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람에 실려 온 양피지 조각들이 어두운 협곡의 자갈밭 위로 가볍게 흩어졌다.
성령 교단의 요한 사제가 이단을 정화하겠다는 광기 어린 선언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직후였다. 그들이 타고 간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며 협곡에는 오직 차가운 대기의 흐름과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리디아 폰 보이스트는 발밑으로 굴러온 찢어진 조약 사본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백석염의 하얀 가루가 묻은 양피지 조각에는 교단의 붉은 인장 흔적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사본은 찢겼고, 이제 저들은 법률 가방 대신 이단 심판관들의 정화용 화염을 들고 올 것입니다.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디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그녀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롤랑은 놓치지 않았다.
롤랑은 공학적 투시안을 해제했다. 망막을 가득 채우던 푸른색 열역학 수치들과 구조 분석 선들이 연기처럼 사라지자, 극심한 이명과 함께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곁에 서 있던 마차의 바퀴축을 짚었다. 차가운 무쇠의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타들어 가는 뇌 세포를 겨우 식혀 주었다.
"상관없습니다."
롤랑은 부축하려 손을 뻗는 리디아를 눈빛으로 제지하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요한 사제가 찢어발긴 것은 한낱 복사본에 불과합니다. 진짜 조약은 이미 봉인되었습니다."
그의 시선이 리디아의 품에 안긴 가죽 가방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리디아가 영지 몰락 전, 가문의 깊숙한 비밀 문서고에서 수십 년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찾아냈던 진짜 원본이 들어 있었다. 바로 '842년 조인된 동부 오스벨트 자치 면책 특권 세칙'이었다.
과거 성령 교단 스스로가 대륙 동부의 척박한 불모지를 개간하기 위해 영주들과 맺었던 이 고대 면책 특권 협약은, 교단이 합법적으로 오스벨트의 자치권을 침해할 수 없도록 묶어두는 절대적인 족쇄였다. 교단이 아무리 이단 심판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한들, 이 원본 문서가 대륙 법정에 제출되는 순간 그들의 군사 행동은 불법적인 침략으로 규정될 터였다.
"그 고문서야말로 우리가 쥘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패입니다. 하지만 방패만으로는 적의 목을 벨 수 없지요."
롤랑의 건조한 어조에 리디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죽 가방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때, 협곡 입구의 짙은 어둠 속에서 거친 가뿐 숨소리가 들려왔다. 보초를 서던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철제 장비를 치켜들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누구냐!"
"멈춰라! 더 오면 쇠꼬챙이 맛을 보여주겠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러낸 것은 뜻밖에도 남루한 사냥꾼 차림의 사내였다. 사내는 무릎을 꿇으며 가슴팍에서 밀밀히 봉인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서기장 나리…… 헤르만 님께서 보내신 전령입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공포와 피로로 젖어 있었다.
롤랑은 사내를 가까이 오게 했다. 가죽 주머니를 받아 열어보니, 안에는 세무관 헤르만의 친필 서명이 담긴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은밀하게 도포된 자스민 향이 서늘한 가을 밤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발루아 백작령의 세무 관리인 헤르만이 이토록 위험한 배반을 감행한 이유는 명확했다. 롤랑이 그의 탐욕스러운 아내에게 조공으로 바친 최고급 자스민 향 자치령 비누 세트 덕분이었다.
탄산나트륨을 결합하여 가공한 그 비누는, 척박한 동부 변경의 귀족 부인들에게 단순한 세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의 정결함을 몸에 두르는 신성한 사치품이자, 타 영지 부인들 앞에서의 권력을 증명하는 유일한 도구였다. 아내의 빗발치는 성화와, 롤랑이 귓속말로 약속한 향후 소금 및 비누 유통망의 사적 지분 분할 계약은 완고하던 세무관을 철저한 내부 첩자로 변절시키기에 충분했다.
롤랑은 등불 빛에 의지해 밀서의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등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기습이군요."
리디아가 밀서를 훔쳐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예상보다 빠릅니다. 발루아 백작의 사병단이 가문을 가린 채, 오늘 자정을 기해 오스벨트의 동부 대장간을 기습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명분은 '허가받지 않은 야금로 가동에 대한 불법 기소 및 강제 집행'입니다."
