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보랏빛 안개 너머에서 지상에 관측된 적 없는 괴이한 구조물을 지닌 거수 무리가 지한을 겹겹이 포위한다.

몸집만 집채만 한 괴수들의 등 뒤로 돋아난 기계적인 금속 침들이 윙윙거리며 공명하고 있었다.

"하하하! 꼴좋구나, 강지한! 사지가 묶인 채 괴수들의 밥이 되는 기분이 어떠냐!"

신성 길드의 암살대장이 광소하며 발을 구른다.

그의 손에 들린 결계석, [성녀의 눈물]이 뿜어내는 푸른 안개가 사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콸콸, 입안에서 뜨거운 피가 역류해 울컥 쏟아졌다.

[경고! 동시 접속자 수가 임계점 이하로 하락합니다!] [현재 동시 접속자 수: 1,900,000명] [마력 역류 강도가 심화됩니다. 심장 마비 진행률: 65%]

고작 60초의 유예.

눈앞의 시야가 붉게 번들거리며 점멸했다.

숨이 턱 막히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도, 내 손가락은 허리춤에 매달린 투박한 검자루를 향해 뻗어 나갔다.

'심연의 톱날.'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내게 비웃음과 함께 던져주었던, 봉인된 기괴한 무기.

검신 전체가 녹슨 톱날처럼 삐죽삐죽 돋아난 그 흉물스러운 철덩이가, 내 피비린내 나는 마력을 머금자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그 찌꺼기 같은 검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쳐라!"

암살대장의 포효와 동시에 거수들이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보랏빛 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하는 괴수들의 아가리가 정면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피 묻은 입술을 뒤틀며 검을 고쳐 잡았다.

"누구 맘대로 죽는다는 건지."

스릉-!

검을 뽑아 드는 순간, 머릿속에서 얼어붙을 듯한 기계음이 고막을 때렸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당신의 광기에 전율하며 침을 흘립니다!] [돌발 미션 '사선(死線)의 서커스'가 강제로 가동됩니다!] [남은 시간: 45초]

"은하 씨, 카메라 똑바로 잡아."

"네, 네?! 지한 씨, 지금 피가……!"

"죽기 싫으면 찍어. 지금부터 보여줄 테니까."

발끝을 가볍게 튕겼다.

파웅!

대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내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역류하는 마력이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고통을 원동력 삼아 전신에 봉인되어 있던 신체 능력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첫 번째 거수의 거대한 앞발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무지막지한 질량을 향해, 나는 심연의 톱날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드르르르륵-!

무기질적인 마찰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칼날이 아닌 톱날이 괴수의 가죽을 파고들며 뼈째로 갈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 장비 '심연의 톱날'의 숨겨진 효과가 발동합니다!] [효과: 마력 흡수 및 정화 (과부하 상태)]

"크어어어억!"

거수가 단말마를 내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단 한 격.

그 무지막지한 파괴력에 암살단원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게 무슨 힘이지? 마력이 차단되었을 텐데?!"

"차단? 착각하지 마라."

나는 톱날 검에 묻은 괴수의 피를 털어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 검은 원래 남의 힘을 빨아먹을 때 가장 예리해지거든."

스르릉.

심연의 톱날이 붉은색 마력을 내뿜으며 기괴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심연의 톱날 봉인 1단계 강제 해제!] [마수들의 왜곡 마력을 정화하여 사용자에게 환원합니다.] [역류하던 마력이 일시적으로 진정됩니다. 심장 마비 진행률: 40%]

살아 움직이는 고기방패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내 눈에는 그저 톱날의 먹잇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막아라! 저놈을 둘러싸고 원거리 마법으로……!"

"늦었어."

안개를 뚫고 신형을 짓구겼다.

다음 비트.

내 신형이 보랏빛 장막 속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디 갔어?!"

"네 뒤다."

서걱-!

톱날 검이 암살대장의 호위 무사 세 명의 목을 동시에 그어 넘겼다.

단 일격에 목뼈가 으스러지며 피 분수가 솟구쳤다.

경외심에 가득 찬 성좌들의 후원 알림이 시야를 메우기 시작했다.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짜릿한 손맛에 감탄하며 50,0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방구석 평론가'가 침을 삼키며 채널을 고정합니다!] [동시 접속자 수가 반등하기 시작합니다: 2,500,000명]

"이 괴물 같은 년놈들이 감히 누굴 건드려."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으로 뻗어 나오는 왜곡 마수들의 다리와 꼬리가 사정없이 밀려들었지만, 내 검 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서걱! 드르륵! 콰직!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림보의 안개 속에 기괴한 박자로 퍼졌다.

[돌발 미션 달성도: 55%]

"다음."

내 목소리에 암살대장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 끝에 맺혔다.

"괴, 괴물 녀석……! 전성기 힘을 잃었다는 건 전부 가짜였나?!"

"가짜인지 진짜인지, 몸으로 겪어보면 알겠지."

나는 발끝에 마력을 모아 지면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쿠쿠쿠쿵-!

지반이 뒤집어지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돌덩이들을 발판 삼아 쇄도하는 내 모습은, 사선의 절벽 위를 걷는 광대와도 같았다.

"성녀의 눈물! 결계를 최대 출력으로 전개하라!"

대장이 다급하게 결계석을 치켜들었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안개가 내 전신을 옭아매며 마력을 강제로 억누르려 들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조여드는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심연의 톱날을 그 푸른 안개의 중심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던졌다.

"미쳤군! 성물의 결계에 직접 검을 던지다니!"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를 여기 보낸 유채린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장비 '심연의 톱날' 고유 권능: 심연의 역류 발동!]

