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X년 10월 14일 14시 45분. 서울지방경찰청 제1취조실. 북위 37.5721, 동경 126.9754.]
"벌써 많이 잊어먹었지, 강태혁?"
서준희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비늘을 터는 듯한 얇은 웃음소리가 밀실을 채웠다.
"네 머릿속에서 아현의 얼굴이 지워지는 맛이 어때?"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태혁의 귓가에서 높은 주파수의 이음이 발생했다. 삐이이-. 고막을 찢는 소음과 함께 관자놀이가 찌르르 울렸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오른손 끝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감각의 소실이었다. 아현의 둥근 턱선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지우개로 문지른 것처럼 경계가 뭉개졌다. 태혁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입술 틈새로 비릿하고 붉은 액체가 새어 나왔다. 그는 비틀거리며 철제 책상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상체가 무겁게 꺾였다.
"강 형사!"
하태수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태혁의 왼손은 테이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테이블 밑바닥, 보이지 않는 틈새. 거기에는 얇은 구리선과 소형 송신 장치가 붙어 있었다. 임유진이 미리 장치해 둔 물리적 우회로였다. 태혁은 굳어가는 오른손을 억지로 누르며 왼손가락으로 송신 장치의 금속 핀을 세 번 두드렸다. 톡. 톡. 톡. 신호가 넘어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지독한 냄새가 들이쳤다. 골든핑거의 발작이었다. 서준희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콧속을 찌르는 공감각적 잔상이 뇌신경을 강타했다.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향취였다. 탄내와 뒤섞인 복숭아꽃 향기. 10년 전 그날 밤, 아현의 시신이 발견된 방화 현장에서 풍기던 그 냄새였다.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태혁의 뇌 주름 사이로 실체적 진실이 인쇄되듯 박혔다. 서준희가 범행 현장에 남겨둔 방화용 촉진제. 일반적인 석유계 용제가 아니었다. 메틸 살리실레이트와 복숭아 향 정유를 배합한 특수 화합물. 조서에는 단순 '유기용제 잔류물'로 기록되어 있던 무색의 액체. 그 모순의 냄새가 태혁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태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서준희를 노려보았다.
"너였군."
태혁의 목소리가 긁혀 나왔다.
"그 냄새. 밤 복숭아나무 아래서 나던 타르 냄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강 형사님?"
준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요는 없었다. 단지 유희를 즐기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태혁은 이미 연산을 끝마쳤다. 그가 흘린 피가 조서의 흰 종이 위로 툭, 떨어졌다. 서준희가 제시한 노란 봉투. 그 안에 든 10년 전 강아현 사건의 원본 조서. 태혁은 그것을 응시했다. 누락된 숫자 14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처럼 깜빡였다. 동시에 유진이 수거했던 깨진 실버 펜던트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명처럼 겹쳐 들렸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태혁이 설계한 역전의 타이밍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
[14시 50분. 서울지방경찰청 2층 프레스룸.]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니터로 쏠렸다. 단 하나의 메일이 수사기자단 전용 포럼에 수신되었기 때문이다. 발신인은 익명. 제목은 '감찰팀의 취조실 오디오 조작 실태 및 강태혁 자백 강요 원본 파일'. 첨부된 데이터는 방대했다. 하태수 팀장이 취조실 제어실에서 오디오 이퀄라이저를 조작해 태혁의 목소리 톤을 변조하는 로그 기록. 그리고 실시간으로 왜곡되고 있던 음성 편집 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두 임유진이 태혁의 원격 프로그래밍 코드를 받아 실행한 결과물이었다. 기자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거 진짜야?" "감찰팀이 조서를 실시간으로 위조하고 있었다고?"
프레스룸이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송고되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 메인이 붉은색 헤드라인으로 도배되었다. [단독] 감찰팀, 연쇄살인 수사관 표적 감찰…음성 조작 정황 포착. 수사본부의 여론이 단 5분 만에 뒤집혔다.
***
[14시 55분. 서울지방경찰청 제1취조실.]
쿵! 취조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반사적으로 하태수가 고개를 돌렸다. 문앞에 서 있는 인물은 감찰차장 김성식이었다. 그의 얼굴은 흙빛을 넘어 검푸르게 죽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실시간 속보가 떠 있는 태블릿이 쥐어져 있었다.
"하태수."
