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콰아앙!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바위 파편이 폭우를 뚫고 뺨을 스쳤다. 설백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 부러진 독안귀의 목줄기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바닥, 그리고 그 너머에 박힌 철전(鐵箭)으로 향해 있었다.

은빛 서광을 뿜어내는 묵직한 철전의 깃에는 빗물에 젖지 않는 특수한 비단 천이 매달려 있었다. 세 개의 붉은 인장. 남궁세가, 무당파, 하북팽가. 천하를 삼분하는 거두들의 낙인이 찍힌 중수 통牒狀(중수통첩장)이었다.

설백현의 손가락이 철전에 감긴 비단을 거칠게 낚아챘다. 천에 적힌 글귀가 빗물과 뒤섞여 그의 안광에 일렁였다.

[마교의 잔당이자 천하의 공적인 천살신마의 후예 설백현은 들으라. 정파 연합의 이름으로 백화곡을 마도의 성지로 규정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 백화문을 멸문에 처하노라. 순순히 투항하여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곡 내의 생명체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천하의 안녕이라……."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거친 빗소리를 뚫고 흘러나왔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비단 천이 짓이겨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치밀어 올랐다. 사부님이 살아생전 강호를 종횡할 때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던 쥐새끼들이었다. 그가 타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의의 탈을 쓰고 기어 나와 시체를 뜯어먹으려 들고 있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이토록 철면피 같은 자들이 정파의 영수라 자처하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사부님이 남긴 은원이 죄악이라면, 저들이 행하는 위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폭우가 쏟아지는 협곡 입구의 장막을 걷어내며 한 무리의 인영들이 나타났다.

도포 자락을 단정히 여몄으나 눈빛에는 탐욕을 감추지 못한 자들. 앞장선 사내는 자줏빛 도포를 입은 중년인으로, 무당파의 방계 문파인 청운검파(靑雲劍派)의 문주, 반태형(班泰亨)이었다. 그의 뒤로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가신들이 삼엄한 기세로 검자루를 쥔 채 도열했다.

반태형이 걸음을 멈추고 설백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뒹구는 독안귀의 시신에 닿자, 미세한 경련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헛기침을 하며 위엄 서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천살신마의 제자 설백현이렷다. 정파 연합의 대의를 받들어 네놈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러 왔다."

"자비라 하였소?"

설백현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빗소리에 묻힐 듯 나직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력은 반태형의 고막을 징처럼 울렸다.

"네 사부 천살신마가 과거 우리 정파에 끼친 해악과 채무는 하늘을 찌른다. 무당의 비급을 훔쳐 가고, 팽가의 상단을 약탈했으며, 남궁의 영약을 강탈한 죄! 그 인과의 채무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백화곡의 영맥과 사문 소유의 모든 재물을 압수할 것이다. 순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반태형이 품에서 두툼한 서첩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사부가 과거에 입은 은원이라 주장하는 문주들의 과도한 재물 요구서였다. 백화곡 전체를 넘기고도 모자라, 평생을 노예처럼 부역해야 갚을 수 있는 터무니없는 수치들이 적혀 있었다.

설백현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급을 훔쳤다라……."

그것은 거짓이었다. 무당의 태극혜검은 사부님이 그들의 전대 장문인의 목숨을 구해주고 감사의 뜻으로 기증받은 구결이었고, 팽가의 상단은 비적들에게 몰살당할 위기에서 사부님이 구해내어 호송을 도왔던 것이었다. 남궁의 영약 역시 그들의 가주가 불치병에 걸렸을 때 사부님이 의술을 베푼 대가였다.

세상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과거의 영웅적인 의협을 추악한 약탈로 둔갑시켜 자신들의 자원 탐욕을 채우려는 속셈이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군."

설백현의 나직한 일갈에 반태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알량한 마두의 새끼가 감히 누구를 모욕하는가! 정파 연합의 준엄한 심판 앞에서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검을 뽑아라! 네놈의 사지를 잘라 조사당 앞에 무릎 꿇려 주마!"

반태형의 외침과 함께 서른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막이 폭우 속에서 번뜩였다.

설백현은 검자루에 손을 얹지도 않았다. 단지 그들을 향해 천천히 오른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쿵!

대지가 울렸다.

설백현의 발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그가 품고 있던 신마역천결의 진기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형의 검풍(劍風)이 반경 십 장의 빗줄기를 통째로 증발시켰다.

