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갑게 식은 쇠사슬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질렀다.

묵직한 철제 고정 족쇄가 르네의 가녀린 손목을 집어삼키기 직전, 사법관 옵스의 비열한 미소가 만개했다. 숲의 짙은 안개마저 그의 탐욕스러운 숨결에 오염된 듯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쇠사슬이 르네의 살결에 닿기 바로 한 뼘 전,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 르네의 손끝이 가볍게 위로 솟구쳤다.

"멈추세요."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안개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주위의 공기가 한순간에 팽팽하게 가라앉았다.

르네의 손에 들린 것은 투박한 쇠사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매끄럽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은색의 작은 기계장치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사자 가문의 포효하는 문양이 은빛 장치 중앙에서 서슬 퍼런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그것은……!"

족쇄를 채우려던 군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법관 옵스의 얼굴에서도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것은 지난날, 사자 가문의 대가주 레온하르트가 르네의 빵집을 위생 검증하겠다며 엄포용으로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제국 최고급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였다. 가주 수준의 청결과 마력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황실 공인의 유물이자, 사자 가문의 비호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신표였다.

르네는 입가에 차분한 미소를 띤 채, 은빛 측정기를 옵스의 붉게 타오르는 검출봉 앞으로 들이밀었다.

"제국의 법률에 명시된 위생 검사 조항 제17조를 기억하십니까, 사법관님?"

"무, 무슨 헛소리를……!"

"‘공무 수행 중인 위생 검사관의 도구가 오염되었거나 조작의 우려가 있을 때, 피검사자는 황실 혹은 대가주 공인의 측정기를 통해 즉석에서 대조 검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바로 이 조항 말입니다."

르네의 목소리는 밤바람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옵스는 다급하게 검출봉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르네가 은빛 측정기의 상단 태엽을 가볍게 튕기자, 투명하고 맑은 마력의 파동이 채찍처럼 뻗어 나가 그의 붉은 검출봉을 단단히 휘감았다.

키이이이잉!

대기를 찢는 듯한 고주파의 울림이 빵집 마당을 가득 채웠다.

"이, 이거 놓아라! 감히 사법부의 공무를 방해하려 드는가!"

"방해가 아니라 검증입니다. 떳떳하시다면 피하실 이유가 없겠지요."

르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영혼의 가계부'가 실시간으로 적들의 마력 잔해를 분석해 올리고 있었다.

[황실 공인 측정기의 마력 강도: 상급 (사자 가문 마력 각인)] [대조 대상: 사법 소속 검출봉 내부의 조작 회로 감지 완료] [상태: 강제 동화 및 과부하 유도 개시]

두 도구가 허공에서 맞닿는 순간, 은빛 측정기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마력이 붉은 검출봉의 내부로 무섭게 흘러 들어갔다.

옵스가 들고 있던 검출봉은 바실리 상단에서 제공한 저급한 마석 가루로 조작된 야매 도구에 불과했다. 대가주의 마력이 깃든 최고급 측정기의 순수한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쩌적! 쩌적!

불길한 균열음이 검출봉 표면을 따라 빠르게 번져 나갔다.

"어, 어어? 왜 이러는 것이냐!"

옵스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검출봉 내부에서 붉은빛이 통제를 잃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꽃이 튀고, 겉면의 가죽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콰아아앙!

결국 검출봉의 하단부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냈다.

"으아아악!"

옵스는 비명을 지르며 불타는 검출봉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검게 그을려 있었고, 흩어진 파편들 사이로 조작용으로 심어둔 붉은색 불순 마석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빛 측정기는 폭발의 여파 속에서도 끄떡없이 허공에 빛의 화면을 띄웠다.

[측정 결과: 본 밀가루 포대(A-07)의 원형 마력 반응 무해함(100%)] [특이 사항: 검사 직전, 외부 마력 주입 이력 감지됨] [주입 마력의 파동 일치도: 사법단 감찰관 '디아즈'의 개인 마력과 99.8% 일치]

허공에 선명하게 떠오른 푸른색 활자들이 사법단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다. 디아즈 감찰관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며 무릎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것은 음모다! 장치가 조작된 것이다!"

옵스가 혀를 깨물 듯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제국에서 사자 가문의 공인 측정기가 보여주는 결과를 조작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곧 대가주 레온하르트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부스스한 안개 너머로, 낮고 웅장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크르릉……."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빵집을 둘러싼 안개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루, 루루만 있는 게 아니잖아?"