김성식의 목소리가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차장님, 이건 음해입니다! 강태혁 저놈이 외부와 내통해서—" "입 닥쳐!"
김성식이 태블릿을 철제 테이블 위로 내팽개쳤다. 강한 마찰음이 취조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화면에는 하태수가 제어 콘솔을 만지는 CCTV 캡처본과 조작된 오디오 파형 분석도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디지털 증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태수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본청 지시다."
김성식이 차갑게 선언했다.
"하태수 팀장 및 감찰팀 전원은 이 시간부로 수사 권한을 박탈당한다." "차, 차장님!" "보안과장! 하 팀장의 무장과 신분증을 즉시 회수해."
대기하고 있던 보안과 직원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하태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하태수의 허리춤에서 권총과 수갑이 압수되었다. 그의 상징과도 같던 푸른 다이얼의 손목시계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차갑게 번쩍였다. 하태수는 끌려 나가면서도 태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태혁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단 한 사람, 서준희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강태혁 경정."
김성식이 태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불신과 경계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대안은 없었다. 외부 언론의 화력이 청사 내부를 직격한 이상, 수사 주도권을 돌려놓아야만 했다.
"본 사건의 주관 심문권을 네게 임시로 반환한다." "감사합니다."
태혁이 건조하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의 고양감 따위는 없었다. 오직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의 냉혹함만이 남아 있었다. 김성식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취조실을 나갔다. 철문이 다시 닫혔다. 철컥. 밀실에는 이제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
***
태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무릎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머릿속의 고통은 잔잔한 해일처럼 여전히 뇌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현의 목소리.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의 멜로디가 완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의 영토가 한 평 더 좁아졌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완벽한 주도권이었다.
태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수사본부와 언론사 스트리밍 채널로 직접 연결되는 공개 마이크였다. 그는 마이크를 서준희의 코앞까지 밀어붙였다. 금속 마이크 헤드가 준희의 셔츠 깃에 닿아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자, 서준희."
태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서늘했다.
"네가 작성한 모방 진술서 제3조." "피해자의 사망 시각과 발견 장소의 불일치." "그것부터 시작하지." "여전히 날카로우시네요."
준희가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외부의 차단망이 무너지고 생중계가 시작되자, 그의 여유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판이 태혁의 기습적인 언론 투하로 통째로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날 밤, 마포구 폐공장."
태혁이 조서의 특정 문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네 진술서에는 '타는 냄새가 진동하여 접근하기 어려웠다'고 되어 있지." "맞습니다. 불이 아주 크게 났으니까요." "거짓말."
태혁의 단호한 선언에 준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현장은 방화가 아니었어." "무슨…?" "방화용 촉진제로 위장한 살포 작업이었지. 네가 사용한 물질은 타르가 아니라 메틸 살리실레이트 배합물이다."
태혁이 상체를 더 밀착시켰다. 그의 호흡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동생 아현이 죽던 날 밤에도 넌 같은 물질을 썼어." "그 냄새는 불에 타서 나는 게 아니라, 증거를 인위적으로 부식시키기 위해 뿌린 화학 약품 냄새다." "네가 진짜 방화범이라면, 진술서에 '탄내'라는 주관적 형용사를 쓰지 않았을 거다." "넌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그 냄새가 나도록 '설계'했을 뿐이니까."
준희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의 호흡이 불규칙하게 변했다. 태혁의 시각적 환영 속에서, 준희가 노란 통을 들고 차가운 바닥에 액체를 뿌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겹쳐졌다. 복숭아꽃 향기가 취조실 안을 가득 메우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완벽한 논리의 그물망이 준희의 목을 죄어갔다. 준희는 침을 삼켰다. 그의 목젖이 크게 출렁였다. 공개 심문의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끼며, 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치열이 드러났다.
"역시 대단해, 강태혁."
준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빛에 광기와도 같은 안광이 스쳤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의 발악이었다. 그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태혁과의 거리는 불과 한 뼘이었다. 마이크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를 그대로 흡수해 외부로 송출했다.
준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완벽하게 파괴된 판을 뒤흔들 최후의 독침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준희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 잘난 머리로 10년 전을 전부 기억해 낼 수 있을까?" "무슨 개소리지." "10년 전 강아현을 부검하고, 소장을 날조했던 그 검시 부서." "그 부서의 결재 라인 맨 위에 있던 총책임자가 누군지 알아?"
