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뽀얀 안개가 밀가루를 흩뿌려 놓은 것처럼 숲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침이 찾아와도 해는 제 온기를 온전히 나누어 주지 못했다. 수인 제국의 가장자리, 인간의 영토와 맹수들의 숲이 맞닿은 경계선에 자리 잡은 작고 허름한 오두막. 그곳이 바로 르네가 차원이동을 한 뒤 홀로 일구어 낸 작은 베이커리였다.
타닥, 타다닥.
낡은 벽난로 속에서 마른 참나무 장작이 붉은 불꽃을 튀기며 제 몸을 태웠다. 갓 구워진 밀가루의 구수함과 달콤한 버터의 향기가 좁은 주방을 조심스럽게 채워 나갔지만, 르네의 마음은 향기만큼 포근하지 못했다.
“여기서 진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르네는 밀가루가 하얗게 묻은 손을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영양사로 일하며 매일같이 식단을 짜고, 칼로리를 계산하고, 식자재 단가를 맞추기 위해 머리를 싸맸던 삶이었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이름조차 생소한 이계의 안개 숲 한가운데 던져져 있었다. 가끔 창밖으로 어른거리는 거대한 그림자들은 뼈가 시리도록 날카로운 야생의 기운을 풍겼다.
영양사로서 쌓아 올린 영양학 지식과 식자재 관리법은 이 야만의 숲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다. 맹수 수인들이 다스리는 제국에서 나약한 인간 여성이 살아남기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보다 위태로운 일이었다.
그때였다.
징-.
귓가를 맑게 울리는 가는 진동음과 함께, 르네의 시야 한가운데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공기 중에 흩날리던 안개 입자들이 한데 모여 몽글몽글한 빛의 실타래를 자아내더니, 이내 빳빳하고 고풍스러운 가죽 장부의 형태를 갖추어 허공에 둥실 떠오른 것이다. 가죽 표지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영혼의 가계부 (Soul Ledger)]
“이게…… 뭐지?”
르네가 멍하니 손을 뻗어 장부를 만지려 하자, 책장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스스로 펼쳐졌다. 종이의 질감은 만져지지 않았지만,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글씨들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보유 마력: 100/100] [금일 재고 상태: 밀가루 3포대, 정제 버터 2통, 야생 꿀 1병] [※ 영혼의 가계부는 대상의 심리적 결핍과 영혼의 트라우마를 수치화된 ‘허기 점수’로 보여주며, 이를 치유할 맞춤형 ‘힐링 푸드 레시피’를 제공합니다.]
가계부의 하단에는 작은 저울 그림과 함께 ‘등가교환’이라는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르네의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영혼의 허기짐을 시각화하고, 그것을 채워 줄 레시피를 설계해 주는 경영 기능이라니. 하지만 놀라움에 취해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삐-! 삐-! 삐-!
갑자기 눈앞의 장부가 붉은빛으로 사납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명이 들릴 듯한 경고음이 르네의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
[위험! 극도의 영혼 결핍 및 마력 폭주 개체 접근 중!] [타겟의 허기 점수: 99/100 (아사 직전 및 자아 붕괴 단계)] [거리: 전방 5미터, 앞마당]
“어, 어?”
르네는 반사적으로 주방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안개가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지만, 그녀의 시선은 마당 한구석, 말라비틀어진 수풀 사이에 멈췄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털뭉치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몽글몽글한 황금빛 털을 가진,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아기 사자 수인이었다. 하지만 그 귀여운 모습과 달리, 아이의 몸은 끔찍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기……?”
르네는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아기 사자의 상태는 처참했다. 조그만 발목과 등덜미를 따라 시커먼 마력의 불꽃이 뱀처럼 비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력이 폭주하면서 아이의 몸이 점점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으, 으응…… 아파…….”
아이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홍빛이어야 할 젤리 발톱은 흙먼지와 굳어 버린 핏방울로 가득했고, 파르르 떨리는 작은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르네의 눈앞에 다시 한번 가계부의 인터페이스가 겹쳐 보였다.
[이름: 루루 (사자 수인)] [상태: 마력 순환계 파괴, 전쟁 트라우마로 인한 극심한 미각 소실 및 감각 마비] [현재 영혼 결핍도: 99% (구제 불능 수준)] [추천 레시피: 마력 중화 우유 식빵]
[※ 레시피 실체화 조건: ‘감정의 등가교환’을 실행하십시오.] [제물로 바칠 기억: 당신이 과거 가장 외롭고 쓸쓸했던,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던 기억 중 하나.]
르네의 숨이 턱 막혔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진득하고 어두운 상자가 억지로 열리려는 듯 가슴 통증이 밀려왔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홀로 고아가 되었던 날. 친척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텅 빈 방바닥에 홀로 누워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던 기억.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며 ‘모든 관계는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마음의 벽을 쌓았던 그 서글픈 유년의 조각들.
‘또 그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거야?’
르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계약인가.
하지만 눈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작은 생명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작은 귀가 힘없이 뒤로 누워 있고, 흙투성이가 된 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하는 모습이 르네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바칠게. 가져가.”
