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대원이 건넨 서신은 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성령 교단 동부 교구의 인장, 칼날을 감싸 쥔 성스러운 손 형상이 선명하게 찍힌 문양이었다. 오스벨트 외곽 초소에서부터 헐떡이며 달려온 청년의 가슴팍이 격렬하게 들썩이며 가죽 갑옷의 이음새를 긁어댔다.
"성령 교단 동부 교구의 칼렌 대주교가 보낸 무장 심문 기사단입니다! 이단 혐의자를 압수수색하겠다는 정결령 특별 집행장을 앞세우고, 지금 오스벨트 협곡 관문으로 접근 중입니다! 그들의 마력 감지기가 이 지역에서 비정상적인 마력 노이즈를 감지했다고 합니다!"
민병대원의 보고가 끝난 집무실 안에는 차가운 밀도가 들어찼다. 리디아 폰 보이스트의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제국 세무관 헤르만의 기밀 봉투를 응시했다. 사흘 뒤 들이닥칠 발루아 백작의 정예 소총 부대뿐만 아니라, 당장 오늘 밤 오스벨트의 관문을 허물고 들어올 교단의 사냥개들까지 겹친 형국이었다. 양방향에서 조여오는 올가미였다.
"서기장님, 마력 노이즈라면……."
리디아가 목소리를 낮추며 롤랑을 바라보았다. 롤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오른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공학적 투시안을 구동할 때마다 관자놀이를 찌르던 이명과, 대기 중으로 흩어지던 미세한 마력의 파동을 떠올렸다. 물리적 한계를 정밀하게 수치화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빠르게 청구되었다. 성황청의 마도구는 생각보다 예민했고, 영지의 봉쇄망은 허술했다.
"헤르만에게 무상으로 건넨 자스민 비누 세트가 제값을 하기도 전에 판이 깨지게 생겼군."
롤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헤르만의 아내를 포섭해 영주군의 침공 경로를 알아낸 것은 훌륭한 성과였으나, 교단의 등장은 계산을 한 단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군대를 소집할까요? 대장간의 개릭에게 연락하면 가마를 지키던 장정 백여 명은 즉시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식 기사들입니다, 리디아. 훈련받지 않은 민병대로 은빛 갑옷을 입은 무장 심문단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백 년 동안 다듬어진 살인 기계들을 상대로 무력을 쓰는 것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최악의 선택입니다."
롤랑은 벽면의 서가로 걸어가 두꺼운 가죽 표지의 법률 서적을 꺼냈다. 그리고 리디아의 품에 안겨 있던 가죽 가방을 가리켰다.
"3화에서 그대가 가문의 비밀 금고에서 찾아낸 고문서를 꺼내십시오."
리디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열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두루마리 원본을 꺼냈다. '842년 조인된 동부 오스벨트 자치 면책 특권 세칙'이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가장자리가 바스러진 양피지 위에는 고대 제국어와 성령 교단의 공용 서명이 겹쳐져 있었다.
"이것으로 저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법 위에 군림하는 자들입니다."
"그 신의 이름으로 서명한 조약입니다. 교단은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이 제정한 고대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준비하십시오. 협곡 관문으로 갑니다."
롤랑은 집무실을 나서며 외투를 걸쳤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협곡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대지를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
* * *
마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오스벨트 북쪽 협곡 관문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롤랑은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며 머릿속의 정보들을 재정리했다.
기술은 단계적으로 축적되어야만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다. 2화에서 개릭의 대장간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의 조업 가마는 붕괴 직전의 시한폭탄과 같았다. 당시 가마 바닥의 점토와 흑연 비율은 7:3으로 심각하게 편중되어 있었다. 고온의 쇳물이 닿으면 열팽창 계수의 차이로 인해 도가니 전체가 파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롤랑은 당시 공학적 투시안을 가동하여 가마 내부의 균열과 성분비를 실시간으로 진단했었다. 그리고 흑연의 비율을 정확히 42%로 조정하고 점토와 규사를 조율하는 보강 공식을 가마 벽면에 석탄으로 적어두었다. 개릭은 그 공식을 신의 계시처럼 따랐고, 가마는 단 한 번의 파열도 없이 고강도 철검 200자루를 완벽하게 뱉어냈다.
