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일개 인간 제빵사가 사자 가문의 비호를 받든 말든, 재료가 없으면 3일 안에 굶어 죽는 건 시간문제지."

펠릭스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치솟았다. 젖은 안갯속에서 그의 붉은 머리칼이 밤이슬을 머금어 한결 짙은 색으로 일렁였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고지를 선점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다. 거만한 상인의 오만함이 가득 담긴 보랏빛 눈동자가 르네의 가냘픈 어깨를 집요하게 내리눌렀다.

하지만 르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밤바람을 차분히 호흡하며, 펠릭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은 마차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차의 바퀴축과 가죽 포장막 틈새에서 사르르 흘러내리는 미세한 가루.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붉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것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독특하고 매캐한 마력의 향. 영양사 시절부터 식자재와 광물의 성분을 기가 막히게 감별해 내던 르네의 눈에 가계부의 투명한 경고창이 스치듯 떠올랐다.

[경고: 규격 외 불법 유통 물질 '적유 마석가루' 감지.] [제국 군사령부 및 사자 가문에서 전량 통제하는 특수 군용 자원입니다. 무단 점유 및 유통 시 제국법 제14조에 의거, 가문 영지 추방 및 전 재산 몰수형에 처해집니다.]

르네의 입가에 솜털처럼 가볍고 고요한 미소가 번졌다.

"공급망이 막히면 3일 안에 굶어 죽는다라…… 아주 합리적인 계산이네요, 펠릭스 씨."

"그렇지? 그러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서로에게 좋은……."

"하지만 그전에, 펠릭스 씨의 그 영리한 머리로 다른 계산서도 하나 두드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르네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마차 가까이로 다가갔다. 펠릭스의 눈썹이 찰나의 순간 꿈틀했다.

그녀는 하얀 손가락 끝으로 마차 바퀴 진흙받이에 묻은 붉은 가루를 살짝 훔쳐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비벼 바람에 날려 보냈다. 붉은 마석 가루가 안개 속에서 반짝이며 흩어졌다.

"안개의 숲은 사자 가문의 엄격한 군사 통제 구역이죠. 그리고 이 숲을 드나드는 모든 물류는 가주의 직속 검문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제국 군부의 허가 없이는 단 한 줌도 반출할 수 없는 '적유 마석가루'가 어째서 펠릭스 씨의 마차 휠에 이렇게 예쁘게 수놓아져 있을까요?"

펠릭스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지며 르네를 쏘아보았다.

"……그건 그냥 흔한 광산 모래일 뿐이야."

"우기지 마세요. 전 영양사…… 아니, 빵을 굽는 사람이라 가루의 성분에는 아주 예민하답니다. 마석 가루 특유의 비릿하고 매운 향이 이 안개 속에서도 아주 진동을 하네요."

르네는 한 걸음 더 다가가 펠릭스의 코앞에서 눈을 맞추었다. 그의 커다란 덩치 앞에서도 르네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차갑고 단단했다.

"만약 이 사실이 지금 안개 숲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는 사자 가문의 가주, 레온하르트 경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실리 상단보다 먼저 펠릭스 씨의 목줄이 날아갈 것 같은데요. 사자 가문의 군사재판은 자비가 없기로 유명하니까요."

"너……!"

펠릭스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기세를 잡았다고 확신하던 천재 상인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가 숨을 들이키며 르네를 압박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포근하고 보드라운 풀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르네의 앞치마 뒤에서 몽실몽실한 살구색 털뭉치 하나가 쏙 튀어나왔다.

"으릉……!"

아기 사자 루루였다. 루루는 펠릭스를 향해 조그만 앞발을 쿵 내딛으며 짐짓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무섭기보다는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처럼 한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루루의 목덜미에는 르네가 단단히 묶어 준 붉은 리본이 매달려 있었고, 그 리본 끝에는 조그만 금속 조각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은, 군데군데 균열이 가고 깨진 사자 가문의 정식 기사단 문양 칩이었다.

펠릭스의 시선이 루루의 목에 걸린 문양 칩에 닿았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저, 저건…… 사자 가주 직속 흑철기사단의 문양?!"

