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리디아 폰 보이스트가 치켜든 가죽 두루마리는 오스벨트 영지 내에서 통용되는 합법적인 압수 수색 영장이었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영장 아래로 그녀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보였다. 가죽 장갑을 꼈음에도 굳은살이 박인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손이었다.

대장간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으나, 들이닥친 기병들의 서늘한 철갑 냄새가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개릭은 쥐고 있던 망치를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어 섰다. 서기장 롤랑과 가마 바닥을 뜯어내려던 은밀한 모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들통난 셈이었다. 개릭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굵은 땀방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화덕 바닥에 떨어져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기화했다.

롤랑은 허리를 굽혀 흙바닥에 떨어져 있던 양피지 조각을 주웠다. 개릭에게 건넸던 가마 보강 도면이었다. 그것을 가볍게 털어 품에 넣은 롤랑은 아무런 동요 없이 리디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잿빛 눈동자에는 두려움이나 당혹감 대신, 기계적인 고요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보이스트 가문의 행정 대리인께서 직접 이 누추한 대장간까지 발걸음을 하실 줄은 몰랐군.”

롤랑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리디아는 말에서 내려와 롤랑의 앞으로 세 걸음 다가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허리춤에 매달린 장검의 칼집과 무거운 장부 가죽 주머니가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선은 롤랑의 때 묻은 소매와 대장간 구석에 쌓인 조악한 철광석 더미를 예리하게 훑었다.

“에르하르트 서기장. 당신이 세무관 바쟁을 법률 조항으로 위협해 쫓아냈다는 소식은 들었다. 허나 내 앞에서도 그 얄팍한 말재주가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보이스트 가문은 오스벨트의 모든 세입과 철기 유통을 감시할 법적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리디아는 손짓으로 부하들에게 대장간 내부를 수색할 것을 명령했다. 두 명의 기병이 즉시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멈춰라.”

롤랑이 짤막하게 던진 한마디에 기병들이 멈칫했다. 지휘관인 리디아의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아야 했으나, 롤랑의 목소리에 담긴 기이한 압도감이 그들의 발을 묶었다.

롤랑은 리디아의 손에 들린 가죽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압수 조치는 영지 내에 명백한 재정적 손실이나 횡령의 혐의가 입증되었을 때만 발효된다. 리디아 경, 귀관이 들고 있는 세무 장부의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문제?”

리디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는 고압적인 태도로 품에서 낡은 대장을 꺼내 펼쳤다. 그것은 오스벨트 동부 서기실에서 작성된 단습식 정산법 기반의 세입 대장이었다.

“동부의 광산에서 채굴되는 원철의 양과 이곳 대장간으로 입고되는 양의 오차가 매월 15푼(약 15%)에 달한다. 또한, 대장간에서 소모되는 목탄의 대금과 실제 주조된 철기의 수량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서기실과 대장간이 결탁하여 철기를 밀매하고 있거나, 장부를 조작해 세금을 포탈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리디아의 주장은 정연했다. 그녀는 영지 내에서 가장 뛰어난 회계 실무자로 꼽히는 인물답게, 단식부기의 허점을 파고들어 롤랑을 압박했다.

롤랑은 리디아의 손에 든 장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공학적 투시안’을 기동하기 위한 이성이 꿈틀거렸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세한 통증과 함께 이명이 시작되었다. 삐이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성황청의 마력 감지기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마력 노이즈를 제어하며, 롤랑은 눈앞의 장부를 투시했다.

장부의 종이 질감, 잉크의 마모도,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숫자의 나열들이 3차원 수식 구조로 롤랑의 시야에 펼쳐졌다.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영지라는 유체의 흐름과 마찰계수처럼 가시화된 데이터로 변환되어 뇌리에 꽂혔다.

극심한 뇌 과부하가 찾아왔으나 롤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투시안을 끄고 차갑게 웃었다.

“15푼의 오차라. 리디아 경, 귀관은 그 숫자가 나와 개릭의 횡령 때문이라고 확신하는가?”

“장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세입과 세출의 단순 합산이 맞지 않는다면, 그 차액은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어리석군.”

롤랑의 단호한 평가에 리디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기병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말을 삼가라, 서기장. 무엄한 언동은 그 자체로 죄가 된다.”

“귀관이 신봉하는 그 단습식 정산법이야말로 영지를 좀먹는 가장 거대한 사각지대다.”