르네가 나직하게 속삭인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듯한 강렬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머릿속의 한 구석이 하얗게 지워지며, 뼈가 시릴 정도의 차가운 외로움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등가교환 완료. ‘마력 중화 우유 식빵’ 레시피가 실체화됩니다.] [제빵사의 영혼 소모율: 45%. 조리 후 극심한 가위눌림 및 탈진이 예상되오니 주의하십시오.]
르네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루루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사자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는 아이를 따뜻한 벽난로 옆 담요 위에 뉘었다. 그리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었다. 가계부의 지시에 따라 손을 움직였다.
하얀 밀가루를 아낌없이 체에 치고, 숲에서 채취한 신선한 산양유를 따뜻하게 데워 섞었다. 반죽을 치대기 시작하자, 르네의 손끝에서 은은한 백색 마력이 흘러나와 밀가루 입자 사이사이에 스며들었다.
탁, 탁, 타닥.
반죽이 도마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좁은 빵집에 울려 퍼졌다. 르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영혼을 깎아내는 고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는 반죽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오븐 속에서 빵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식빵의 표면은 마치 갓 구워낸 햇살처럼 따스한 금빛을 띠었다. 오븐 틈새로 흘러나온 향기는 몽글몽글하고 달콤해서,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깊은 곳의 응어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다 됐다…….”
오븐 장갑을 끼고 갓 구워진 식빵을 꺼냈다. 쟁반 위에 올려진 식빵은 만지면 사그라질 듯 보드랍고 폭신해 보였다.
르네는 서둘러 식빵을 들고 루루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누워 있는 루루의 목덜미 부근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르네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이의 목에 걸린 줄안경 모양의 목걸이를 확인했다. 목걸이 끝에는 톱니바퀴 모양의 금속 칩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사자 가문의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칩이었다. 하지만 마력 폭주의 여파인지, 칩의 절반이 날카롭게 깨져 나가 있었다.
‘이건…… 꽤 귀해 보이는데.’
직감적으로 비상한 물건임을 알아챈 르네는 일단 그 깨진 문양 칩을 조심스럽게 풀어 자신의 에이프런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리고 식빵의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큼지막하게 떼어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얗고 폭신한 식빵 속살은 마치 구름을 한 조각 떼어낸 듯했다. 고소한 우유 냄새와 달콤한 꿀 향기가 방 안 가득 진동했다.
“루루야, 정신 차려 봐. 이거 한 입만 먹어보자.”
르네는 아이의 턱을 조심스럽게 받치고, 굳게 닫힌 입술 사이에 식빵 속살을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식빵의 따뜻한 온기와 달콤한 향이 루루의 감각을 자극하자, 아이의 코끝이 찡긋거렸다. 이윽고 작은 입술이 꼬물거리며 식빵 조각을 머금었다.
우물, 우물.
아기 사자의 조그만 볼이 실룩거리며 움직였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치유 프로세스 작동 중.] [루루의 마력 폭주율: 95% -> 80% -> 60% -> 35%] [영혼의 허기 점수 극적인 하강!]
아이의 몸을 옥죄고 있던 시커먼 마력의 불꽃들이, 식빵이 입안에서 녹아내림과 동시에 하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굳어 가던 사지 근육이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렸고, 거칠던 숨소리가 점차 규칙적이고 평온한 아기의 숨소리로 바뀌었다.
“아…… 마, 맛있다아…….”
루루가 감았던 눈을 가늘게 떴다.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르네를 향했다.
아이의 뺨에는 건강한 핏기가 돌기 시작했고, 먼지투성이였던 털들이 다시금 몽글몽글하고 윤기 나는 황금빛으로 살아났다.
“으응…… 웅…….”
루루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르네의 손가락에 조그만 머리를 비벼 댔다. 분홍빛 젤리가 달린 앞발로 르네의 옷자락을 꾹꾹 누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가계부의 수치가 초록색 안전 지대로 들어오는 것을 본 르네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핑 돌고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는 영혼의 몸살이 찾아왔지만,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치료된 거구나. 다행이다.’
하지만 평화는 찰나였다.
루루가 르네의 스커트 자락을 작은 발톱으로 꼭 쥐며 “가지 마아……” 하고 웅얼거리는 순간.
쿠우웅-!
안개의 숲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빵집의 얇은 유리창을 사정없이 울렸다.
동시에 숲의 안개가 찢겨 나가며, 무겁고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대지를 짓눌렀다.
자갈이 자지러지게 구르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부딪히는 서슬 퍼런 쇳소리가 문밖을 가득 채웠다.
창밖으로 비쳐 든 것은, 한두 마리가 아닌 거대한 사자 기사들의 사나운 실루엣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올 듯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고 차가운 금빛 마력의 파동이 빵집의 낡은 나무 문을 사정없이 압박해 왔다.
“안에 있는 인간은 당장 문을 열고 나와라!”
숲을 찢는 듯한 우렁찬 사효(獅吼)가 문틈을 타고 들어와 르네의 심장을 얼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