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 있는 인간은 당장 문을 열고 나와라!”
벼락치듯 쏟아진 목소리가 허름한 나무 문짝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먼지투성이 바닥이 사르르 떨렸고, 선반 위에 얹어 둔 낡은 유리컵들이 쟁그랑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르네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귓가에서 심장이 갈비뼈를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맛자락을 쥔 아기 사자 루루의 자그만 솜발이 덜덜 떨리는 것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금빛 마력의 서슬 퍼런 기운이 뺨을 따갑게 찔렀다. 당장이라도 무쇠 군화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목덜미를 움켜쥘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쿵, 쿵, 쿵.
무거운 군화 소리가 문턱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쉭, 피우우웅-.
빵집을 둘러싼 안개의 숲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연중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이 경계의 숲은 침입자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법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하얗고 축축한 수증기가 거대한 장막처럼 밀려와 빵집 주변을 거칠게 감쌌다. 마력이 뒤엉킨 백색의 장벽은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윽! 갑자기 안개가 왜 이렇게 짙어지는 거야!” “앞이 보이지 않는다! 대열을 유지해라!” “가주님, 이정표 마석이 안개의 마력에 간섭받아 작동하지 않습니다!”
나무 문 너머에서 당황한 기사들의 외침이 웅성웅성 울려 퍼졌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살벌한 쇳소리가 안개 너머로 조금씩 멀어졌다. 숲의 신비로운 힘이 일시적인 방패가 되어 준 셈이었다.
겨우 숨을 고른 르네는 제 품속에서 바르르 떨고 있는 아기 사자를 내려다보았다. 루루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검은 마력의 불꽃은 한풀 꺾였지만, 마력 폭주의 잔여 열기가 아기의 통통한 볼을 붉게 달구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다시 위험해질 터였다.
르네는 서둘러 도마 위에 놓인 우유 식빵의 남은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갓 구워낸 식빵에서는 몽글몽글한 우유 향과 달콤하고 고소한 효모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가슴으로 번졌다.
“루루야, 이거 마저 먹자. 응? 먹어야 아프지 않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며 부드러운 식빵 속살을 뜯어 루루의 입가에 대 주었다. 달콤한 냄새가 콧가에 닿자, 루루의 분홍빛 코끝이 씰룩였다. 아기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더니, 르네의 손가락까지 삼킬 듯이 입을 크게 벌려 식빵을 덥석 물었다.
오물오물, 우물우물.
조그만 볼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황금빛 털로 덮인 둥근 귀가 쫑긋거렸다. 한 입, 두 입, 따뜻한 빵이 루루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아이의 몸을 짓누르던 검은 기운이 하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르네의 머릿속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꿰뚫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덮쳐왔다.
‘아……!’
영혼의 가계부가 작동한 대가였다. 기적의 치유 레시피를 실체화하기 위해서는 르네 자신의 소중하고 아픈 기억을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뇌리가 하얗게 탈색되는 감각 속에서, 마음 한구석의 서랍이 강제로 열려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차가운 빗소리. 세상에 홀로 버려졌던 고아원 앞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그날 밤, 어린 르네가 온몸을 웅크린 채 느껴야 했던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의 기억.
그 서럽고 시렸던 첫날 밤의 기억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검붉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괴한 상실감이 영혼을 짓눌렀다. 뇌척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듯한 탈진감이 밀려왔다. 등뼈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들었다.
“우욱……!”
르네는 입을 틀어막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렸다. 위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넘어왔다.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공포가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영혼의 몸살은 자비가 없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스르륵.
그때, 식은땀으로 젖은 르네의 뺨에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감각이 와닿았다.
“냐아앙…… 아프디 마아…….”
루루가 걱정 가득한 금빛 눈망울로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사자의 분홍빛 발바닥 젤리가 르네의 볼을 조심스럽게 꾹꾹 눌렀다. 꼬물거리는 발가락의 온기가 살결을 타고 스며들자, 지독했던 뇌척수의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말할 수 없는 정서적 안도감이 텅 빈 영혼의 구멍을 채워 나갔다.
띠링-.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와 함께 반투명한 에메랄드빛 가계부 창이 떠올랐다.