군사 중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르네의 품에 매달려 으르렁거리던 아기 사자 루루의 뒤편으로, 몽글몽글한 갈색 털을 가진 아기 곰 수인과 은빛 줄무늬가 매력적인 아기 표범 수인들이 숲속에서 굴러 나오듯 나타났다.

그들의 눈망울은 평소 빵집에서 꿀빵을 달라고 조를 때처럼 초롱초롱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감히 자신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위협하는 침입자들을 향해 야성적인 적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기 맹수들의 등 뒤로, 숲의 어둠을 가르며 거대한 체구의 수인 호위 전사들이 무기를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곰 가문과 표범 가문의 정예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살기가 사법단의 군사들을 압도했다.

"감히 르네 님의 빵집을 건드리다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거대한 전투 도끼를 어깨에 멘 곰 가문의 전사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발치에서 아기 곰이 "웅! 웅!" 하며 짧은 솜방망이 발을 흔들며 동조했다.

사법단 군사들은 이미 무기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뒤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들은 고작 변방의 빵집 하나를 털어 가려 했을 뿐인데, 제국의 내로라하는 맹수 가문들의 군대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르네는 차분하게 옷자락을 정리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법관님. 제국의 위생 수칙 제94조를 아십니까?"

옵스는 침을 꿀컥 삼키며 르네를 올려다보았다. 가녀린 인간 여자에 불과한 그녀의 눈빛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자 가문의 대가주보다 더 차갑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고의로 식품에 전염병 유발 물질이나 불순 마석 가루를 유포하여 무고한 시민을 해하려 한 자는, 영지 추방 및 전 재산 몰수형에 처한다.’"

르네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마석 잔해를 구두 끝으로 툭 찼다.

"당신들이 가져온 이 가루, 바실리 상단에서 은밀하게 반입한 '적유 마석가루' 맞지요? 제 가계부에는 유통 경로와 성분이 아주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답니다. 제국 법정에 이 이력과 대가주의 측정 결과를 그대로 제출하면, 과연 황제 폐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까요?"

"윽, 으으……."

"공직자 신분으로 상단과 유착하여 불법 마석을 유통하고, 심지어 아기 수인들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타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신들의 가문 전체가 반역죄로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겁니다."

르네의 쐐기를 박는 조항 단어 하나하나가 옵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미 승패는 결정 나 있었다. 사법단의 명분은 완전히 박살 났고, 물리적인 무력마저 숲을 에워싼 맹수 전사들에게 철저히 짓눌렸다.

"퇴, 퇴각하라! 일단 퇴각한다!"

옵스가 비명을 지르며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그는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며 부하들을 재촉했다.

디아즈 감찰관을 비롯한 군사들도 쇠사슬과 족쇄를 팽개쳐 둔 채, 숲의 맹수들의 으르렁거림을 피해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시덤불에 옷이 찢기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는 줄도 모른 채, 그들은 안개 속으로 꼴사납게 기어 나갔다.

"두고 보자! 바실리 상단주님이 너 같은 인간 계집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짓밟아 버리실 테니까!"

멀어지는 옵스의 악에 받친 비명 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와아아! 르네 누나가 이겼다!"

"웅! 빵 맛있다!"

사법단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마당이 순식간에 아기 맹수들의 아우성으로 채워졌다. 루루는 르네의 앞치마에 부드러운 머리를 비벼대며 꼬리를 살랑였고, 다른 아기 수인들도 르네의 발치로 모여들어 몽글몽글한 솜털을 부벼댔다.

하지만 르네는 그 귀여운 몸짓들에 평소처럼 웃어줄 수 없었다.

"……아."

시야가 갑자기 흐려졌다. 머릿속을 바늘로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영혼의 가계부'를 통해 기적의 레시피를 작동시키고, 대가주의 측정기를 제어하기 위해 영혼의 마력을 쥐어짜 낸 대가가 뒤늦게 폭풍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과거 한국에서 겪었던, 차가운 방 한구석에서 홀로 앓아누워 아무도 나를 돌아봐 주지 않던 그 외롭고 시린 기억의 조각들이 가슴을 후벼 팠다.

"르네 님?!"

옆에 있던 펠릭스가 경악하며 손을 뻗었지만, 르네의 무릎이 먼저 힘없이 꺾였다.