검이 푸른 결계석에 부딪히는 순간, 그동안 검이 흡수했던 마수들의 왜곡 마력이 역방향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성물이 지닌 순수한 신성 마력과, 림보의 더러운 왜곡 마력이 충돌하자 통제 불능의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마치 뜨겁게 달궈진 기름에 물을 끼얹은 듯한, 대규모 마력 폭발이었다.

"아, 아아아악!"

암살대장의 비명과 함께, 푸른 결계석이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파편들은 그대로 암살단원들의 가슴과 목덜미를 인정사정없이 꿰뚫었다.

푸화학!

사방이 피와 살점으로 물들며, 림보를 가득 채우고 있던 보랏빛 장막이 폭풍 같은 충격파에 순식간에 휩쓸려 날아갔다.

동시에,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통신 장애가 완벽하게 씻겨 내려갔다.

웅-!

은하가 들고 있던 중계기가 파란색 정상 신호를 내뿜으며 요란하게 울렸다.

[라이브 스트리밍 신호가 완벽하게 복구되었습니다!] [동시 접속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현재 동시 접속자 수: 18,700,000명 돌파! (채널 역대 최고 수치 경신!)]

화면이 켜지기 무섭게 채팅창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 미친 렉 걸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터짐 뭐임??? - 방금 폭발 실화냐? 림보 안개 다 날아감 ㄷㄷㄷㄷ - 퇴물이라며? 퇴물이 광역 마법을 쓰냐고 ㅋㅋㅋ - 저기 시체들 신성 길드 장비 아님? 대박 특종이다 진짜!!

[돌발 미션 '사선의 서커스' 클리어!] [성공 보상 지급 중……] - '심연의 톱날' 봉인 3단계 해제 완료 (마력 정화 및 물리 관통력 극대화) - 마력 영구 복구 +2.0% (누적: 6.5%) - 체력 스탯 +5% 상승 (누적 체력 스탯: 17%) - 획득 코인: +350,000 코인 (누적 코인: 675,000 코인)

머릿속을 울리는 시스템의 팡파르 소리와 함께, 전신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가슴을 쥐어짜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손끝에서 찌릿한 마력의 파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완벽한 회복은 아니지만, 이제 겨우 인간 구실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다져진 셈이다.

"하아, 하아……."

은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카메라 렌즈만큼은 정확하게 내 얼굴과 사방의 시체들을 비추고 있었다.

"지한 씨…… 해내셨어요. 신호도 완전히 복구됐고, 전 세계 실시간 트렌드 1위예요!"

"아직 좋아하긴 일러."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발의 여파로 림보의 안개가 걷힌 자리에, 쓰러진 거수들의 기괴한 사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우두머리 거수의 사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체의 등 뒤에 돋아나 있던 금속 침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은하 씨, 카메라 이쪽으로 밀착해."

"네? 네!"

카메라가 내 손끝을 클로즈업했다.

나는 거수 심장 부근의 단단한 가죽을 톱날 검으로 가볍게 갈랐다.

가죽이 벌어지자, 그 안에서 붉은 피 대신 기계적인 불빛이 점멸하는 기묘한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삐- 삐- 삐-.

일정한 주기로 전자음을 내며 작동하고 있는 은색의 금속 단추.

그 위에는 아주 선명하게, 익숙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세계 헌터 협회 (WHA) - 마력 증폭용 인공 코어]

"……!"

은하가 숨을 들이켰다.

채팅창 역시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폭탄이 터진 것처럼 뒤집어졌다.

- 어? 저 문양 설마 협회 마크임? - 미친, 자연산 SSS급 게이트 몬스터 몸 안에 왜 협회 제어 장치가 들어있냐? - 이거 주작 아니지? 실시간 생중계인데 주작을 어떻게 해 미친놈들아 ㅋㅋㅋ - 와…… 설마 림보 게이트 대폭발이 인공적인 거였다고?

나는 그 기이한 전리품 단추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겼다.

찰랑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자연산 게이트인 줄 알았던 림보 내부의 괴수가, 실상은 협회의 인공 마물이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계 평화를 수호하신다는 헌터 협회와 신성 길드가, 왜 이 금지 구역의 괴수들에게 자기네 기술력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의문 제기가 아니었다.

협회와 유채린이 숨기고 싶어 했던 추악한 민낯을, 전 세계 2천만 명의 시청자 눈앞에 대놓고 들이민 선전포고였다.

은하가 내 옆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한 씨, 제가 저번에 드렸던 마이크로 비밀 장부 파일…… 거기에 적힌 협회 멤버들의 비자금 흐름과 이 마석 제어 장치의 일련번호가 정확히 일치해요. 이건 완벽한 증거예요."

"알아."

나는 장치를 손아귀에 꽉 쥐었다.

이제 놈들은 더 이상 발뺌할 수 없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내 손바닥 안에서 쥐고 있던 위성 제어 장치의 붉은 인도등이 갑자기 파란색으로 변하며 거세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장치 내부에서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마력이 공명했다.

"……?"

은하가 긴장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고, 나 역시 검자루를 꽉 쥐었다.

이윽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듯한 차갑고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림보의 정적을 깨뜨렸다.

- ……강지한.

듣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지독하게 익숙한 목소리.

과거 나의 등을 찌르고 나락으로 보냈던 장본인.

신성 길드의 수장이자, 대중들의 가짜 우상.

성녀 유채린이었다.

-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었구나. 추하게 구걸하면서.

원격 통신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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