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컥, 철커덕!
살을 에는 금속음이 사방을 메웠다. 은빛 갑옷을 입고 신성 길드의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든 자들. 그들의 눈빛에는 오직 광신적인 살의와 통제된 규율만이 서려 있었다.
성녀 유채린의 직속 사설 군대, ‘신성 기사단’.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최소 500명은 되어 보였다. 그들이 수렁의 림보 입구를 빈틈없이 포위한 채 우리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성녀님의 명이다.”
선두에 선 기사단장 베르나르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날이 내 목덜미를 정면으로 지목했다.
“강지한과 그 동조자를 이 자리에서 즉시 처단하라.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마라.”
내 품에 안긴 서은하의 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기사단장에게 맞추었다. 렌즈 너머로 비치는 500명의 대군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성벽 같았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갔다.
“야, 서 기자.”
“네, 네?! 이 상황에서 이름이 나와요? 저 사람들 진짜 쏠 기세인데요!”
“카메라 앵글 잘 잡아라. 오늘 방송, 역대급 가치로 터질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쥔 [심연의 톱날]이 푸른 광기를 뿜어내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1화에서 심해의 트롤러가 조롱하듯 던져 주었던 싸구려 무기.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검은 더 이상 예전의 고철 덩어리가 아니었다. 성좌의 마력이 깃든 심연의 톱날은 내 마력 복구율이 올라갈수록 그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지한!”
베르나르드가 웅장한 마력을 목소리에 실어 포효했다. 그의 목소리가 림보의 왜곡된 하늘을 뒤흔들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너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게이트를 무단으로 침입하고, 인류의 자산인 S급 던전을 파괴한 대역죄인이다! 게다가 우리 신성 길드의 비밀 조사 구역을 침범해 성스러운 결계를 훼손했지!”
명백한 억지이자 선동이었다. 그의 뒤편으로 둥둥 떠 있는 수십 대의 촬영용 드론이 보였다. 그들 역시 이 상황을 전 세계로 송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작된 여론으로 나를 완전히 파멸시키겠다는 유채린의 비열한 수작.
“우리는 세계 헌터 협회의 공인 하에,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범죄자 강지한을 처단하겠다! 모든 기사단은 무기를 들어라!”
“오오오오!”
500명의 기사단이 일제히 방패를 두드리며 함성을 질렀다. 대지를 뒤흔드는 압도적인 위압감. 보통의 헌터라면 이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었을 터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위협이 아닌,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이었다.
[ 실시간 동시 접속자 수: 52,400,000명 돌파! ] [ 성좌들이 당신의 위기 상황에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 [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100,000 코인을 후원하며 킬킬거립니다. ] - ㅋㅋㅋ 퇴물 헌터 드디어 대가리 깨지기 직전이쥬? 500대 1은 전성기 때도 무리 아니냐?
“무리?”
나는 코방귀를 꼈다.
“누가 500대 1로 싸운대?”
“……뭐라? 죽음을 앞두고 미친 것이냐!”
베르나르드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손톱만 한 마이크로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과거 4화에서 서은하가 목숨을 걸고 내게 건넸던 물건. 헌터 협회의 원년 멤버들만이 공유하던 극비 중의 극비, 비밀 장부 파일이었다.
그동안 이 칩을 해독하고 방송 송출 장치에 완벽히 연동시키기 위해 조용히 밑작업을 다져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베르나르드. 너희 성녀님이 참 머리가 좋아. 대중을 선동하는 법을 아주 잘 알지.”
나는 마이크로칩을 내 개인 방송 송출 단말기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말이야. 머리가 좋은 것과, 꼬리가 긴 것은 전혀 다른 문제거든.”
[ ‘비밀 장부 파일’의 데이터 압축 해제를 시작합니다. ] [ 라이브 방송 스트리밍 채널과의 다이렉트 연동을 완료했습니다. ] [ 전 세계 플랫폼으로 강제 화면 공유가 실행됩니다! ]
피이잉―!
순간, 내 방송을 보고 있던 5천만 명의 화면이 일시에 전환되었다. 그리고 수렁의 림보 하늘 위로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띄워졌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수많은 숫자가 적힌 복잡한 장부와, 하나의 음성 재생 파일 아이콘이었다.
“……저게 무슨?”
베르나르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나는 가볍게 공중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음성 파일이 재생되었다. 잡음 섞인 스피커 너머로, 너무나도 익숙하고 맑은,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강지한의 마력 봉인 마석은 준비되었나요?”
전 세계가 침묵했다. 그 목소리는 자비롭고 성스러운 신성 길드의 수장, 성녀 유채린의 목소리였다.
― “네, 성녀님. 서울 대폭발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지한의 등 뒤에서 봉인을 작동시키겠습니다. 협회 측에서도 언론 통제를 약속했습니다.”
― “좋아요. 지한이가 사라져야 우리가 마석 유통권을 독점할 수 있어요. 그 잘난 영웅 놀이는 이제 끝내야죠. 아, 그리고 같이 진입하는 원년 멤버들…… 전부 입막음하는 거 잊지 마세요. 게이트 안에서 죽은 걸로 처리하면 깔끔하니까.”
― “알겠습니다. 성녀님.”
살을 에는 듯한 침묵이 림보 전체를 지배했다.