[영혼의 가계부 정산] - 손님: 루루 (사자 수인 가문 후계자) - 결핍 상태: 마력 폭주로 인한 미각 상실 및 트라우마 - 치유 내역: 구름 우유 식빵 (치유율 100%) - 허기 점수: 90 -> 30 (안전 지대 진입!) - 누적 신용 점수: +50 SP 획득 (현재 잔액: 50 SP) - 대가 지불 완료: '첫 방치의 밤'에 대한 감정적 기억 상실.
[정산 결과: 거래가 성공적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손님의 트라우마 수치가 급감함에 따라 신용 자산이 가시화됩니다.]
르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계부의 수치를 응시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허전함은 여전했지만, 눈앞에 떠오른 숫자들이 그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철저한 등가교환이야. 비즈니스일 뿐이야.’
스스로에게 차갑게 되뇌며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볼에 닿은 아기 사자의 따뜻한 젤리 촉감만큼은 비즈니스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정했다.
“냐앙, 웅…….”
우유 식빵을 전부 해치운 루루는 이제 완전히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검붉은 마력의 찌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보송보송한 황금빛 털이 창가로 스며든 미약한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아기는 르네의 앞치마에 제 머리를 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단내를 맡는 모습이 영락없는 응석받이였다.
“맛이떠…… 또 조, 빵…….”
날카롭던 사자의 발톱은 발가락 사이로 쏙 감춘 채, 말랑말랑한 앞발로 르네의 무릎을 연신 꾹꾹 눌렀다. 하얀 빵가루가 아기의 입가와 르네의 스커트에 하얗게 눈처럼 내려앉았다. 인간을 혐오하고 경계한다던 맹수 가문의 도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달콤하고 고소한 빵 맛에 완전히 매료되어 목구멍으로 골골송을 부르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르네는 숨을 고르며 루루의 둥근 귀 뒷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아기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가늘게 뜨고 “골골골……” 소리를 내며 르네의 손가락을 핥았다. 까슬하면서도 따뜻한 혀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르네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지독한 영혼의 몸살 뒤에 찾아온 소소하고 따스한 평화였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게 허락되지 않았다.
스으으-.
빵집을 에워싸고 있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로 서늘하고 축축한 숲의 공기가 무겁게 밀려들었다.
빵집의 허름한 나무 벽, 거친 나뭇결 사이로 난 작은 틈새 너머로 기괴할 정도의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불꽃을 닮은 황금빛 안광이 번뜩였다.
숨이 턱 막히는 살기가 좁은 빵집 안 가득 소용돌이쳤다. 루루의 골골 소리가 뚝 멈췄다. 아기 사자의 귀가 바짝 누우며 몸이 다시금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끼이이익-.
낡은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가며,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온 거대한 그림자가 르네와 루루의 머리 위를 길게 덮었다.
은빛 투구와 칠흑 같은 철갑옷을 걸친 거대한 사나이.
그의 하얀 장갑을 낀 한 손은 허리춤에 찬 거대한 도검의 자루를 묵직하게 거머쥐고 있었다. 사자 수인 가문의 냉혹한 가주, 레온하르트였다.
그는 한 걸음 빵집 안으로 내딛으며, 차가운 심연 같은 눈빛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르네를 사정없이 내려다보았다. 칼날 끝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금빛 마력이 방 안의 온도를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거대한 그림자가 빵집의 아담한 대리석 바닥을 가득 가로질렀다.
사자 수인의 수장, 레온하르트의 걸음걸이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은빛 투구 사이로 비치는 그의 얼굴은 마치 차가운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무표정했고, 굳게 다문 입술은 서슬 퍼런 칼날을 연상케 했다.
“인간.”
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빵집의 천장을 울렸다. 웅장한 사효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목소리였기에, 르네의 귓가가 징 하고 울렸다.
레온하르트는 하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춤에 찬 거대한 검의 자루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아 들 것 같은 위압감에, 르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싱크대 모서리를 붙잡고 버텼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위장이 뒤틀리는 영혼의 몸살 때문에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기 어려웠다.
“으우…… 응…….”
르네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있던 루루가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밀었다. 아기 사자는 제 삼촌인 레온하르트를 보자 반가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하악질을 하듯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르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저리 가아……! 르네, 아푸게 하지 마아……!”
루루의 온몸에 돋아난 황금빛 털이 삐죽삐죽 곤두섰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였지만, 명문 사자 가문의 핏줄답게 뿜어내는 기세만큼은 제법 매서웠다.