롤랑은 대장대 위에 놓인 석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개릭이 가마 온도를 기록하던 커다란 목판을 향해 걸어갔다. 목판에 묻은 그을음을 거칠게 문질러 지워낸 롤랑은 석필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세로선 두 개와 가로선 여러 개. 현대의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위한 계정 과목 표였다.

“차변(Debit)과 대변(Credit). 자산의 증가와 감소를 하나의 선상에서 단순 합산하는 귀관들의 방식은, 물질의 상태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물리적 마모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 하락을 숫자로 표현할 줄 모른다는 뜻이다.”

롤랑의 석필이 목판을 빠르게 긁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대장간의 적막을 깨트렸다.

“원철 100근을 가마에 넣으면, 불순물이 타들어 가고 슬래그로 배출되는 양이 정확히 8근이다. 단습식 장부에는 이 8근이 ‘사라진 횡령액’으로 기록된다. 또한, 대장간의 가마와 망치는 사용할 때마다 마모된다. 자산의 가치가 깎여 나간다는 뜻이다. 이를 백분율 감가상각(Depreciation)으로 계산해야 진짜 잔존 가치가 나온다.”

리디아는 롤랑이 목판에 적어 내려가는 생경한 수식들을 바라보았다.

좌측에는 원철의 유입과 자산의 증가가 기록되었고, 우측에는 그에 대응하는 부채의 감소와 자본의 변동이 대칭을 이루며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좌우의 합계가 0으로 수렴하는 기적적인 구조였다.

“이것이 복식부기다. 모든 거래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기록된다. 횡령자가 아무리 장부를 조작하려 해도, 이 대칭 구조를 깨트리지 않고서는 숫자를 맞출 수 없다.”

롤랑은 석필을 목판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제 귀관이 가져온 장부를 이 대칭식에 대입해 보지.”

롤랑은 리디아의 장부에서 지난 석 달간의 수치를 입으로 외우며 즉석에서 암산했다. 그의 뇌는 이미 현대 학술원의 정밀한 연산 장치처럼 구동되고 있었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심해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난달 발루아 백작의 세무관 바쟁이 수령해 간 군용 철검 대금 400골드. 단습식 장부에는 단순 지출로 기록되어 있지. 하지만 복식부기로 대입하면, 이 대금의 실제 현금 흐름과 원철 소모비 사이에 120골드의 공백이 발생한다. 이 공백은 어디로 갔는가?”

리디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바쟁이 영지 서기실의 허술한 단식 장부를 이용해, 매달 주조되지도 않은 유령 철검 50자루의 대금을 허위로 청구해 횡령한 것이다. 귀관의 장부가 가리키는 15푼의 오차는, 내가 아니라 백작의 세무관들이 빼돌린 뒷돈의 흔적이다.”

롤랑은 리디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었다.

“가장 이성적이고 철저하다는 보이스트 가문의 대리인이, 적들의 횡령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장부를 들고 나를 압수수색하겠다고 온 셈이군. 참으로 훌륭한 행정 실무다.”

침묵이 대장간을 지배했다.

개릭은 롤랑의 거침없는 설파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리디아의 부하 기병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리디아는 목판에 그려진 완벽한 수식의 대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생을 숫자와 장부를 다루며 살아왔다.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영지의 재정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 밤을 지새웠던 그녀였다. 그런 자신에게, 이 몰락한 서기장이 제시한 ‘복식부기’와 ‘감가상각’이라는 개념은 가히 혁명적인 충격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지의 재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의 도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리디아의 손가락 끝이 가죽 장부를 꽉 쥐었다. 자존심이 짓밟힌 굴욕감보다,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경외감과 실리적인 계산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수식은, 어떻게 고안한 것인가?”

리디아의 목소리에서 조금 전의 고압적인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기하학과 물리적 보존 법칙을 재정에 대입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가 변할 뿐이지. 돈 역시 물질의 흐름이기에 예외는 없다.”

롤랑은 팔짱을 끼며 리디아를 내려다보았다.

“귀관이 진정으로 보이스트 가문의 재건을 원하고, 이 영지의 고사를 막고 싶다면 나와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이 정산법을 사용하면, 발루아 백작과 그의 세무관들이 영지에서 합법적으로 뜯어가던 모든 지출을 세무적으로 고사시킬 수 있다.”

리디아는 침묵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산서가 빠르게 굴러갔다.

