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짤랑.

맑고 묵직한 소리가 빵집의 조용한 공기를 두드렸다.

레온하르트가 내려놓은 주머니는 붉은 가죽의 결이 고스란히 살아있었고, 그 틈새로 순도 높은 황실 금화들이 서로 부딪치며 노란 빛무리들을 흩뿌렸다. 제국의 정점에 선 대가주가 고작 인간 제빵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광경은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그의 넓은 어깨 위로 안개 숲의 새벽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야수처럼 사납게 벼려져 있던 눈동자에는 이제 깊은 경외감과 함께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온기가 르네의 뺨에 닿기도 전에, 시야 한구석이 붉게 타올랐다.

웅-.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는 이명과 함께 ‘영혼의 가계부’ 홀로그램 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맑고 푸르던 화면 위로 핏빛처럼 붉은 경고등이 켜지며 활자들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 위기 경고 !!!] [안개의 숲 필수 제빵 재료(밀가루, 버터, 설탕) 공급망 전면 차단 감지.] [원인: 제국 상단 연합 대상주 ‘바실리’의 독점 영장 발동 및 상업적 금수 조치 단행.] [재고 보유량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 단 3일.]

르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톱니바퀴가 덜컥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안도하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이 지독한 결핍의 굴레. 한국에서 믿었던 이들에게 등 뒤를 찔리고 차가운 길바닥으로 내몰렸던 그 기억들이, 굳어버린 심장 가장자리에서 아프게 고개를 쳐들었다.

‘또 나를 가두고 굶겨 죽이시겠다?’

르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앞치마 자락을 꽉 쥐었지만, 이내 숨을 깊이 들이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분노나 두려움은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쓸데없는 지출일 뿐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차가운 셈법이었다.

“르네?”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이상 기후를 감지했는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은 르네의 굳어버린 얼굴과 허공을 헤매는 시선에 머물러 있었다.

르네는 애써 눈앞의 붉은 경고창을 쓸어 넘기며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어 둔 작은 물건을 탁자 위로 밀어 놓았다.

짤랑.

그것은 붉은 금화 주머니 옆에서 유난히 초라하게 뒹굴었다. 가느다란 가죽끈 끝에 매달린, 사자 가문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푸른 불꽃 문양이 새겨진 은색 칩이었다. 모서리가 거칠게 깨져 나간 그 조각은 루루가 안개 숲에서 처음 르네의 품으로 굴러 들어왔을 때 목에 걸고 있던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레온하르트의 안광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는 거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칩을 집어 올렸다.

“이것은…… 루루의 세례 칩이군. 가문의 비전 마력이 깃든 물건이라 행방을 쫓고 있었다만, 네가 보관하고 있었나.”

“아이가 눈 속에서 떨며 제 가게 문을 두드렸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사자 가문의 고귀한 문양이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을 미끼로 당신들에게 거래를 제안하거나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르네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저 배가 고파 우는 아이에게 빵을 구워주었을 뿐입니다. 이 칩이 당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혹은 이 아이가 어떤 후계자인지는 제 장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무가치한 정보니까요.”

레온하르트의 하얀 가죽 장갑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칩을 쥔 손을 가슴팍에 대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조카를 유괴당했다고 믿고 이 작은 빵집을 군홧발로 짓밟으려 했던 자신의 오만이 뼈아프게 가슴을 찔렀을 것이다.

가주 수준에서나 다룰 법한 정밀 청결 측정기인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가 탁자 위에서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측정기가 증명한 것은 르네의 무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흘린 땀방울과,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성한 수인의 마력 폭주를 가라앉히기 위해 쏟아부은 순수한 헌신이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장갑을 벗어 던졌다. 맨손으로 드러난 그의 손등에는 아직 붉은 마력의 잔흔이 가늘게 남아 있었으나, 이전처럼 날카롭게 날뛰지는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루루를 안아 올렸다.

“루루를 지켜준 대가는 이 금화 몇 주머니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약속대로, 사자 가문은 너를 영원히 비호할 것이다. 만약 이 안개 숲의 그 어떤 미천한 무리가 너를 위협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그들의 목을……”

“가주님! 가주님!”

