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02X. 10. 14. 14:15 | 서울지방경찰청 본관 3층 제1취조실 (37.5721° N, 126.9725° E)]

유진의 발끝이 멈췄다. 구두 굽이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끼익, 비명이 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앞을 가로막은 것은 하태수였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에 쥔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붉은색 관인이 선명했다. 조판 인쇄된 글자가 번져 보였다. 긴급 구금 영장. 피의자 이름은 강태혁이었다. 하태수의 숨결이 거칠었다. 그의 콧구멍이 실룩거렸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뿜어 나왔다. 유진의 품에 안긴 서류첩. 그 모서리가 찌그러졌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다.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태혁은 취조실 안쪽에 있었다. 철제 책상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온도는 섭씨 18도였다. 피부의 소름이 돋았다. 태혁의 시선이 하태수에게 닿았다. 그의 눈꺼풀은 떨리지 않았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선이 비대칭으로 꺾였다. 미소였다. 소리 없는 웃음이 방을 채웠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임 경위, 멈춰라."

태혁의 목소리가 낮았다. 진동이 마이크를 타고 흘렀다. 복도의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웅웅거리는 하울링이 발생했다. 감찰반원들이 주춤했다. 그들의 손이 수갑으로 향했다. 가죽 홀스터가 삐걱거렸다. 하태수가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목줄기에 핏대가 섰다.

"강태혁 경정."

하태수가 영장을 내밀었다. 유진의 코앞이었다. 종이 냄새가 진동했다. 화학 약품과 잉크의 혼합물이었다. 탄내와 섞인 냄새. 태혁의 콧등이 찌푸려졌다. 뇌리에 스치는 잔상이 있었다. 분홍빛 꽃잎이 흩날렸다. 검은 재가 그 위를 덮었다. 복숭아꽃 향기였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살점의 냄새. 머리 뒤쪽이 찔러왔다. 송곳으로 쑤시는 통증이었다. 태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꿈틀거렸다. 참아야 했다. 지금 기억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현의 얼굴이 흐려졌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형상이었다. 태혁은 눈을 부릅떴다. 초점을 하태수에게 맞췄다.

"영장 발부 번호, 제202X-9842호."

태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 같았다. 숫자를 정확히 읊었다. 하태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번호가 일치했다.

"그걸 어떻게 알지?"

하태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침이 튀었다. 바닥의 회색 타일에 떨어졌다.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의 마이크를 잡았다. 빨간색 LED 불빛이 들어왔다. 취조실 외부 스피커가 켜졌다. 지익, 소음이 복도를 채웠다.

"팀장님."

태혁이 마이크에 속삭였다. 음성이 벽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복도 끝의 감찰반 사무실까지. 그리고 본관 전체로 퍼졌다.

"7년 전이 생각나는군."

하태수의 신형 구두가 삐걱였다. 그의 발끝이 뒤로 반 보 물러났다.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태혁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도림동 존속살인 사건."

복도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일부 반원들이 서로를 보았다. 귀를 기울이는 몸짓이었다. 하태수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조명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피의자 신문조서 제4쪽."

태혁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일정한 간격이었다. 초침 소리와 겹쳤다.

"세 번째 줄이었다. '흉기를 쥐었다'가 아니었지. '흉기가 쥐어졌다'로 기재되었다."

하태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영장을 쥔 손을 내렸다.

"의도적인 피동 표현의 오용."

태혁의 음성은 칼날 같았다. 종이를 베어내는 소리였다. "진범의 자백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당시 용의자였던 대기업 지분의 소유자, 그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한 자구 수정이었지. 그리고 그 하단 결재란."

태혁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하고 메마른 윤곽이었다.

"결재 서명은 하태수, 당신의 필적이 아니었다. 필적 감정서에 따르면 그것은 위조된 사인이었지. 승진 예정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가짜 서류였다."

"닥쳐!"

하태수가 고함을 질렀다. 복도의 유리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의 모세혈관이 터질 듯 팽창했다. 그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태혁은 침묵을 지켰다. 상대의 붕괴를 관찰했다. 수사 보고서를 읽듯 무표정했다.

하태수가 감찰반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손가락이 태혁을 가리켰다.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당장 체포해! 수갑 채워!"

반원 두 명이 취조실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가죽 구두가 바닥을 짓밟았다. 금속제 수갑이 차갑게 빛났다. 체포의 순간이었다. 유진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태혁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녀의 눈에 걱정이 서렸다. 태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법전을 외우듯 읊조렸다.