롤랑의 제안은 위험했다. 백작의 세무 세력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 복식부기와 합법적인 세무 장벽을 구축한다면, 백작의 군사적 압박조차 재정적 굶주림으로 받아칠 수 있었다. 힘없는 변경의 영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좋다.”

리디아는 마침내 장부를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에르하르트 서기장.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보이스트 가문의 이름으로 이 대장간의 조업권을 보장하겠다. 세무관 바쟁의 압수 요구는 내가 행정적으로 반려하겠다.”

그녀는 기병들에게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삼엄했던 포위망이 순식간에 풀렸다.

리디아는 롤랑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신의 이 비상한 머리와 기술은 성령 교단의 눈에 띄면 즉시 화형감이다. 하지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녀는 품 안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고대의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가문의 비밀 문서 보관소에서 겨우 찾아낸 것이었다.

“이것은 제국력 842년, 성령 교단과 동부의 영주들이 조인했던 ‘동부 오스벨트 자치 면책 특권 세칙’의 필사본이다. 당시 교단은 동부의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는 대가로, 이곳에서 주조되는 철기와 화학적 정제물에 대해 한시적인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롤랑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정결령의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교단 스스로가 제정한 법률의 틈새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누나 염전, 그리고 당신이 구상하는 철기 공정조차 이 세칙의 조항을 역이용하면 교단의 ‘정결령’ 사법권에서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먼지 낀 고문서에 불과하지만, 법리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훌륭한 무기로군.”

롤랑은 양피지를 받아 들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로써 법리적 방패와 재정적 검이 모두 갖춰졌다. 이 버려진 황무지 오스벨트에서, 그가 구상하는 이성과 과학의 자치령을 세울 주춧돌이 놓인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장간 마당으로 한 필의 전령마가 거품을 물며 달려 들어왔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린 전령의 등 가죽에는 발루아 백작가의 붉은 인장이 찍힌 서한 통이 매달려 있었다.

전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롤랑의 앞으로 기어 와 서한을 바쳤다.

“서, 서기장 롤랑 에르하르트! 백작 각하의 비공식 급전령입니다!”

리디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롤랑은 침착하게 서한 통을 열어 양피지를 꺼냈다. 붉은 밀랍으로 찍힌 백작의 직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한을 읽어 내려가는 롤랑의 눈빛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동부 서기장 롤랑 에르하르트는 들으라. 최근 국경 지대의 야만인 전선이 급박해짐에 따라, 군수 물자의 조달이 시급하다. 이 서한을 수령한 날로부터 3주 안에, 백작령 표준 규격의 최고급 중장 철검 200자루를 주조하여 본 성으로 납품하라. 기한을 단 하루라도 어기거나 수량이 부족할 시, 서기직 파면은 물론 대장간의 모든 설비를 몰수하고 관련자 전원을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다.]

3주에 200자루.

제대로 된 제철 가마조차 없는 이 척박한 오스벨트의 가내수공업 수준으로는 반년이 걸려도 불가능한 수량이었다. 게다가 '최고급 중장 철검'이라는 조건은, 불순물이 잔뜩 섞인 동부의 원철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수치였다.

명백한 함정이자, 롤랑과 개릭을 합법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한 백작의 독수(毒手)였다.

개릭은 롤랑의 어깨너머로 서한의 내용을 전해 듣고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주저앉았다.

“3주에 200자루라니…… 그것도 최고급 철검을? 이건 죽으라는 소리요! 우리 대장간의 가마로는 불순물을 거르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리디아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롤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결국 본색을 드러냈군. 바쟁의 보고를 받고 당신을 단숨에 찍어 누르려는 속셈이다. 롤랑,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금이라도 가문의 기병들을 동원해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지만…….”

롤랑은 서한을 천천히 접어 품에 넣었다.

그의 시선이 대장간 구석, 아직 뜯어내지 못한 낡은 가마 바닥으로 향했다. 점토와 흑연의 비율이 엉망이라 당장이라도 파열할 것 같은 그 조악한 가마가 그의 ‘공학적 투시안’을 통해 붉은색 경고 수치를 뿜어내고 있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고강도 탄소강을 주조할 수 있는 독자적인 도가니(Crucible) 공정을 완성할 때가 온 것이다.

“3주라.”

롤랑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걸렸다.

“백작이 직접 자신의 목을 칠 단두대의 칼날을 주문했군. 개릭, 당장 망치를 들어라. 가마 바닥을 뜯어내고, 진짜 강철을 만들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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