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밀랍이 뜯겨 나간 양피지 서한의 모서리에서 차가운 계곡의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리디아 폰 보이스트의 손끝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서한의 하단, 엄숙한 십자가와 불꽃이 교차된 대주교 칼렌의 밀인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스벨트의 영구적 사교 단속을 위해, 백작의 군세와 협력하여 광산 지대의 대정화를 명하노라."
리디아가 메마른 목소리로 글귀를 읽어 내렸다. 단 한 자도 빠짐없이 차가운 살의가 박혀 있는 문장이었다.
"이단적 기술의 싹을 완전히 도려내고, 그 우두머리의 목을 제단에 바쳐라."
롤랑 에르하르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구두 굽 아래에는 조금 전 화탄의 폭발로 찢겨 나간 백작 기병대장의 가죽 갑옷 파편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매캐한 유황과 타버린 가죽 냄새가 계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장님, 이것은 단순한 영지 분쟁이 아닙니다."
리디아가 서한을 접어 품에 넣으며 롤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짙은 경계심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현실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성령 교단이 직접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대주교 칼렌이 이끄는 이단 심문관들이 이 계곡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가 이룩한 모든 공정은 악마의 의식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백작의 군세가 소멸한 원인을 조사하러 교단의 파견관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시간문제라."
롤랑이 읊조렸다. 그의 음성은 기온이 내려간 계곡의 밤공기보다 더 건조했다.
"시간은 절대적인 물리량이 아니다. 관측자의 기준에 따라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지. 리디아, 교단이 이 사건을 인지하고 군대를 움직이기까지 며칠이 소요될 것 같나?"
"교단 본당에서 이곳 오스벨트 변경까지 전령이 왕복하는 데만 최소 열흘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이단 심문관들이 즉각 파견된다 해도, 군사적 정벌단을 조직해 행군하는 데는 한 달 이상의 물리적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그전에 행정적인 조사가 선행되겠지."
롤랑이 리디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차가운 수식과 논리로 가득 차 있었다.
"백작의 정예 기병 30여 명이 단 한 번의 조우로 흔적도 없이 폭사했다. 이것을 교단이 그대로 보고받는다면, 그들은 즉각 신성 모독적인 주술이나 금지된 화공술을 의심할 것이다. 정결령 위반에 따른 즉각적인 처형령이 내려질 사안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막으시겠습니까? 이 시체들을 모두 감춘다 해도 영주의 군사들이 사라진 사실 자체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덮을 필요는 없다."
롤랑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구두가 자갈을 밟는 소리만이 적막한 계곡에 울렸다.
"그들의 눈을 가릴 필요는 없다. 다만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현실을 서류 위에 재구성해 주면 그만이다. 인간의 이성은 믿고 싶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동하니까."
* * *
사흘 뒤, 오스벨트 서기실의 등불은 새벽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롤랑은 깃펜을 쥐고 두꺼운 양피지 보고서 위에 정교한 라틴어 서체를 채워 내려갔다. 그의 앞에는 오스벨트 지질도와 하천 흐름을 기록한 고문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오스벨트 하류 지대의 늪지 및 광산 폐수 방류 구역은 고대로부터 썩은 유기물이 퇴적되어 온 불모지임. 본 서기처가 관측한 바에 따르면, 최근 지속된 고온 기후로 인해 지하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휘발성 지열 가스, 즉 '메탄 유성 기화 가스'가 대량으로 분출되어 하천 표면에 정체되어 있었음."
롤랑의 손끝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사건 당일, 갑작스러운 국지성 낙뢰가 해당 가스 정체 구역에 내리쳤으며, 이로 인해 대기 중에 포화 상태로 존재하던 기체가 일시에 연쇄 열팽창을 일으킴. 이는 자연적인 '천벌의 불꽃' 현상으로, 현장에 있던 백작의 수하들은 불운하게도 자연재해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전원 기화 및 폭사한 것으로 판단됨."
리디아가 잉크가 마르지 않은 보고서를 집어 들고 빠르게 훑어내렸다. 그녀의 미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메탄 유성 기화 가스……? 낙뢰로 인한 연쇄 열팽창이라니요. 이 정교한 궤변은 대체 무엇입니까?"
"궤변이 아니라 학술적 사실이다."
롤랑이 펜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실제로 저습지나 유황 광산 인근에서는 메탄가스가 누출되어 미세한 불꽃에도 대폭발을 일으킨다. 교단의 신학자들은 이를 '악마의 숨결' 혹은 '대지의 징벌'이라 부르지. 나는 단지 그들의 종교적 언어를 조금 더 행정적이고 그럴듯한 자연현상으로 번역해 주었을 뿐이다."