그때, 빵집의 낡은 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붉은 제복을 입은 사자 가문의 전령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기사의 얼굴은 흙먼지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무례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사는 르네를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외쳤다.

“급보입니다! 제국 상단 연합의 대상주 바실리가 안개 숲 구역으로 통하는 모든 물류 통로를 폐쇄했습니다! 빵집에서 판매하는 치유 빵을 ‘출처 불명의 불법 마약성 물질’로 규정하고, 제약 심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실의 임시 금수 조치령을 받아냈습니다! 변방 무역 허가증이 전면 회수되어, 당장 오늘 밤부터 이 안개 숲으로 들어오는 모든 식자재 마차가 차단됩니다!”

빵집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황금빛 안광이 맹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뿜어져 나왔다.

“바실리…… 그 탐욕스러운 늙은 뱀 녀석이 감히 내 영지 경계에서 장난질을 치는군.”

르네는 말없이 주방 안쪽의 식자재 창고를 바라보았다.

머릿속 가계부의 재고 현황판이 스르륵 떠올랐다. 하얗고 고운 밀가루 포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르스름하고 고소한 버터 덩어리는 반쪽짜리 하나뿐이었고, 사각거리는 설탕은 한 줌 남짓이었다.

겨우 2인분의 빵을 구우면 모든 재료가 소진된다.

그때였다.

딸랑거리는 문종 소리가 다시 한번 맑게 울리며, 빵집 안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한 머리통들이 들이닥쳤다.

“르네 누나! 나 배고파요!” “오늘도 그 퐁신퐁신한 모카 번 주나요?”

귀가 쫑긋한 아기 늑대와 줄무늬가 선명한 아기 표범들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빵집 안으로 가득 들어찼다. 아이들은 레온하르트가 뿜어내는 삼엄한 기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소한 빵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며 줄을 섰다.

하지만 르네의 식탁 위에는 구워둔 빵이 없었다.

“어……? 오늘은 빵이 없어요?”

가장 앞에 서 있던 아기 표범이 분홍색 코를 실룩거리며 시무룩하게 귀를 눕혔다. 빵집 가득 번지던 달콤한 버터 향 대신 가라앉은 먼지 냄새만 가득하자, 아이들의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르네 누나 아파요? 빵 못 구워요?”

아이들의 순수한 걱정이 르네의 가슴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계산기 너머의 순수한 염려였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던 루루가 바둥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루루는 제 입가에 묻어 있던, 아까 먹다 남은 아주 작은 모카 번의 바삭한 크럼블 조각을 조심스럽게 앞발로 떼어냈다.

그리고는 시무룩해진 아기 표범의 입가로 다가가 제 작은 젤리로 크럼블을 밀어 넣어주었다.

“이거 머그면 안 아파. 루루가 아껴둔 고야.”

“웅…… 고마워, 루루.”

아기 표범이 크럼블 조각을 핥아먹으며 배시시 웃었다.

루루는 만족스러운 듯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이내 르네의 발목으로 다가왔다.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솜털이 르네의 맨살에 닿았다. 루루는 르네의 앞치마를 꼭 쥐고서, 제 보드랍고 긴 꼬리를 들어 올려 르네의 미간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마치 ‘누나, 울지 마. 걱정하지 마’라고 속삭이듯, 르네의 찌푸려진 눈썹 앞을 가만히 덮어 가려주는 것이었다.

보드라운 털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르네의 메마른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귀여운 녀석들.’

르네는 피식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즈니스니 손익계산이니 하는 차가운 벽이 아기 수인들의 몽글몽글한 꼬리 짓 한 번에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적들이 목을 죄어온다면, 그 손가락을 부러뜨려 주는 것이 장사꾼의 도리였다.

‘바실리 상단이 유통망을 쥐고 흔든다면, 나는 나만의 길을 뚫으면 돼.’

