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2024.10.24 15:42 / 서울지방경찰청 제1취조실 (37.5635, 126.9752)]

수화기 너머의 잡음이 멎었다. 정적이 사방을 짓눌렀다. 하태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들고 있던 무선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태혁은 가만히 하태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차가운 조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하태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땀은 턱끝을 지나 조서 위로 떨어졌다. 잉크가 번지며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서준희가 왔군."

태혁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태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태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하태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침을 크게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감찰팀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취조실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나가십시오."

태혁이 문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은 미동조차 없었다. 하태수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결국 그는 깨진 전화기를 줍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이 문을 향했다. 감찰팀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철제 문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취조실에는 이제 태혁뿐이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머릿속을 찌르는 통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처럼 고동쳤다. 태혁은 책상을 짚고 버텼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그때 참관실의 유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임유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반대편 거울 너머에서 그녀가 보고 있었다. 태혁은 허리를 곧게 폈다. 그는 고통을 안으로 삼켰다. 약해진 모습을 보일 여유는 없었다. 진짜 괴물이 문턱을 넘고 있었다.

* * *

딸깍.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한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먼지 하나 없는 구두가 바닥을 디뎠다. 소음은 거의 나지 않았다. 그가 서준희였다.

서준희는 태혁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살인마의 잔혹함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태도였다. 그는 태혁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태혁 경정님."

서준희의 목소리는 맑고 나긋나긋했다. 어투는 지나치게 정중했다. 태혁은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해부용 메스처럼 날카로웠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충돌했다. 취조실의 온도가 한층 더 떨어졌다.

"자수한 이유가 뭐지?"

태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서준희는 낮게 웃었다. 그가 들고 온 가죽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책 한 권이 나왔다. 낡고 모서리가 닳은 책이었다. 책 표지에는 제목이 선명했다. '프로파일링의 실제와 한계'. 태혁이 10년 전에 집필한 저서였다.

"이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서준희가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태혁을 향해 부드럽게 밀었다. 책이 철제 책상 위를 미끄러졌다. 스으윽 하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태혁의 시선이 책으로 향했다.

"당신의 이론은 완벽하더군요."

서준희가 손가락으로 책등을 톡톡 쳤다. 태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의 강박증이 꿈틀거렸다. 책의 상태가 이상했다. 태혁의 시선이 책의 옆면에 머물렀다. 종이의 두께가 양쪽이 달랐다. 특정 부분이 비어 있었다.

"책장이 누락되었군."

태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는 자구의 오타나 서류의 훼손을 견디지 못했다. 그의 뇌가 모순을 감지하고 경고음을 울렸다. 서준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미가 예리하시네요. 역시 소문대로입니다."

서준희가 책장을 가볍게 넘겼다. 그의 손가락 끝이 멈춘 곳은 13페이지였다. 그다음 장은 바로 15페이지였다. 14페이지가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칼날로 정교하게 오려낸 흔적이었다.

"14페이지는 어디로 갔지?"

태혁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실렸다. 책의 훼손은 그의 논리에 가해진 흠집이었다. 서준희는 그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 장은 특별한 곳에 쓰였습니다."

서준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동시에 태혁의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덮쳤다. 그는 왼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꽉 쥐었다. 손톱이 하얗게 변했다.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태혁은 통증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그는 통증 속에서 직감했다. 그 누락된 14페이지에 무언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파고들 틈이 없었다. 눈앞의 적은 틈을 주지 않는 뱀이었다. 태혁은 이명을 억누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내 책을 읽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건가?"

"모방이 아닙니다. 예술의 완성이지요."

서준희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것은 광기 어린 사냥꾼의 눈이었다.

"당신이 써 내려간 지침은 위대했습니다. 나는 그 지침을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마포구의 그 여자도, 당신의 공식대로 움직여 주더군요. 아주 정교하고, 아주 완벽하게."

서준희의 어순이 교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는 태혁의 신경을 긁으려 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문장 속에 악의가 채워졌다. 치명적인 거짓말의 냄새가 풍겼다.

쿵.

태혁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의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골든핑거의 각성이 시작되었다. 그의 뇌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대뇌 피질의 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감각이었다. 동생 아현과의 어떤 기억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그 대가로 시각적 환영이 눈앞을 덮쳤다.

현장이 보였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었다. 어두운 방 안, 형광등이 번쩍였다. 바닥에는 푸른색 잉크가 가득 쏟아져 있었다. 단순한 잉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죽 염색용 특수 염료였다. 끈적한 푸른 액체가 사체의 발끝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났다. 탄내 섞인 복숭아꽃 향기였다. 동생 아현이 죽던 날 밤의 그 냄새였다.