"맞아요."

르네는 허리를 숙여 루루를 품에 따뜻하게 안아 올렸다. 루루는 르네의 품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라는 듯, 그녀의 턱밑에 보드라운 이마를 부비며 갸릉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따스하고 달콤한 구름 우유 식빵의 냄새가 아기 사자의 털끝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올랐다.

"루루가 처음 이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품고 있던 유실물이에요. 레온하르트 경은 조카의 이 문양 칩을 확인하고, 제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정중히 사과하셨죠. 그리고 가문의 이름으로 이 빵집의 안전과 영업을 공식적으로 비호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르네는 루루의 복슬복슬한 귀 뒤를 부드럽게 살살 긁어주며,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녀의 등 뒤로, 빵집 안 열린 문틈 사이 탁자 위에 놓인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가 차가운 은빛을 발하며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자 가주가 직접 두고 간, 가문의 엄격한 감시이자 동시에 보호의 상징이었다.

그때였다. 안갯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짙은 장막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루루뿐만이 아니었다. 빵집 단골손님인 솜사탕 같은 아기 늑대 수인들과 까만 점박이 아기 표범 수인들이 숲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르네의 빵집을 호위하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서서, 펠릭스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조그만 콧김을 뿜어댔다.

"으르릉……!" "크흥!"

비록 아기 수인들이었지만, 맹수 가문의 핏줄다운 영험한 기운이 안개 서린 공기를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아이들은 르네에게 해가 되는 존재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펠릭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펠릭스는 침을 꿀컥 삼켰다.

그는 깨달았다. 이 인간 제빵사는 단순한 약자가 아니었다. 맹수 가문들의 절대적인 사랑과 비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안개 숲의 숨겨진 지배자였다. 무력과 법률, 그리고 수인들의 신뢰까지 모두 그녀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하…… 참나. 내가 완전히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펠릭스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열하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장사꾼 특유의 혀를 내두르는 감탄과 흥미가 그 자리를 채웠다.

"좋아, 르네. 내가 졌어. 마석 가루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하지만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잖아? 밀가루 공급이 끊기면 결국 빵집 문을 닫아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아. 사자 가문이 빵집을 지켜준다고 해도, 밀가루까지 하늘에서 떨어뜨려 주진 않으니까."

"물론이죠. 그래서 저도 펠릭스 씨와 아주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거래를 제안하려는 거예요."

르네는 품 안에서 미리 작성해 둔 가죽 장부와 빳빳한 종이 쪼가리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뭐지?"

펠릭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종이 위에는 정교하게 인쇄된 사자, 늑대, 표범 가문의 문양과 함께 일정한 금액이 적힌 '우표'들이 붙어 있었다.

"수인 가문들이 은밀히 가치를 보증하는 '통상 신용 우표'예요. 수인 제국에서는 이 우표가 마법적인 신용 화폐로 통용되죠. 전 앞으로 이 우표를 기반으로 한 '쿠폰 마일리지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이에요."

"쿠폰…… 마일리지?"

생소한 단어에 펠릭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네. 아기 수인들이 빵집에 올 때마다 날카로운 손톱을 예쁘게 다듬고 오거나, 숲에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면 이 쿠폰에 도장을 찍어줄 거예요. 그리고 가문들은 이 쿠폰의 가치만큼 제게 신용 우표로 대금을 결제하게 되죠. 즉, 이 우표들은 대형 상단의 복잡한 세금 조사를 거치지 않는 가문 직속의 알짜배기 현금 자산이에요."

르네는 검지 끝으로 장부의 한 구절을 톡톡 두드렸다.

"펠릭스 씨가 바실리의 감시망을 피해 제게 밀가루와 설탕을 안전하게 배달해 주신다면, 전 매 운송 건당 이 신용 우표로 결제해 드릴게요. 그것도 일반 도매 마진보다 훨씬 높은, 무려 '12%'의 신용 화폐 마진을 얹어서요."

"십…… 12%?!"

펠릭스의 목소리가 순간 뒤집어졌다.