르네의 눈동자가 차갑고 투명하게 빛났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황실 금화 주머니를 집어 가계부에 등록했다.

[보유 자산: 황실 금화 150닢 (가치 환산: 1,500,000 SP 상당)] [보유 재고: 밀가루 0, 버터 0.2, 설탕 0.1 (조리 불가능)]

자금은 충분하다. 문제는 유통망이었다. 사자 가문의 무력으로 바실리의 상단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황실의 금수 조치령이라는 법적 명분을 거스르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그렇다면 법의 테두리를 우회하는 ‘어둠의 루트’가 필요했다.

스스스…….

그때, 빵집 뒷마당 쪽에서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일반적인 마력과는 다른, 끈적하고 어두운 붉은빛을 띠는 마력. 르네의 오감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적유 마석가루.

바실리 상단이 밀수하여 제국 몰래 유통하던, 불순물이 가득 섞인 위험한 마석의 냄새였다. 그리고 그 냄새와 함께 덜컹거리는 가벼운 마차 바퀴 소리가 뒷마당 낙엽을 밟으며 멈춰 섰다.

르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손님이 온 모양이네요.”

르네는 레온하르트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가주님, 잠시 루루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층 다락방에서 쉬고 계시겠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비즈니스 파트너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것 같아서요.”

레온하르트는 르네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즉시 내 이름을 부르도록.”

그가 아이들을 이끌고 이층으로 올라가자, 빵집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르네는 앞치마를 단정하게 정리한 뒤, 뒷마당으로 통하는 나무 문을 열었다.

끼이익-.

차가운 안개 숲의 바람이 문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안개 속에서 검은색 포장막을 씌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 마부석에는 붉은 머리칼을 대충 뒤로 넘긴 청년이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특유의 능글맞고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펠릭스였다.

그는 유쾌하고 기민한 물류 상단주였으나, 동시에 이익을 위해서라면 제국의 법 따위는 가볍게 씹어 삼키는 현실주의자였다. 마차 뒤편의 포장막 틈새로 미량의 반짝이는 적유 마석가루 잔해가 바람에 날려 사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펠릭스는 마부석에서 가볍게 뛰어내리며 르네를 향해 걸어왔다.

“여어, 르네. 안색이 별로 안 좋네? 빵 냄새도 안 나고 말이야.”

그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들리는 소문에는 제국의 위대한 대상주 바실리 영감이 네 빵집의 목줄을 완전히 채웠다던데. 밀가루 한 줌도 이 숲속으로 못 들어오게 막았다며?”

르네는 차가운 눈으로 펠릭스를 응시했다.

“정보가 빠르시네요, 펠릭스 씨.”

“장사꾼 목숨은 정보력에 달린 법이니까.”

펠릭스는 마차의 뒷문을 쾅 하고 열어젖혔다.

마차 안에는 굳게 닫힌 검은색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상자 표면에는 바실리 상단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으나, 그 위로 펠릭스 개인의 푸른 표식이 덧칠해져 있었다.

“바실리는 이미 황실의 정식 승인권까지 쥐고 이 안개 숲을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어. 일개 인간 제빵사가 사자 가문의 비호를 받든 말든, 재료가 없으면 3일 안에 굶어 죽는 건 시간문제지.”

펠릭스는 상자 하나에 걸터앉으며 턱을 괴었다. 그의 눈동자에 탐욕스럽고도 기민한 빛이 번득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바실리의 감시망을 피해 물건을 나를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지. 어때, 르네? 나랑 손을 잡는 건? 물론…… 이번 계약의 칼자루는 내가 쥐는 조건으로 말이야. 네 기적의 레시피 지분 절반을 내놓는다면, 내가 매일 아침 최고급 밀가루를 날라다 줄 수도 있는데?”

그는 비열하게 웃으며 르네를 압박해왔다.

바실리의 숨 막히는 금수 조치와, 협력자인 척 칼을 들이미는 펠릭스의 도발.

그러나 르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안개 속에서 오히려 더 정교하게 움직이는 가계부의 숫자를 바라보며, 아주 고요하고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