"하지만 교단의 사법관들이 이 보고서 한 장만 믿고 조사를 종결하겠습니까?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니기에 의심하겠지. 하지만 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이 척박하고 가난한 변경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기고 싶어 하는 관료는 없다."
롤랑은 책상 서랍에서 붉은 공증 인장을 꺼내 보고서 하단에 단단히 찍었다.
"성령 교단의 사법 세칙 제14조를 보면, '자연적 재해 및 천재지변으로 인한 인명 손실은 세속 영주의 관할 하에 조사를 종결하며, 교단은 영적 위로 외의 사법적 개입을 유예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보고서가 교단의 하급 행정실에 접수되는 순간, 그들은 복잡한 이단 심문 절차를 밟기보다 '자연재해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처리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태만을 이용하시겠다는 거군요."
"태만이 아니라 효율성이다. 관료제는 언제나 가장 저항이 적고 서류 작업이 간소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네가 준비해야 할 윤활유가 있지."
롤랑의 시선이 리디아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로 향했다.
그 안에는 최근 오스벨트 정제 가마에서 생산된 최고급 백색 소금과, 탄산나트륨을 결합하여 가공한 자스민 향 자소 비누 세트가 들어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서기실의 묵은 먼지 냄새를 덮었다.
"교단 동부 사법서의 하위 서기들과 세무 관리들의 가솔들에게 이것을 전달해라."
롤랑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들의 아내들에게 이 자스민 비누는 단순한 세정제가 아니라, 중앙 사교계의 귀족들조차 쉽게 구하지 못하는 극상의 사치품이다. 무상으로 제공되는 최고급 소금과 비누는 그들의 가정에 실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겠지."
리디아는 비누의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 보고서를 검증하는 과정을 최대한 지연시키도록 만드는 동기가 되겠군요. '오스벨트의 서기서가 보내온 보고서에 결함이 없다'고 서명하는 대가치고는 매우 달콤한 뇌물입니다."
"뇌물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거래다."
롤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냉혹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이미 다음 단계의 계산을 끝마친 상태였다.
"하위 관리들이 서류를 서랍 밑바닥에 처박아두고 시간을 끄는 동안, 우리는 다가올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가짜 보고서로 벌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그 한 달 안에, 우리는 저들의 기사단을 찢어발길 수 있는 진짜 무기를 완성해야 한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한밤중, 롤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개릭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이명이 고막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학적 투시안'을 발동할 때마다 찾아오는 이단의 침식 현상이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그의 뺨을 적셨다. 성황청의 마력 감지기가 이 미세한 마력 노이즈를 포착하기 전에 공정을 끝내야만 했다.
화덕의 붉은 열기가 대장간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땀에 젖은 개릭 아이언피스트가 거대한 망치를 내려놓으며 롤랑을 맞이했다.
"서기장 나리, 오셨소."
개릭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무시와 경계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깊은 경외심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주조해 낸 200자루의 철검이 완벽한 강도를 증명한 이후로, 개릭은 롤랑의 지식을 맹신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화덕의 온도를 최대한 올리고 있었소만…… 가마가 버티질 못할 것 같소. 벌써 바닥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나고 있단 말이요."
롤랑은 붉게 끓어오르는 가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이채를 띠며 변했다. 망막 위에 가마의 내부 구조가 3차원 투영 모델로 펼쳐졌다. 열역학적 한계치와 물질의 성분 결함이 붉은색 수치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뇌를 긁는 듯한 이명이 날카로워졌다. 롤랑은 어금니를 사려 물며 투시안의 분석 데이터에 집중했다.
가마의 바닥, 점토와 흑연의 결합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가 극도로 불균형했다.
`[경고: 흑연 비율 편중 72%. 점토 바인더 결합력 저하. 열팽창 차이로 인한 구조적 파열 위험도 89%]`
2화에서 개릭의 낡은 가마를 처음 보았을 때 진단했던 결함이, 고온 조업이 반복되면서 마침내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대로 쇳물을 부었다가는 가마 전체가 폭사하여 대장간은 물론이고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쇳물에 뒤덮여 비명횡사할 터였다.
롤랑은 품에서 양피지 조각을 꺼내 개릭의 거친 손에 쥐여주었다.
"망치질을 멈춰라, 개릭."
"예? 하지만 지금 쇳물을 굳히면……."