"형사소송법 제200조의2."

반원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법률 조항의 등장은 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긴급구장의 요건은 범죄의 중대성과 긴급성, 그리고 체포 영장을 발부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한다."

태혁이 일어섰다. 그의 키는 182센티미터였다. 위에서 아래로 하태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밀한 계측기 같았다.

"당신이 들고 있는 것은 체포 영장이 아니라 긴급 구금 승인서다. 즉, 사후 승인을 받겠다는 가짜 서류에 불과하지. 법관의 서명 날인은 어디에 있나?"

하태수의 손이 굳었다. 그는 종이를 뒤집으려다 멈췄다. 서류 뒷면은 깨끗했다. 관인만 찍힌 미완성 문서였다.

"공범 성립 조건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태혁이 한 걸음 다가갔다. 철제 책상이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기밀 유출이라 했나? 유출된 수사 매뉴얼은 3년 전 경찰학회지에 기고된 논문이다. 국회도서관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형법상 공무상 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 판례 번호 2018도1204,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취조실 내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감찰반원들의 시선이 하태수에게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불법 체포의 책임은 자신들이 져야 했다. 수갑을 쥔 손들이 내려갔다. 철컥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태혁이 쐐기를 박았다. "피의자 서준희와의 공모 혐의. 공범이 성립하려면 의사의 합치가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3년간 서준희와 단 한 차례의 통화 기록도 없다. 금융 거래 내역도 전무하다. 감찰팀이 확보한 통신 영장 결과에도 마찬가지일 텐데?"

하태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의 뇌는 정지해 있었다. 태혁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완벽한 법리적 방어벽이었다. 서류전의 승자는 태혁이었다.

조용했다. 취조실 안에는 오직 형광등의 미세한 웅웅 소리만 남았다. 태혁은 시선을 돌렸다. 이중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유리창은 반사경이었다. 하지만 태혁은 그 너머를 꿰뚫어 보았다. 그곳에 서준희가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수첩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였다. 그의 손에는 모나미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볼펜 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태혁의 법리 논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빛났다. 평소의 여유로운 갈색 눈동자가 아니었다. 수축된 동공.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자신의 설계가 어긋나고 있었다. 태혁의 반격이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다. 준희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그의 턱관절에 힘이 들어갔다. 태혁은 유리창을 직시했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때였다.

태혁의 뇌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쿠릉거리는 파열음이었다. 실제 소리가 아니었다. 대뇌 피질에서 발생하는 환청이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타들어 갔다. 필름이 불에 타는 형상이었다. 또다시 냄새가 났다. 탄내 섞인 복숭아꽃 향기. 이 향기는 기억의 침식이었다. 우뇌의 신경세포가 죽어가고 있었다. 아현과의 기억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와 함께 갔던 놀이공원의 이름이 지워졌다. 태혁은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지탱했다. 손톱이 시멘트 벽에 긁혀 하얗게 변했다.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웠다. 고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태수와 서준희 앞에서는 허점을 보일 수 없었다.

"하 팀장."

태혁이 다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이제 영장을 거두지."

하태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영장을 구겼다. 하얀 종이가 그의 손안에서 뭉개졌다. 그의 패배였다. 감찰반원들이 뒤로 물러섰다. 유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내려갔다. 그녀는 품에 안은 서류첩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현장으로 갈 준비가 끝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

취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붉은색 자막이 화면 하단을 가로질렀다. [속보] 글자가 깜빡였다. 복도의 스피커에서도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날로그 주파수의 잡음이 섞여 있었다.

- 마포구 연쇄살인 사건의 세 번째 피해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현장은...

화면이 전환되었다. 카메라가 비춘 곳은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통제선이 처져 있었다. 파란색 천막이 시신을 덮고 있었다. 그 위로 빗줄기가 떨어졌다. 빗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취조실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태혁의 눈이 모니터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신의 유기 형태. 그것은 태혁의 매뉴얼에 적힌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시신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 금이 간 실버 펜던트 손목시계였다. 그 시계의 바늘은 14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혁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숫자 14. 그것은 아현의 사건 조서에서 누락된 페이지 번호였다. 서준희가 태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중 유리 너머에서, 그의 입꼬리가 다시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그의 이빨이 하얗게러 드러났다. 그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하태수가 모니터를 보았다. 그리고 태혁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다시 비열한 빛이 돌아왔다.

"강태혁."

하태수가 낮게 속삭였다.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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