그 기술적 승리가 있었기에 오스벨트의 장인들과 백성들은 롤랑을 단순한 서기장이 아닌, 자신들의 생명과 생계를 책임지는 영도자로 믿기 시작했다. 지금 그 믿음의 결실을 수확할 시간이었다.
관문에 도착하자, 횃불 불빛 아래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른 명 남짓한 규모였으나, 그들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관문을 지키던 민병대원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사단의 선두에는 붉은 사제복 위에 은색 흉갑을 덧댄 사제, 동부 교구의 심문관 요한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빛을 발산하는 마력 감지기가 들려 있었다.
"멈추어라!"
리디아가 마차에서 내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손에는 제국 수석 법률 서적과 842년의 고문서 원본이 들려 있었다.
"이곳은 동부 오스벨트 자치령의 관할 구역이다. 성령 교단의 무장 병력이 영지 의회의 사전 승인 없이 무단으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제국법 위반이다!"
요한 사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리디아와 그녀의 뒤에 선 롤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력 감지기가 롤랑을 향해 격렬하게 회전하며 윙윙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단 혐의자가 눈앞에 있거늘 법을 논하는가."
요한이 말머리를 돌리며 채찍을 들어 올렸다.
"성령 교단은 정결령에 의거하여, 악마의 오염을 전파하는 자를 현장에서 체포하고 심문할 권한을 가졌다. 신성한 의무를 방해하는 자 역시 이단 동조자로 간주하여 처단할 것이다. 길을 비켜라, 몰락한 가문의 계집아."
"무엄하도다!"
리디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두루마리를 높이 쳐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협곡의 가파른 절벽을 타고 공명했다.
"842년, 성황 레오 3세와 오스벨트 자치 의회가 체결한 자치 면책 특권 세칙 제4조 2항을 낭독하겠다! '중앙 소속 교단 검찰 및 무장 심문단은 관문 자치 의회의 공식 소집 영장 없이는 오스벨트 영내에서 수색 영장을 자력으로 집행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할 시, 교단은 영지에 대한 모든 십일조 청구권을 영구히 상실하며, 영지민은 교단의 사법권에 불복종할 정당한 권리를 가진다'!"
요한 사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들고 있던 마력 감지기의 회전이 둔해졌다.
"그따위 수백 년 전의 낡은 종이 쪼가리가 신의 군대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종이 쪼가리에는 성황청의 옥새와 당시 동부 교구장이었던 성 안셀모의 친필 서명이 박혀 있습니다."
이번에는 롤랑이 나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흔들림이 없었고, 목소리는 법정의 판사처럼 건조했다.
"교단이 스스로 서명한 계약을 부정하는 순간, 성황청이 지탱하고 있는 모든 조약과 봉토권의 정당성은 붕괴합니다. 발루아 백작조차 이 조항 때문에 우리를 합법적으로 건드리지 못해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이 법을 먼저 깨뜨린다면, 우리는 내일부터 성황청으로 향하는 소금과 철의 보급을 전면 중단할 것입니다. 법리적 계약은 쌍방의 신뢰 위에 존재하니까요."
"이단자가 감히 신성한 교단을 협박하는구나!"
기사단장인 기욤 경이 격분하여 검을 뽑아 들었다. 은백색 검날이 밤하늘의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법률 따위는 검 끝 끝자락에서 부서지는 법이다. 기사단, 전진하라! 방해하는 자들은 모두 베어라!"
기사들의 군마가 일제히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협곡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횃불이 동시에 켜졌다. 하나, 둘, 열, 백, 그리고 수천 개에 달하는 불꽃들이 협곡의 가파른 사면을 가득 메웠다.
"누구를 벤다는 말이냐!"