제국 상단 연합의 평균 유통 마진은 고작 4~5% 내외였다. 게다가 황실의 가혹한 유통세와 통행세를 떼고 나면 상인들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푼돈에 불과했다.

하지만 가문들이 직접 발행하고 보증하는 신용 우표는 세금 추적이 불가능한 '블랙 마켓'의 최고급 화폐였다. 그걸 12%나 얹어주겠다니.

르네는 차분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바실리 상단의 독과점을 깨부수고 대륙 최고의 물류 상단을 세우는 것이 펠릭스 씨의 야망이잖아요? 이 우표들은 펠릭스 씨의 상단이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거대한 비자금을 축적할 수 있는 최고의 디딤돌이 될 거예요. 제 기적의 레시피 지분 같은 골치 아픈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한 이익이죠."

펠릭스는 멍하니 르네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르네가 제안한 시스템은 단순한 물물교환이 아니었다. 수인 가문들의 막강한 재정을 빵집이라는 허브를 통해 자신에게로 흘러들게 만드는, 정교하고 거대한 금융 유통망의 설계였다.

어린 인간 제빵사라고 얕잡아 보았던 자신이 오히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정말 무서운 여자구나."

펠릭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그의 가슴속에서 장사꾼으로서의 끓어오르는 전율과 복종심이 동시에 솟구쳤다.

"좋아. 이 계약, 기꺼이 받아들이지."

그는 품 안에서 붉은 마력이 깃든 은색 서명펜을 꺼내 들었다. 르네가 내민 장부 밑바닥, 바실리의 감시망을 우회하는 '고속 대체 철도 우회선 개척 계약서'에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서명을 새겨넣었다.

치익-.

마력 계약서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영혼의 상업 계약이 체결된 순간이었다.

[계약 완료: '최고속 우회 물류망' 제휴 완료.] [미시 보상: 식자재 공급 안정도 +40%, 신용도 상선 해금.]

가계부의 알림창이 머릿속에 띄워지자, 르네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곧바로 하역을 시작하지. 마차 뒤에 실린 밀가루와 버터는 바실리 늙은이 몰래 빼돌린 최고급품들이야."

펠릭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마부들을 향해 손짓했다.

덩치 큰 인부들이 마차에서 커다란 밀가루 포대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포대 껍질 사이로, 갓 빻은 밀가루의 구수하고 뽀얀 향방이 안개 숲의 밤공기를 부드럽게 채워나갔다.

르네는 안개 숲속 작은 보금자리를 지켜내었다는 안도감에, 품 안의 루루를 더욱 꼭 껴안았다. 루루는 기분 좋은 듯 르네의 뺨을 핑크빛 젤리 발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애교를 부렸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만 같았던 바로 그 순간.

두구두구두구-.

안개 저편에서 숲의 고요를 거칠게 깨부수는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흔들며 다가왔다.

단순한 상단의 마차가 아니었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짙은 회색 안개를 뚫고 거대한 칠흑색 마차 세 대가 빵집 앞마당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차의 문틀에는 붉은색 왁스로 잔인하게 찍힌 봉인 인장과 함께, 제국 법전의 상징인 '저울과 칼'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국 위생 재판소 산하 특별 사법단].

철컥, 철컥!

마차의 문이 열리며, 차가운 철갑옷을 입고 집총을 한 제국 사복 군단 백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내려 빵집 사방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마력 총창의 총구 끝이 푸른빛을 발하며 일제히 르네를 겨누었다.

군단의 대열 사이로, 기름진 머리칼을 뒤로 넘긴 중년의 사법관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마법적으로 위조된 '위생 긴급 압수수색 영장'이 쥐어져 있었다.

"황실의 위생 기준을 위반하고, 수인 아기들에게 불법 마약성 물질을 유포한 혐의다. 인간 제빵사 르네를 즉각 체포하고 빵집을 전면 폐쇄하라!"

사법관의 서슬 퍼런 포효가 안개 숲의 밤하늘을 찢어발겼다.

이제 막 물류망을 확보한 르네의 눈앞으로, 다시 한번 거대한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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