콰아아앙!

"끄아악!" "이, 이게 무슨……?!"

비명 횡사가 협곡을 가득 채웠다. 검을 겨누고 서 있던 무인들이 단 한 걸음의 기세에 밀려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들의 검은 허무하게 부러졌고, 신형은 암벽에 처박히며 선혈을 토해냈다.

반태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펼치려던 청운검식은 시작하기도 전에 기세에 짓눌려 산산조각이 났다.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호흡이 막힌 그가 비틀거리는 찰나, 설백현의 신형이 귀신처럼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스슥.

"억……!"

반태형의 목이 설백현의 오른손에 움켜쥐어졌다. 단단한 무쇠 집게에 걸린 듯,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설백현은 반태형의 거구를 단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커흑! 끄, 끄으……!"

"사부님의 은혜를 채무로 둔갑시킨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설백현의 목소리는 지옥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며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내면의 심마가 그의 이성을 잠식하려 요동치고 있었다.

"내 똑똑히 경고하겠다. 사부님이 너희에게 베푼 은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피의 채무만이 남았을 뿐이다."

콰직!

설백현은 반태형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린 뒤, 그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반태형은 진흙 바닥을 구르며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가라. 가서 네놈들의 상전에게 전해라. 백화곡에 발을 들이는 자는,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이 골짜기의 거름이 될 것이라고."

비참하게 깨진 정파의 무인들은 부러진 검을 줍지도 못한 채, 피를 흘리며 협곡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설백현의 등 뒤로,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 때려 누웠다.

* * *

패퇴한 무리들을 뒤로하고 백화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설백현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곡 입구의 낡은 석등. 이끼가 잔뜩 낀 화강암 표면에 아주 미세하게 각인된 기호가 그의 매서운 안광에 포착되었다.

검은 피가 스며든 듯한 거미 모양의 흔적.

‘흑혈표식(黑血表式).’

사마혈의 최측근 첩자가 백화곡 내부에 남겨둔 은밀한 독문 표식이었다. 설백현은 석등 앞으로 다가섰다. 표식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미세한 열기와 함께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향이 느껴졌다.

이 표식은 단순히 길을 밝히는 이정표가 아니었다. 표식 자체에서 방출되는 미량의 파혈독(破血毒)이 공기 중에 퍼져, 곡 내부의 방어 결계를 서서히 좀먹고 적혈맹의 살수들에게 안전한 침투 경로를 안내하는 독문의 쐐기였다.

"감히 사문 안마당에 이런 수작을 부려놓았구나."

설백현은 눈을 감고 사부의 가르침을 되짚었다. 만독에 불침하는 신마역천결의 진기를 손가락 끝으로 모았다. 붉고 검은 내력이 손가락 끝에서 실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표식의 중앙, 거미의 눈에 해당하는 부위를 강하게 압박했다.

치이이익!

석등 표면이 타들어 가며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설백현은 도리어 자신의 내력을 표식 내부로 역류시켰다. 첩자가 심어놓은 독의 흐름을 역으로 추적하여, 그 독기를 증폭시킨 뒤 반대 방향으로 송출하는 해독이자 역독(逆毒)의 수법이었다.

파지직!

석등에 새겨진 흑혈표식이 완전히 백색으로 탈색되며 바스러졌다. 이 표식과 연결되어 백화곡 주변을 배회하던 적혈맹의 정찰조들은, 지금쯤 자신들이 심어놓은 독기가 역류하여 혈관이 터져나가는 고통을 겪고 있을 터였다. 배후 공급망과 정보망을 단숨에 차단하는 호쾌한 역습이었다.

그러나 대가가 찾아왔다.

"윽……!"

표식을 정화하고 내력을 회수하는 순간, 설백현의 가슴이 옥죄어왔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앞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암전되기를 반복했다. 신마역천결 2성을 돌파한 이후, 그의 내면에 도사린 심마는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사부님…….’

기억 속 사부의 얼굴이 흐려졌다. 함께 낙루암에서 군고구마를 나눠 먹으며 호탕하게 웃던 사부의 따뜻한 눈빛이, 얼어붙은 얼음 조각처럼 깨져나갔다. 정을 갈구할수록 감정을 영구히 잃어버리는 역천의 형벌.

"안 돼…… 이것마저 잃을 수는 없다……!"