준희의 눈동자가 태혁의 흔들리는 안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바로 너잖아, 위대한 해결사님." "당시 부검의 결재 도장을 찍은 건, 바로 당신의 서명이야."
태혁의 심장이 거대하게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깨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그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시 부검의 결재 도장을 찍은 건, 바로 당신의 서명이야.
태혁의 눈앞이 번쩍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샜다. "거짓말이다." 그가 읊조렸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뇌세포가 죽어가는 감각. 그것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10년 전의 기억. 그 시기의 서류철들이 흐릿했다.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현의 장례식 날짜마저 가물가물했다.
준희가 노란 봉투를 흔들었다. "기억이 안 나나 보군요." 그가 봉투를 찢었다. 바스락. 누런 종이가 갈라졌다. 드러난 것은 한 장의 문서였다. '사체 검안 및 부검 보고서'. 상단에 찍힌 붉은 직인. 그리고 우측 하단의 수사책임자 란. 거기에는 선명한 필체가 있었다. [강태혁]. 그의 자필 서명이었다.
쿵. 태혁의 심장이 늑골을 때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마비 증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오른팔 전체가 감각을 잃었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악취. 탄내 가득한 복숭아꽃 향기였다. 뇌신경이 타들어 갔다. 환영이 시야를 덮쳤다. 10년 전의 어두운 사무실. 누군가 서류 위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만년필을 쥔 손가락. 그 손목에 채워진 청색 다이얼 시계. 하태수였다. 하태수가 그의 서명을 흉내 내고 있었다. 위조였다.
"하태수가 썼군." 태혁이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지만 필적 감정은 다를 겁니다." 준희가 속삭였다. "이건 완벽한 당신의 필체예요." "10년간 연습한 결과물이니까." 준희의 눈이 휘어졌다. "대중은 서류를 믿습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죠." 마이크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전송 장치는 작동 중이었다. 수천 명의 귀가 이 고백을 듣고 있었다. 기자들의 타자 소리가 멈췄을 것이다. 침묵이 청사를 지배했다.
태혁은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유진이 건넸던 깨진 손목시계. 아현의 유품과 호환되던 그것. 태혁은 시계의 용두를 꾹 눌렀다. 째깍.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울렸다. 이 시계는 단순한 유품이 아니다. 유진이 외부에서 찾아낸 열쇠였다. 태혁은 이성을 붙잡았다. 무너지는 뇌의 지도를 억지로 기웠다. "서명은 위조다." 그가 똑바로 말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페이지." "여전히 하나가 비어 있군."
준희의 미소가 굳었다. 태혁이 서류를 낚아챘다. 왼손의 손가락이 거칠게 종이를 넘겼다. 체온이 닿지 않는 오른손은 무력하게 늘어졌다. 사각. 사각.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마이크를 탔다. 12페이지. 13페이지. 그리고 다음 장. 없었다. 선명한 뜯김 흔적. 또다시 14페이지가 없었다.
"서준희." 태혁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14페이지의 검시관 서명 오류." "그걸 가리기 위해 넌 이 조서를 훔쳤다." "하태수와 공모해서 말이지." 준희의 호흡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구르기 시작했다. "내가 결재했다면." 태혁이 피를 토하듯 말을 이었다. "이 14페이지가 사라질 이유가 없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야." "거기에 적힌 진범의 이름." "그것이 하태수와 너였기 때문이다."
정적이 취조실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태혁의 머릿속에서 강한 충격이 일었다. 퍽.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 눈앞의 화면이 깨진 유리처럼 갈라졌다. 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도망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흐릿했다. 눈코입이 사라진 달걀귀신 같았다. 기억의 완전한 소실. 아현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졌다. 태혁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더 이상 동생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순간, 취조실의 스피커가 울렸다. 외부 인터콤이었다. 지직거리는 소음 뒤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태혁 경정." "본청 수사국장이다." "방금 국과수로부터 긴급 연락이 왔다." "10년 전 강아현 사건의 부검의." "그가 30분 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유서에 네 이름이 적혀 있더군."
태혁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준희가 소리 없이 웃었다. "말했잖아요, 해결사님." 준희가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당신이 설계자라고."
새로운 덫이 태혁의 목을 감아쥐었다. 취조실의 형광등이 거칠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