"이대로 가마를 가동하면 정확히 12분 뒤에 가마 바닥이 파열된다. 흑연 성분이 한쪽으로 뭉쳐 있어 열팽창율을 견디지 못하고 있어."
롤랑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차분했다.
"내가 적어둔 보강 공식을 봐라. 가마를 즉시 식히고, 점토와 흑연의 배합 비율을 정확히 6 대 4로 다시 맞추어라. 그리고 가마 외벽에 규격화된 수축 방지 철대 세 개를 120도 간격으로 덧대어 고정해라. 이 수치를 단 1밀리미터라도 벗어나면 가마는 터진다."
개릭은 롤랑이 건넨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그곳에는 기하학적인 도표와 함께, 가마를 보강하기 위한 극도로 정밀한 수치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전통적인 야장의 감각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학적이고 통계적인 수명 계산법이었다.
"이…… 이것이 가마를 살릴 법식이라는 말씀이오?"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강철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전용 도가니 제조법이다. 이 보강을 거쳐야만 우리가 원하는 고압의 철 파이프를 주조할 수 있다."
개릭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롤랑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즉시 조수들을 소리쳐 부르며 가마 보강 작업에 돌입했다.
롤랑은 벽에 기대어 서서 이명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머릿속의 통증이 점차 옅어지자, 그는 다시 대장간 테이블 위에 설계도를 펼쳤다.
그것은 단순한 철검의 설계도가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가 주조해야 할 진짜 무기다."
개릭이 다가와 설계도를 내려다보았다. 길쭉하게 뻗은 철제 원통과, 그 끝에 달린 조잡하지만 정교한 기계 장치.
"이건…… 화포의 축소판이요?"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 정확한 명칭은 '오스벨트식 머스킷 1형'이다."
롤랑은 손가락으로 설계도의 단면을 짚었다.
"기존의 조잡한 화승총은 화약 가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총열이 터지는 사고가 빈번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체계적 흙먼지 공정법을 도입한다. 철 파이프의 내경을 균일하게 연신하고, 점화공에는 열전도율이 높은 구리 관을 깊숙이 침투시켜 점화선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구리 관을 철 파이프 내부에 박아 넣는단 말이오? 그건 주조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까다롭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구리는 철보다 연성이 높아 가스 누출을 완벽하게 차단해 준다. 약실의 압력이 안정되면, 탄환의 사거리와 살상력은 기사의 갑옷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릴 수준으로 상승하지."
롤랑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기사들이 평생 동안 수련한 마력과 무예를, 마구간 바닥에서 염초를 긁어모으던 평민이 단 하루의 훈련만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다. 이것이 내가 이 땅에 가져올 새로운 규칙이다."
개릭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롤랑이 말하는 무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륙의 신분 질서와 영주들의 권위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파괴적인 혁명이었다.
"알겠소, 서기장 나리. 내 이 목숨을 걸고 가마를 고쳐서 말씀하신 구리 점화선 총열을 뽑아내 보겠소."
* * *
다음 날 오후, 오스벨트 행정관저의 집무실로 리디아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사색이 된 얼굴이 상황의 급박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서기장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롤랑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교단에서 보고서가 기각되었나?"
"아닙니다. 우리의 가짜 보고서는 사법서의 하급 관리들 선에서 성공적으로 계류되었습니다. 자스민 비누를 받은 관리들의 아내들이 아주 만족해하며 남편들의 깃펜을 붙잡아둔 덕분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지?"
"행정의 맹점입니다."
리디아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교단의 사법적 개입은 법리적으로 지연시켰지만, 세속 영주들의 탐욕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백작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무서 본대 소속의 상급 기사가, 영주의 직접적인 관인과 부패한 회계관들을 대동하고 방금 전 오스벨트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롤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들의 목적은?"
"백작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한 '영지 재산 보전령'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오스벨트의 모든 도가니 설비와 철강 생산 시설을 영주 가문의 직할 자산으로 강제 몰수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전면 봉인 도장단을 이끌고 이 관저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쿵, 쿵, 쿵.
리디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정관저 1층의 무거운 목제 문이 거칠게 걷어차이는 소리가 서기실까지 울려 퍼졌다.
철갑을 두른 기사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칠고 오만한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오스벨트의 서기장 롤랑 에르하르트는 당장 나와 영주님의 봉인장을 받들어라!"
롤랑은 천천히 만년필의 뚜껑을 닫아 포켓에 꽂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해맑고도, 지독하리만치 냉혹한 미소가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결국 법률보다 폭력이 먼저 문을 두드리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가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폭풍이 막 오스벨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