현재 시각은 밤 아홉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백작의 정예 기병과 보병 혼성 부대가 협곡을 우회하여 대장간을 들이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세 시간뿐이었다.
"백작은 파산 직전입니다. 중앙 금융 가문과 교단의 압박에 쫓긴 나머지, 우리 오스벨트의 염전과 철강 생산 시설을 통째로 강탈해 숨통을 트려는 속셈이겠지요."
롤랑은 밀서를 등불 불꽃에 가져갔다. 양피지가 붉은 불꽃에 휩싸이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대장간으로 가야겠습니다. 개릭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오스벨트 제1 대장간의 내부는 거대한 용광로의 잔열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라면 쇠망치 소리로 가득했을 공간에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개릭 아이언피스트는 대장간 중앙의 거대한 목재 작업대 위에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롤랑을 맞이했다.
"서기장 나리, 오셨습니까."
개릭의 거친 손이 작업대 위에 놓인 커다란 참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안개 낀 달빛 아래에서 검붉게 그을린 강철 총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참나무 개머리판과 정밀하게 맞물린 쇠붙이들. 그것은 오스벨트의 장인들이 피와 땀을 흘려 완성한 '오스벨트 1형 화승총' 20자루였다.
"마침내 조립을 끝냈습니다. 나리가 가르쳐 준 수치대로 깎아내느라 늙은이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개릭이 투덜거렸지만, 그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이 정밀한 무기들이 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롤랑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과거 개릭의 낡은 가마 바닥은 점토와 흑연의 비율이 불균형하게 편중되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파열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롤랑은 공학적 투시안으로 이를 진단하고, 가마 벽면에 직접 정확한 재료 배합비와 보강 공식을 적어두었다.
그 처방에 따라 재건된 강철 전용 도가니는 마침내 불순물이 극소화된 고강도 연철을 생산해 낼 수 있었고, 이는 화약의 가스 압력을 견뎌내는 질긴 총열을 주조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가마가 터지지 않았기에, 총열 역시 터지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롤랑은 상자에서 화승총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철의 무게가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장인들과 가내 포수들을 모으십시오."
롤랑의 명령에 따라, 대장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사냥으로 잔뼈가 굵은 포수들이거나,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온 오스벨트의 주민들이었다.
롤랑은 그들 앞에 화승총을 내려놓았다. 그는 거창한 이념이나 영지민의 해방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이 무기는 너희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너희가 매일 아침 공급받는 깨끗한 소금과, 너희 아이들의 피부병을 낫게 해 준 보건 비누를 지키기 위한 도구다. 발루아 백작의 군세가 이 문을 넘어오는 순간, 너희의 염전은 파괴될 것이고 비누 가마는 몰수될 것이다. 다시 굶주림과 역병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무기를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쳐라."
사내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영주의 권위나 교단의 법률에는 굴복할지언정, 자신들의 생명줄인 소금과 비누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실질적인 생계의 끈이 그들을 하나의 군대로 묶어세우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서기장 나리."
한 젊은 포수가 침을 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장전법을 배운다."
롤랑은 총을 분해하며 동작을 단위별로 나누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화약 주머니에서 규격화된 종이 튜브를 꺼낸다. 이 안에는 정확히 일정한 양의 화약과 납탄이 들어 있다. 이빨로 튜브의 끝을 뜯어라."
롤랑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화약을 총구에 붓고, 종이껍질과 납탄을 통째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소총 소탕봉으로 세 번, 강하게 내리쳐 다진다. 하나, 둘, 셋.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이다."
사내들은 화승총의 생소한 구조에 긴장했으나, 롤랑이 지시하는 분업화된 동작은 지극히 직관적이었다. 장전, 다지기, 화약접시 개방, 점화약 주입, 화승 장착. 복잡한 기하학 공식을 가르치는 대신, 몸으로 외우는 단순한 반복 숙달이 대장간 내부를 채우기 시작했다.
***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차 없이 흘러갔다.
롤랑은 대장간을 나와 기습 예상 경로인 진마 가도의 가파른 협곡 입구로 향했다. 안개가 대지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롤랑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공학적 투시안.'