조카의 뜻밖의 반항에 레온하르트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시선이 루루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향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폭주하는 마력의 불꽃에 휩싸여 사지를 바들바들 떨던 아이였다. 가문의 일류 치유사들조차 손을 대지 못해 안달복달하던 그 폭주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히려 뺨에는 건강한 핏기가 돌고, 입가에는 하얀 빵가루를 잔뜩 묻힌 채 활기차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황금빛 안광이 르네의 얼굴로 쏘아지듯 내리꽂혔다.
“조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제국 법률상 허가되지 않은 민간 약재, 혹은 정체불명의 마력 마약을 투여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가문의 비전 마력석으로도 억누르지 못한 폭주가 이렇게 순식간에 진정될 리 없다.”
르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평생을 철저한 계산과 이성으로 버텨온 방어기제가 본능적으로 작동했다. 감상적인 눈물이나 구걸은 이 냉혹한 맹수에게 통하지 않는다. 오직 논리적이고 상업적인 팩트만이 자신을 지켜줄 방패였다.
“마약이라니요.”
르네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싱크대를 짚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저는 그저 배가 고파 울부짖는 아이에게 따뜻한 우유 식빵 한 조각을 대접했을 뿐입니다. 제 빵집은 신선한 밀가루와 유기농 버터, 그리고 깨끗한 우유만을 사용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위생적인 가게입니다.”
“평범한 우유 식빵이 고위 수인의 마력 폭주를 치료한다고? 인간,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레온하르트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르네의 코앞에서 멈췄다.
탁-.
그가 품 안에서 꺼내 빵집의 낡은 나무 탁자 위에 얹어 놓은 것은,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의 직사각형 기계 장치였다. 표면에 복잡한 마법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그 도구는 햇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은색 미세 마력 측정기.’
제국의 고위 귀족들이나 위생 검사관들이 극도의 결벽증적인 위생 상태를 점검하거나, 음식물에 섞인 미세한 독소 및 유해 마력을 검출할 때 사용하는 최고급 장비였다.
“이 측정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레온하르트가 낮게 읊조렸다.
“만약 이 가게의 빵이나 식재료에서 단 한 조각의 불법 마약 성분이나, 우리 가문의 아이를 세뇌하기 위한 음험한 주술 마력이 검출된다면…….”
그가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스릉 하는 서늘한 마찰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 즉시 이 가게를 폐쇄하고, 너를 황실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겠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빵집 내부를 가득 채웠다. 르네는 침묵을 지켰다. 가계부의 기적은 시스템이 보장하는 순수한 '영혼의 치유'였기에 유해 성분이 나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의 고압적인 태도와 눈앞에 닥친 위협은 르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르르 떨며 르네의 다리를 꽉 안고 있던 루루가, 삼촌의 험악한 기세에 잔뜩 화가 난 듯 웅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야! 르네 빵 마시써! 삼촌 미워!”
아기가 통통한 발로 바닥을 쿵 구르는 순간, 루루의 목덜미 부근에서 작고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찰그랑-.
루루가 움직이면서 옷깃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도르르 굴렀다.
그것은 절반쯤 모서리가 깨져 나간, 그러나 여전히 찬란한 금빛을 발하고 있는 조그만 금속 칩이었다. 칩의 중앙에는 사자 가문을 상징하는 날카로운 발톱과 방패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자 가문의 최정예 기사단만이 몸에 지닐 수 있는 신분증이자, 마력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사단 문양 칩’이었다.
도르르 구른 칩은 정확히 레온하르트의 무거운 군화 앞코에 툭 부딪히며 멈춰 섰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깨진 문양 칩을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가문 내에서 극비리에 추진되던 후계자 호위 계획,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했던 의문의 습격 사건. 그 혼란 속에서 사라졌던 조카의 유실물이, 지금 이 수상쩍은 인간 여자의 빵집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스으으-.
레온하르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동이 한층 더 사납고 날카롭게 변했다. 황금빛 안광이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깨진 칩을 집어 들더니, 그것을 르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것이 왜 네 놈의 가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단순한 의심을 넘어, 무자비한 심판관의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조카를 납치하고 마력을 폭주시킨 배후가…… 바로 너였나, 인간?”
칼끝이 르네의 목덜미를 향해 서서히 겨누어지는 순간, 빵집 안의 공기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