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당신은 화산(華山)의 깎아지른 절벽 끝에 서서 도도히 흐르는 밤안개를 내려다봅니다. 험준한 산세는 묵적(墨跡)으로 그린 산수화처럼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고, 정막한 대기 속에는 오직 계곡을 타고 흘러드는 소나무의 거문고 소리 같은 바람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극양(極陽)의 심법, 구양신공(九陽神功)의 열기는 이 차가운 성산(聖山)의 서리마저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깨어진 단전의 절망을 딛고 대지에서 솟구쳐 오른 태양처럼, 당신의 심맥에서 비롯된 진기는 고요한 불꽃이 되어 어둠을 살라 먹으며 깊게 맥동합니다.

정파의 영지 한복판에 자리한 밀실, 화안각(華安閣)의 등화가 밤개미의 행렬처럼 길게 흔들리며 불빛을 번집니다. 연기처럼 가벼운 신형으로 가공할 기척을 지운 채, 당신은 처마 밑 음영에 몸을 맡깁니다. 일찍이 당신을 진흙탕에 버리고 마교의 패권을 움켜쥐려 했던 자, 이복형 사마륜(사마륜)의 가증스러운 음모가 바로 이백 장 아래의 밀실에서 서청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밀실 내부에서는 백도(白道)의 어른이라 자처하는 화산파의 장로들이 마교의 표식이 선명히 찍힌 서찰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탐욕의 눈빛을 빛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참으로 구밀복검(口蜜腹劍)이자 양봉음위(陽奉陰違)의 극치입니다.

"사마륜 공자께서 보내신 서약이 이토록 엄중하니, 우리 화산 또한 강호의 대의라는 명분을 얻어 마교의 장막을 걷어낼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소이다."

화산파 삼장로의 목소리에는 도가(道家)의 청산(淸山) 같은 고결함은 간데없고, 오직 천하를 반분하겠다는 흉계와 피비린내 나는 탐욕만이 어리어 있습니다. 정파와 사파가 물밑에서 야합하여 혈육을 해치고 가문을 찬탈하려는 이 위선적인 광경에, 당신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극양지기가 일순간 광풍을 만난 화산처럼 요동칩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공의 위력이 아니라,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불의를 정화하고자 하는 자연의 불꽃과도 같습니다. 심맥에서 타오르는 진화(眞火)는 백회혈을 관통하여 이 산악 전체를 단숨에 증발시킬 듯이 뜨겁게 대지를 진동시킵니다.

그때, 밀각을 둘러싼 정원 한편에서 서늘한 기척과 함께 등불을 든 은은한 보법이 감지됩니다. 화산파 장문의 무남독녀이자 화산의 보배라 불리는 영애(令愛) 화영이 서성거리며 장로들의 밀실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의 등뒤로, 정파와 마교의 파멸적인 동맹을 증명할 서찰이 든 목함이 반쯤 열린 채 빛을 받고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야풍이 숲의 잎사귀들을 흔들며 비장한 조종(弔鐘)을 울립니다. 단전을 부수고 자신을 버렸던 천지간의 가증스러운 위선자들을 향해, 마침내 복수의 첫 손속을 뻗어야 할 찰나가 도래했습니다. 흐르는 밤바람 속에서 당신의 손끝에 푸르스름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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