설백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무릎을 꿇었다. 폭주하는 진기가 주변의 돌바닥을 내리쳤다. 콰과광! 대지가 비명을 질렀고, 그의 안광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마수의 그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폭주의 전조였다.

바로 그 순간, 거친 빗줄기를 뚫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그의 등에 닿았다.

"사제! 정신 차려야 하네!"

혜우였다. 그녀는 폭주하는 설백현의 마기에 휩쓸려 옷자락이 찢어지고 피부에 상처가 나면서도, 결코 그를 놓지 않았다. 그녀의 하얗고 가녀린 손이 설백현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품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조그만 돌 조각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받아주게."

그것은 백화문의 잃어버린 옛 정화 무구이자 감정 제어기인 ‘빙백한령주(氷魄寒靈珠)의 쪼개진 파편’이었다. 혜우가 목숨보다 소중히 간직해 온 문파의 마지막 유산.

그녀가 파편을 설백현의 목에 걸어주자, 상상을 초월하는 극도(極度)의 한기가 설백현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스스스스…….

끓어오르던 붉은 마기가 한기에 눌려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던 뇌수가 차갑게 식어내리며, 붉게 물들었던 시야가 맑아졌다. 심마의 진정 작용이었다.

설백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에 걸린 푸른 파편을 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혜우의 따스한 체온과 사문을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혜우 사형……."

"살아남아야 하네, 사제. 자네가 무너지면 백화문도 구원받지 못해."

혜우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설백현은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 한구석에서 미약하게나마 요동치는 온기를 느꼈다. 이 파편이 있는 한, 아직은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 * *

낙루암 내실.

한령주의 한기로 심마를 다스린 설백현은 책상 위에 반태형에게서 빼앗은 중수 통첩장과 정파의 재물 요구서를 펼쳐놓았다.

그의 냉철해진 지성이 요구서에 적힌 수치들을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과연…… 위선자들의 계산법답군."

요구서에 적힌 항목들은 모두 허상이었다. 오히려 그 이면에는 사부님이 정파 놈들에게 걸어두었던 미회수 채권들의 흔적이 숨겨져 있었다.

"남궁세가가 주장하는 영약 강탈의 해인 건륭(乾隆) 삼십년, 사부님은 남궁의 전대가주에게 천수단(天壽丹)을 전수하셨지. 그 약값으로 남궁세가는 매년 백화문에 삼천 냥의 상납금을 바치기로 맹약했다. 무당파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태극혜검의 구결은, 사부님이 무당의 장문인에게 빌려준 천마검결의 초식과 교환된 것이다."

저들은 사부님이 남긴 은혜의 채권을 완전히 말소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위장하여 백화곡의 영맥을 공짜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미회수 채권의 가치는 자그마치 십만 골드에 달하는군. 놈들이 우리에게 빚을 청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들의 숨통을 쥐고 흔들어야 할 판이다."

설백현의 눈동자에 차가운 이채가 돋아났다.

특히 그의 시선은 책상 한구석에 놓인 가죽 지도에 머물렀다. 그것은 지난번 남궁가 고수들을 처단하며 확보했던, 남궁휘가 밀수로 확보하려는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위치 지도였다.

"남궁휘…… 네놈들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그 생명줄을, 내가 먼저 끊어놓겠다."

적령화는 쇠락해가는 남궁세가를 지탱할 유일한 자금줄이자 영약의 원료였다. 그것을 선점하는 순간, 남궁휘는 스스로 무릎을 꿇게 되리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르릉! 쿠릉!

하늘이 무너질 듯한 뇌성이 낙루암을 흔들었다. 그리고 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온몸이 피와 빗물로 젖은 백화문의 전령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사, 사제 큰일났습니다……!"

전령은 바닥에 엎어지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의 공포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남궁가 본가에서…… 차기 가주 남궁휘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설백현의 안광이 좁혀졌다.

"남궁휘가?"

"예! 남궁휘가 이끄는 대규모의 철혈 봉쇄 부대(鐵血封鎖隊)가 이미 본가를 출발하여 백화곡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곡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백화문을 완전히 고사시키려 한답니다!"

남궁세가의 진정한 칼날이 드디어 백화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설백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걸린 빙백한령주의 파편이 그의 심장을 차갑게 울렸다. 빗소리는 더욱 웅장해졌고, 협곡 너머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철혈의 파도가 낙루암의 결계를 거칠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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