방송 채팅창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 미친; 저 목소리 유채린 맞아? - 진짜 성녀 유채린 목소리인데? 대역 아니야?! - 야, 화면에 뜨는 비밀 장부 봐라! 헌터 협회 직인 찍혀 있음!!! - 와…… 강지한이 배신당한 게 진짜였어? 동료들까지 다 죽이고 성녀가 된 거라고? - 대박 사건…… 신성 길드가 아니라 살인 길드였네;;;
[ 실시간 동시 접속자 수: 68,000,000명 돌파! ] [ 채널 화제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 [ 성좌 ‘심해의 트롤러’가 경악하며 500,000 코인을 후원합니다! ] - 와 ㅋㅋㅋ 대박 미친놈 ㅋㅋㅋ 이걸 라이브로 까버린다고? 진짜 미친 어그로다 ㅋㅋㅋ
베르나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의 뒤에 선 500명의 신성기사단원들 역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맹세한 정의가, 그들이 모시는 성녀의 실체가 추악한 오물 덩어리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이, 이것은 조작이다! 감히 성녀님을 음해하기 위해 사기꾼 놈이 음향을 조작한 것이다!”
베르나르드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서은하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붉은 렌즈는 그들의 당황한 안면 근육 하나하나를 초고화질로 전 세계에 생중계하고 있었다.
“조작?”
나는 피식 웃으며 [심연의 톱날]을 들어 올렸다.
“조작인지 아닌지는 너희 몸에 새겨진 마력의 기운이 증명하겠지.”
스으으으―!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마력이 심연의 톱날로 빨려 들어갔다. 검날에 박힌 마력 제어 장치들이 차례로 박살 나며, 검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신화급 권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 복선 회수 완료: ‘심연의 톱날’의 진정한 권능이 해방됩니다! ] [ 권능: ‘심연의 포식자’ 가 활성화됩니다. ] [ 효과: 상대방의 신성 마력을 흡수하여 자신의 스탯으로 치환합니다. ]
“유채린이 너희에게 내린 그 ‘신성한 가호’가 얼마나 더러운 피로 만들어진 건지, 내가 직접 보여주지.”
나는 신형을 날렸다.
타앗!
허공을 가르는 내 속도는 이미 일반적인 헌터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복구율 41.5%의 힘. 전성기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오합지졸 광신도들을 쓸어버리기에는 차고 넘쳤다.
“막아라! 방패를 올려라!”
베르나르드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기사단 전열의 방패병들이 일제히 신성 마력을 끌어올려 거대한 은빛 방패막을 형성했다. 두터운 신성의 벽.
하지만 내 검끝이 그 방패막에 닿는 순간.
스스스스슥!
“……어?”
방패병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자랑하던 신성한 방패막이 내 검날에 닿자마자, 마치 물 만난 스펀지처럼 스며들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심연의 톱날]이 그들의 신성 마력을 고스란히 ‘포식’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방패벽이 허무하게 깨져 나가며, 수십 명의 기사단원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 신성 마력 12,000 포식 완료! ] [ 일시적 스탯 상승: 근력 +15, 민첩 +12 ] [ 현재 마력 복구율: 43% ]
“괴, 괴물 녀석……!”
베르나르드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의 검에 서린 기운은 꽤 묵직했다. S급 헌터다운 기세였다.
하지만 내 눈에는 느려 터진 달팽이의 강등질에 불과했다.
가볍게 상체를 틀어 그의 검을 피한 나는, 그대로 베르나르드의 손목을 향해 [심연의 톱날]을 역수로 꺾어 그어 내렸다.
서걱!
“아아악!”
단 한 번의 교차. 기사단장의 오른손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가 쥐고 있던 대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나는 베르나르드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커흑!”
기사단장이 바닥을 뒹굴며 피를 토했다. 단 몇 초 만에 기사단장이 무력화되자, 500명의 군대는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양떼로 변했다.
그들의 눈빛에 서린 광신은 사라지고, 오직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두려움만이 들어찼다.
“이게 너희가 믿는 성녀의 힘의 실체다.”
나는 쓰러진 베르나르드의 목덜미를 발로 짓밟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보고 있냐, 유채린?”
내 목소리가 라이브 방송을 타고 전 세계로, 그리고 지금쯤 모니터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녀에게 전해졌다.
실시간으로 신성 길드의 주가가 폭락하고 있었다. 길드 인기도 순위는 실시간으로 수십 단계씩 곤두박질치며 ‘살인 집단’, ‘배신자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가식의 성벽이 단 한 번의 방송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 실시간 동시 접속자 수: 75,000,000명 돌파! ] [ 랭킹 1위의 위엄을 전 세계에 증명했습니다! ] [ 누적 후원 코인: 5,200,000 코인 돌파! ]
바로 그때였다.
수렁의 림보 상공, 왜곡된 보랏빛 장막이 거칠게 찢어지며 피비린내 나는 마력이 폭발했다.
콰르르릉!
하늘에서 붉은 번개가 내리치며, 공간을 강제로 찢고 거대한 차원 포털이 열렸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한 여인.
새하얀 성녀의 사제복을 입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 살의로 가득 찬 검을 쥔 여인.
유채린이었다.
“강지한……!”
그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포털에서 지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도약했다. 그녀의 검끝이 내 가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져 내려왔다.
진짜 성녀의 민낯이, 마침내 내 눈앞에 드러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