태혁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환영 속에서 서준희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현장에 푸른 잉크를 쏟아붓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행동이었다. 사체 유기 현장의 도구. 그것은 잉크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서준희는 그것을 덮기 위해 자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알리바이는 조작되었다.

"허억..."

태혁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취조실의 형광등이 그의 눈을 찔렀다. 서준희는 그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태혁의 고통을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경정님."

서준희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가식적인 목소리였다. 태혁은 천천히 가쁜 호흡을 고르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뇌는 이미 모든 정보를 분석했다. 공감각적 개안이 남긴 잔상은 명확했다. 푸른 잉크.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사체 유기 도구. 서준희의 거짓말이 도출한 결정적 모순이었다.

태혁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빛에서 고통이 사라졌다. 대신 서리 같은 냉기가 가득 찼다. 그는 책상 위의 조서를 천천히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취조실을 채웠다.

"예술의 완성이라..."

태혁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서준희. 네 진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쓰레기 같은 거짓말이다."

서준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미소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거짓이라니요. 저는 전부 사실만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신의 매뉴얼대로..."

"네가 말한 '공식'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태혁이 서준희의 말을 끊었다. 그의 어조는 단호하고 무거웠다.

"내 매뉴얼 4장 2절에는 사체 유기 시 현장의 물리적 증거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적혀 있다. 하지만 너는 현장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지. 아주 인위적이고 거추장스러운 흔적을."

태혁이 서준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포구 망원동의 그 폐공장 바닥. 거기에 가득했던 푸른색 가죽 염료. 그게 네가 말한 예술인가?"

서준희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 정보는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현장 사진을 본 수사관들조차 단순한 오염 물질로 치부했던 부분이었다. 태혁은 그것이 '푸른색 가죽 염료'임을 정확히 지목했다.

"그 염료는 우연히 쏟아진 게 아니야."

태혁이 서류를 툭툭 쳤다.

"너는 사체를 유기한 뒤, 그 자리에 있던 특정 도구를 회수하지 못했다. 시간이 부족했거나, 누군가의 접근을 감지했겠지. 그래서 너는 현장에 있던 대형 가죽 염료 통을 넘어뜨려 그 도구를 은폐했다."

서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대신 차가운 침묵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 도구는 사체의 목을 조를 때 사용한 개조된 와이어 리더기다."

태혁의 추리는 거침이 없었다. 뇌에 주입된 시각적 잔상이 그의 논리를 완벽하게 뒷받침했다.

"그 와이어의 손잡이 부분에 네 지문과 상피 세포가 묻어 있었겠지. 염료의 강한 화학 성분으로 DNA를 파괴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염료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너는 불안해졌다. 경찰이 그것을 발견할까 봐."

태혁이 몸을 앞으로 더 밀착했다. 그의 숨결이 서준희의 얼굴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래서 자수를 무기로 삼았다. 스스로 걸어 들어와 취조실에 갇히면, 그 현장에 대한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자수자가 엄연히 경찰서에 있으니, 현장 수사는 활기를 잃고 종결될 거라 생각했겠지. 하태수 같은 무능한 자들을 이용하면 쉬웠을 테니까."

태혁의 목소리가 취조실 벽에 부딪쳐 공명했다. 그의 분석은 서준희의 설계를 완벽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서준희의 호흡이 미세하게 가빠졌다. 그의 예의 바른 가면에 완전히 금이 갔다. 그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뭉쳤다.

"하지만 네 계산에는 오차가 있었다."

태혁이 차갑게 덧붙였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네 조서의 자구 속에서 그 썩은 냄새를 맡았다는 것."

서준희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쥐고 있던 펜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완벽한 역전이었다. 도발하러 온 포식자는 이제 덫에 걸린 짐승처럼 굳어 있었다. 참관실 너머에서 임유진이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이 유리에 비쳤다. 하태수의 음모를 깨부순 것에 이은, 진범의 설계를 박살 낸 순간이었다.

취조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서준희는 태혁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더 이상 예의 바른 청년의 모습은 없었다. 가면 뒤에 숨겨진 추악한 본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서준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서서히 입꼬리를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괴하고 뒤틀린 미소였다.

스으윽.

서준희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검지 손톱이 철제 책상 위를 긁기 시작했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소음이 취조실의 정적을 찢었다.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태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태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준희가 고개를 낮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태혁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뱀처럼 차갑고 끈적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경정님. 하지만 말이죠..."

그가 손톱으로 책상을 더 강하게 긁었다. 끼이이익.

"강아현이 왜 죽었을까?"

태혁의 척추를 타고 거대한 전율이 일었다. 심장이 정지한 듯한 충격이 전신을 때렸다. 동생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취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준희가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의 눈에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네 완벽한 프로파일이 그 년을 죽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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