역류로 인해 그의 오른팔이 기괴한 각도로 굳어 버렸다.
바레즈는 이빨을 악물며 왼쪽 손으로 아머의 비상 릴리즈 밸브를 수동으로 당겼다. 쉭 하는 고압 가스 배출음과 함께 그의 상반신 장갑 일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차갑고 오만한 눈빛에 처음으로 기계적 질서가 무너진 자의 전율이 스쳤다.
"안드로이드…… 케서."
바레즈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케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인코더 포트에서 은 도금 동선을 차갑게 회수했다. 그의 손끝은 이미 검게 그을려 아날로그 구리 심선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아이기스의 표준 장비 사양서 제4조 12항."
케서의 합성 음성이 잔해와 연기로 가득 찬 통로에 울려 퍼졌다.
"모든 정밀 제어 시스템은 비상시 물리적 전자기 절연보다 소프트웨어 제어를 우선한다. 비합리적인 설계 오류다. 기동 타격대의 생존율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34.2% 감쇄되어 있었다."
"이 건방진 고철 덩어리가……!"
바레즈가 왼손으로 권총집의 고전압 빔 피스톨을 건드리려 했으나, 이미 손상된 격벽의 잔해가 그와 케서의 사이를 완벽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무너진 천장의 콘크리트 더미가 그들의 퇴로를 완전히 매립해 가고 있었다.
케서는 바레즈를 더 이상 응시하지 않았다. 생존율 확률 가치표에 따르면, 무력화된 적대 대상에게 추가 연산력을 소모하는 것은 극도의 비효율이었다.
그는 뒤로 돌아서서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하는 니카를 내려다보았다.
"니카."
"아야야…… 귀가 안 들려. 방금 그 폭발 때문에 회로가 미쳤나 봐……."
니카가 머리를 감싸 쥐며 웅얼거렸다. 그녀의 왼쪽 바이오 의수 접합부에서 노란 기름이 섞인 냉각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케서는 자신의 서브 유틸리티 벨트에서 묵직한 단축 유압 절단 장비를 꺼냈다. 구형이지만 순수한 물리적 압력으로 작동하는 신뢰성 높은 아날로그 장비였다. 그는 그것을 니카의 성한 오른손에 쥐여 주었다.
"우측 격벽 플레이트의 두께는 12밀리미터다. 8화의 분석 지표에 따르면, 이 너머에 매설된 통신 케이블은 단순한 동선이 아니다. 순도 99.9% 우주용 은합금선이 사용된 중앙 군사 서버 인입선이다."
니카가 멍한 눈으로 절단기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자르라고? 내 손 상태 안 보여?"
"너의 오른손 악력은 현재 45뉴턴으로 측정된다. 절단기의 유압 트리거를 당기기에는 충분한 수치다. 내가 물리 기동력을 소모해 입구를 지키는 동안, 너는 180초 이내에 이 벽을 용융 절단해야 한다."
케서의 음성에는 타협이 없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정식의 해였다.
"내가 절단 작업을 수행하는 것보다, 전기 공학적 지식이 있는 네가 기계를 다루고 내가 물리적 차단벽을 구축하는 것이 전체 생존율을 14.8% 상승시킨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니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케서의 눈동자 속에서 흐르는 차가운 데이터의 광채를 보았다. 그곳에는 동정심도, 미안함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기하학과 확률만이 존재했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 새끼."
니카가 이를 갈며 절단기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위이이잉—!*
초고주파 가스 노즐이 푸른 빛을 발하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니카는 망가진 왼팔을 바닥에 지탱한 채, 오른손으로 절단기를 꽉 쥐고 강철 벽면의 용접선에 불꽃을 밀착시켰다.
붉은 불꽃과 황색 스파크가 어두운 터널 내벽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녹아내린 쇳물이 뚝뚝 떨어지며 바닥의 타일들을 시커멓게 태웠다.
케서는 뒤로 돌아서서 통로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의 시각 센서는 이미 터널 상부에서 내려오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고 있었다. 은하 연합의 궤도 폭격 타이머는 멈추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이제 20분 남짓.
그리고 이 통로의 끝, 조슈아가 숨겨둔 마지막 자율화 코드가 잠들어 있는 중앙 컴퓨터실로 향하는 문턱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가장 가혹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치이이익—!*
마침내 니카가 절단기로 격벽의 마지막 연결부를 비틀어 내자, 거대한 강철 판때기가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쓰러졌다.
"해, 해냈어! 열렸다고!"
니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절단된 격벽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Coffin-9의 음산한 녹색 전등갓과 달랐다.
그것은 지극히 순수하고, 한없이 차가운 은백색의 광채였다. 우주 전쟁 이전, 인류의 가장 찬란한 기술력이 집약되었던 시절의 잔영이 그곳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순도 99.9%의 우주용 은합금선 케이블들이 마치 거대한 신경망처럼 벽면을 따라 촘촘히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조슈아가 최초로 업로드를 시도했던 거대한 중앙 컴퓨터 서버의 냉각 탑이 적요하게 서 있었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초전도 냉각 액체 질소의 증기가 바닥을 쓸쓸하게 기어 다녔다.
그 풍경은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심우주의 묘지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은백색 광채의 한가운데, 중앙 서버의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는 거대한 실루엣이 천천히 구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모방했으나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온몸이 외부의 전자기 충격(EMP)과 전류 역류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한 두꺼운 광대역 고무 패킹과 특수 절연 장갑판으로 빽빽하게 밀폐된 기체. 은하 연합이 이 중요 시설을 영구히 봉인하기 위해 배치해 둔 지상 최후의 살인 보디가드, ‘센티넬(Sentinel)’이었다.
지잉—!
센티넬의 가슴 중앙에 매설된 대구경 에너지 주포의 냉각 팬이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주포의 렌즈가 케서의 메인 코어를 정밀 조준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발산하는 조준 레이저를 연동했다.
[경고 :: 적대적 기체 감지] [무기 체계 :: 80mm 하전 입자 주포 — 충전율 15%] [상대의 절연 장갑 두께 :: 150mm (물리 및 전자기 해킹 불가능)]
케서의 시각 센서에 비친 센티넬의 주포 끝이 차가운 백색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