바닥의 차가운 흙바닥이 얼굴에 닿기 직전, 르네는 간신히 정신의 끈을 붙잡으려 애썼다. 전신을 엄습하는 지독한 영혼의 몸살과 탈진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대지가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맹수들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저 멀리 안개의 숲 저편에서, 수백, 수천의 군마와 무장한 전사들이 대열을 맞추어 진격해 오는 거대한 진동이 땅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안개마저 양 갈래로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그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은, 사자 가문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대가주인 레온하르트의 검푸른 폭풍의 힘이었다.

마침내, 군대의 진동 소리가 빵집의 하늘을 세차게 휘감기 시작했다.

안개 숲의 나무들이 거대한 진동에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은빛 갑주를 입은 사자 가문의 정예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열자, 그 한가운데로 검은 야간 망토를 휘날리는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온하르트였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한층 더 짙은 살기와 초조함으로 이글거리며 안개를 뚫고 들어왔다.

"르네!"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땅을 딛는 순간, 발끝에서부터 뻗어 나간 폭풍 같은 마력 파동이 빵집 앞마당을 가득 채웠던 안개를 단숨에 밀어내 버렸다.

펠릭스는 간신히 정신을 유지한 채 쓰러지는 르네의 어깨를 받아 안았다. 루루는 르네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애처롭게 "끼우우웅, 웅..." 소리를 내며 앞치마자락을 보채듯 밀어댔다. 아기 사자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분홍빛 발바닥 젤리가 르네의 차갑게 식어가는 뺨에 닿았지만, 그녀의 감각은 이미 아득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레온하르트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불탄 검출봉과 사방에 흩어져 붉게 빛나는 불순 마석 가루의 잔해로 향했다.

"대가주님, 사법관 옵스가 바실리 상단의 사주를 받고 위생 조작을 꾸몄으나 르네 님이 가주님의 측정기로 이를 역공해 격퇴하셨습니다. 하지만……."

펠릭스가 말을 멈추고 바닥의 붉은 가루를 가리켰다.

"이 가루, 지난번 제 보급선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었던 정체불명의 '적유 마석가루' 포대 잔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바실리 놈들이 제국 금지 품목까지 밀수해 이곳에 누명을 씌우려 한 것입니다."

레온하르트의 안광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감히 자신의 비호 아래 있는 영역을 더럽히고, 제국의 금기까지 손을 댄 바실리의 만행에 그의 손등 위로 붉은 마력 핏줄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보다 빠르게 움직인 것은 르네를 향한 손길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르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얀 가죽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진 그의 커다란 손이 르네의 이마를 짚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이마와 위태로운 숨결에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바로 그 순간, 르네의 귓가에 '영혼의 가계부'의 날카로운 시스템 경고음이 메아리쳤다.

[! 경고: 소유주의 마력 및 생명력 임계점 도달] [! 특이 사항: 대가주 '레온하르트'의 순수 마력과 강제 공명 감지] [! 가계부 특수 기능 작동: 상대의 트라우마 수치와 소유주의 잃어버린 기억 간의 강제 동조가 시작됩니다.]

레온하르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따뜻한 황금빛 마력이 르네의 이마를 타고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그 포근한 온기에 르네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단단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레온하르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르네의 영혼 깊은 곳, 소중한 기억들이 통째로 깎여 나가 거대하게 파여 있는 '영혼의 공동(空洞)'을 그의 마력이 고스란히 감각했기 때문이었다.

"너…… 영혼이 왜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거지? 대체 무엇을 대가로 바친 거냐?"

그의 목소리에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뼈를 깎는 듯한 정서적 통증이 일렁였다. 르네가 루루를 치료하고,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 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조각들을 스스로 도려내 왔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 르네는 그의 슬픈 표정을 보았다. 하지만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저 멀리 숲의 가장 깊은 남쪽 안개 너머에서 또 다른 불길한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실리가 보낸 진짜 마지막 수단이자, 숲의 경계를 허물며 다가오는 거대한 마수들의 포효 소리였다.

"크아아아아윽!"

잠시 진정되었던 숲의 안개가 핏빛으로 물들며, 대가주의 군대 뒤편이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르네의 의식이 완전히 암전되기 직전, 그녀의 손가락 끝이 레온하르트의 옷자락에서 맥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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