망막 너머로 푸른색 광선이 뿜어져 나오며 대기를 왜곡했다. 뇌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이명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통증이 엄습했다. 롤랑의 코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성황청의 마도구가 감지할 수 있는 특이 마력 노이즈가 주변 공기 속으로 날카롭게 방출되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
이 통증 속에서도 롤랑의 이성은 차갑게 작동했다. 그는 문득 지난번 정제 가마 내부를 투시하던 중, 유황 가스가 고농도로 방출되는 지점에서는 성황청의 마력 감지기 노이즈가 심하게 교란되어 먹통이 되었던 현상을 떠올렸다.
'이 마력 노이즈는 약점이자 기회다. 교단 심문단이 이 흔적을 쫓아온다면, 다량의 유황 연기를 이용해 그들의 추적기를 역으로 교란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은 그 생각을 머릿속 한편에 각인해 두고, 눈앞의 화승총들을 훑었다.
투시안의 격자선들이 20자루의 총열 내부 구조를 3D 모델로 시각화했다. 미세한 주조 기포의 위치와 강철의 두께 편차가 수치로 환산되어 나타났다.
롤랑은 주머니에서 하얀 초크를 꺼냈다. 그리고 개별 총열의 관 전단에 각각 다른 위치로 가로선을 그었다.
"이 총은 화약 충전 한계가 이 선까지다. 이 총은 이 선이다."
그는 대장장이들에게 초크 선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각 총열의 인장 강도가 미세하게 다르다. 내가 표시한 초크 선을 넘겨 화약을 넣는 순간, 가스 압력이 한계를 초과하여 총열이 파열될 것이다. 네 손목을 잃고 싶지 않다면, 정확히 이 선까지만 화약을 채우도록 해라."
대장장이들은 경외감 어린 눈으로 표시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철의 미세한 결함들을, 이 젊은 서기장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어 롤랑은 진마 가도의 좁은 협곡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도의 폭은 불과 여덟 장(丈)에 불과했다. 기병이 대열을 정비해 돌격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한 지형이었다.
롤랑은 주머니에서 몇 개의 기하학적 수치가 적힌 나무못을 꺼냈다. 그는 직접 가도 바닥으로 내려가 걸음을 옮기며 나무못을 박기 시작했다.
"여기, 그리고 다섯 걸음 뒤에 여기."
나무못과 나무못 사이를 굵은 노끈으로 연결하자, 협곡의 입구를 가로지르는 정교한 사선(射線)이 형성되었다.
"포수들은 이 노끈 뒤로 도열한다. 첫 번째 줄은 사격 후 즉시 좌측 벽면으로 퇴각하여 장전한다. 두 번째 줄은 그 공간을 메우며 앞으로 전진해 사격한다. 기하학적인 교대 사격이다. 적의 기병이 이 협곡의 꺾임각에 진입하는 순간, 우리의 유효 사거리는 정확히 마흔 걸음이 된다."
롤랑의 지시는 수학적으로 정밀했고, 행동 지침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가내 포수들은 거창한 애국심이나 이념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해 준 소금과 비누를 지키기 위해, 롤랑이 박아둔 나무못 라인을 따라 묵묵히 정렬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화승총의 화승 끝에서 붉은 불꽃이 서서히 타들어 가며 어둠 속에 작은 점들을 수놓았다. 중세의 야만적 전장에, 최초로 규격화되고 통제된 기술적 대열이 들어서는 장엄한 순간이었다.
리디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롤랑의 냉혹한 공리주의적 계산은, 무지한 민초들을 순식간에 가장 이성적이고 치명적인 병사들로 탈바꿈시켜 놓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안개는 더욱 짙어져 사방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협곡 전체가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겼다. 오직 화승이 타들어 가며 내는 미세한 매캐한 냄새만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그때였다.
*딸랑, 딸랑…….*
안개로 가득 찬 협곡 너머, 굽이진 모퉁이 깊은 곳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군마들의 콧김 소리와, 가문의 문양을 검은 천으로 은폐한 기병들의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말목에 달린 방울이 흔들릴 때마다 차가운 금속음이 허공을 찢고 고고하게 메아리쳤다.
롤랑의 시선이 어둠과 안개 너머, 첫 번째 나무못이 박힌 사거리를 향해 천천히 고정되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조용히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