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피로 물든 천산(天山)의 정상에 향로의 연기처럼 장엄한 고요가 내린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적자들의 골육상잔과, 의기(義氣)를 가장했던 군자들이 흘린 위선의 피가 대지를 축축히 적시고 있다. 당신의 백포(白袍) 자락에는 아직 식지 않은 구양(九陽)의 열기가 서려 있으나, 당신이 가꾼 승리는 태양의 광휘마저 무색케 할 만큼 지독히 시리고 푸르다.

구양신공(九陽神功)의 극의에 이르러 대지를 불태우던 그 독존(獨尊)의 검풍은 마침내 마교의 권좌와 무림맹의 심장부를 모두 부수어 모래로 만들었다. 일찍이 만인을 제패하고 천하를 굽어보리라 다짐했던 복수의 종착지. 그러나 파멸한 적들의 해골 위에 놓인 황금의 옥좌는 고독한 무덤의 석수(石獸)마저 비웃을 만큼 차갑고 황량할 뿐이다. 삼라만상을 호령하는 절대자의 권력 또한 결국 만인을 도륙한 대가로 얻은 백골의 언덕 위에 세워진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당신은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는다.

"부질없고, 또 부질없구나."

나직이 읊조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서풍(西風)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진다. 품속에서 천하를 굴복시키고 세상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절대자의 증표, 만마(萬魔)의 보인(寶印)을 꺼내 든다. 한때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혈육이 칼을 겨누고 온 강호가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벌였다. 당신은 조용히 허리를 굽혀, 아직 검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대지의 어둠을 파헤친다. 그리고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 찬란한 인장을 깊은 흙 속에 묻어버린다. 진토(塵土)에서 온 무기(武氣)는 다시 진토로, 탐욕의 불꽃은 어둠 속에 묻혀 영원히 꺼져야 마땅하기에.

이로써 천하를 피로 물들이던 광풍은 완전히 멎었다. 당신이 지나온 길목에 남은 것은 이제 오직 차가운 재와 깊은 침묵뿐이다.

서역의 메마른 황사(黃沙)가 당신의 펄럭이는 옷자락을 스치며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향한다. 단전이 깨어져 버림받았던 비장한 소년은 가공할 인과를 극복하고 대도의 성자(聖者)이자 천하 무쌍의 마황(魔皇)이 되었으나, 마침내 도달한 경지에서 스스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다. 신화는 끝났고, 이제 전설조차 닿지 못할 고고한 여정이 시작되려 한다.

당신은 검을 깊숙이 거두고, 가만히 돌아서서 지평선의 붉은 낙조를 바라본다. 홀로 걷는 고독한 한마(寒魔)의 그림자가 대지에 길게 늘어진다. 등 뒤의 세상이 속세의 탐욕으로 다시 끓어오를지라도, 당신은 이제 저 무애(無涯)의 지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고독한 유랑의 길, 그 장엄한 첫 걸음이 황혼의 빛 속으로 조용히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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