대장간의 개릭이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멘 채 선두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가죽 앞치마를 두른 장인들, 괭이와 곡괭이를 든 염전 노동자들, 그리고 롤랑이 배급한 저가 소금과 보건 비누로 목숨을 건진 수만 명의 영지민들이 숲을 이루며 걸어 나왔다. 그들의 눈빛에는 굶주림과 역병에서 벗어난 자들 특유의 독기와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수만 명의 민초들이 인간의 장벽을 이루며 기사단을 사방에서 포위 압박하기 시작했다. 좁은 협곡은 순식간에 거대한 인간의 덫으로 변했다.
기욤 경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정예 기사들이라 해도,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좁은 협곡에서 수만 명의 흥분한 군중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롤랑은 조용히 공학적 투시안을 발동했다.
'구동.'
*위이이잉-*
귀를 찢는 듯한 이명과 함께 관자놀이에 극심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뇌 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롤랑의 시야가 푸른빛의 구조적 수치들로 가득 찼다.
기사단이 장비한 제국 표준형 은도금 강철 방패들의 격자 구조가 입체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했다.
[대상: 제국식 기사용 원형 방패] - 재질: 저탄소강 (탄소 함량 0.18%) - 두께: 2.4mm - 구조적 결함: 중앙 보스 접합부의 응력 집중 (피로 한계치: 120MPa) - 파쇄 한계 가중치: 상단 좌측 45도 방향으로 850N의 충격 가해질 시 72% 확률로 전면 파열 가능.
롤랑은 고통으로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신체 반응을 억제했다. 그의 눈에서 흐른 미세한 핏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안색은 대리석처럼 차가웠다.
"기욤 경."
롤랑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하학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당신들이 든 방패는 아름답지만, 중앙 접합부의 탄소 함량이 부족해 저기 장정들이 든 광산용 곡괭이로 세 번만 내리치면 유리창처럼 깨질 겁니다. 관절 부위의 가죽 끈 역시 저온에 노출되어 인장 강도가 40% 이상 저하되어 있군요. 이 협곡에서 싸움이 시작된다면, 당신들은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열역학과 구조역학이 가리키는 확실한 결과입니다."
요한 사제는 롤랑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푸른 빛과, 그의 몸 주변에서 왜곡되는 대기의 파동을 똑똑히 보았다. 마력 감지기는 이미 과부하로 인해 붉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단…… 확실한 이단의 증좌다! 저 눈을 보아라!"
요한이 소리쳤지만, 기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싼 수만 명의 민초들이 들고 있는 철제 도구들이 횃불 빛을 받아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해 준 서기장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법리적인 족쇄와 물리적인 장벽.
두 가지 울타리가 성령 교단의 무소불위의 권위를 완벽하게 가두어 버린 순간이었다.
요한 사제는 이가 갈리는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는 리디아의 손에 들려 있던 오스벨트 조약 사본을 거칠게 빼앗았다.
*찌이이익!*
양피지가 두 갈래로, 그리고 수십 조각으로 찢겨 밤바람에 흩날렸다.
"이깟 종이 쪼가리로 신의 정화 작업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요한이 롤랑을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동부 오스벨트의 서기장 롤랑 에르하르트! 오늘의 이 모욕은 잊지 않겠다. 다음 번 우리가 이곳을 찾을 때는 법률 가방 대신 이단 심판관들의 정화용 화염을 들고 올 것이다! 대주교님의 명에 따른 완전한 정화 전쟁이 될 것이다!"
요한은 말을 돌려 협곡 너머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기욤 경과 무장 기사단 역시 분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은빛 군세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협곡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리디아가 바닥에 떨어진 조약의 파편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사본은 찢겼고, 이제 교단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롤랑은 공학적 투시안을 해제했다.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뇌를 찌르는 통증에 중심을 잃을 뻔했으나, 이내 리디아의 부축을 거절하며 똑바로 섰다.
"원본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전쟁을 선포했다면, 우리 역시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겠지요."
롤랑은 협곡 입구를 바라보았다. 사흘 뒤면 발루아 백작의 소총 부대가 이 길을 통해 들어올 것이고, 그 뒤에는 교단의 대군이 들이닥칠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기술의 계몽은 이제 생존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