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남궁휘가?"

설백현의 음성은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사부의 임종을 지킨 낙루암 내실에는 오직 거친 빗소리와 전령의 가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는 마치 수만 개의 화살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바닥에 엎드린 전령의 등 가죽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전령이 흘린 핏물과 빗물이 뒤섞여 바닥의 차가운 석판 위로 번져 나갔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가 직접 움직였다는 소식은 백화문의 마지막 생명줄을 끊어놓겠다는 선고와 다름없었다.

"남궁휘가 이끄는 철혈봉쇄대(鐵血封鎖隊)라……."

설백현은 가만히 가슴팍을 짚었다. 목에 걸린 빙백한령주의 파편이 살을 뚫고 들어올 듯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신마역천결 2성을 돌파하며 영천의 독을 막아냈던 그 밤 이후, 심장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기묘한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공포도, 당혹감도 없었다. 오직 빙하처럼 차갑고 투명한 이성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옆에 서 있던 혜우가 창백해진 얼굴로 설백현의 소매를 붙잡았다.

"백현아, 남궁휘의 철혈봉쇄대는 세가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다. 그들이 곡을 포위한다면 우리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가 된다. 당장 피해야 한다. 사부님의 유해를 모시고 일단 백화곡을 빠져나가야……."

"피하지 않습니다."

설백현의 어조에는 단 한 줄기의 떨림도 없었다. 혜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과 같아 그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사부님의 유해는 이곳 조사당에 합사되어야 합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에 대한 갈구이자, 동시에 그를 옥죄는 심마(心魔)적 집착이었다. 감정이 마모될수록 사부를 향한 의무감과 문파 재건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은 더욱 또렷해져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

사흘 뒤.

백화곡을 에워싼 산맥의 능선마다 붉은 깃발이 장막처럼 늘어섰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철혈봉쇄대는 백화곡으로 통하는 오로(五路)를 완벽히 장악했다. 험준한 협곡의 틈새, 가파른 절벽 길, 심지어 계곡물이 흘러드는 수로에 이르기까지 철마(鐵馬)를 탄 무인들이 겹겹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한 경계를 섰다.

새 한 마리, 풀잎 하나조차 백화곡 안팎을 넘나들 수 없는 철통같은 포위망이었다. 소금과 식량, 약재의 유입이 완전히 차단된 백화곡은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형국이었다.

포위망의 중심인 북쪽 관문. 거친 가죽 천막 안에서 한 사내가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남궁휘였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눈 밑에는 짙은 피로의 그늘이 져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터져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대남궁세가의 후계자가 이토록 비열한 고사 작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소공자, 이 일은 강호의 무인들이 손가락질할 만한 고육지책(苦肉之策)입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늙은 가신 남궁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화문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명문정파인 우리가 이토록 야만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굶겨 죽이려 한다면, 훗날 무림맹에서 우리 세가의 의기를 어찌 보겠습니까?"

남궁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오만이 아닌, 벼랑 끝에 선 자 특유의 처절한 신념이 서려 있었다.

"의기라 하셨습니까, 상 숙부."

남궁휘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가문의 비고(祕庫)가 바닥을 드러내고, 방계의 장로들이 내 아버님의 가주 자리를 끌어내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당장 다음 달에 세가의 가신들에게 지급할 녹봉조차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 상황에서 무림맹의 눈총이 무슨 상관이며, 강호의 도리가 우리 식솔들을 먹여 살려 준단 말입니까?"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백화곡의 영맥을 차지하고, 저들이 숨겨둔 영약을 손에 넣어야만 남궁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수치와 오명은 내가 온전히 짊어질 것입니다. 설령 내 손이 똥물에 더러워질지언정, 나는 남궁세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문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숭고하면서도 잔혹한 집착이었다. 남궁휘는 지도 위에 그려진 백화곡의 심장부, 낙루암을 검지로 강하게 내리눌렀다.

"백화문의 잔당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기어 나올 때까지, 단 한 홉의 곡식도 들어가선 안 된다. 만약 포위망을 뚫으려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즉시 격살하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가신 남궁상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홀로 남은 남궁휘는 가슴팍에서 가죽으로 된 지도를 꺼내 들었다. 가문 비고의 마지막 자금을 털어 밀수로 확보하려는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은밀한 매장지가 표시된 지도였다.

"이 적령화만 손에 넣는다면…… 세가는 다시 일어선다. 백화문, 네놈들을 딛고서라도 말이다."

***

같은 시각, 낙루암의 어두운 밀실.

설백현은 남궁휘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적령화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지난번 남궁가 고수를 처단하고 빼앗은 전리품이었다.

그의 곁에서 혜우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백현아, 남궁휘가 이끄는 봉쇄 부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곡 안의 양식은 보름을 버티기 힘들 정돈데, 놈들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고사할 것이다."

설백현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자그만 칠기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검붉은 빛을 띠는 기묘한 부적과 같은 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흑혈표식(黑血標式)입니다."

설백현의 손가락이 목패의 표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적혈맹의 배신자 사마혈의 최측근들이 백화곡 내부에 침투할 때 사용하던 독문 표식이지요. 이 목패에는 미세한 기화성 독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반 무인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적혈맹원들의 코에는 귀신같이 걸려드는 독특한 혈향(血香)을 풍깁니다."

이것은 설백현이 지난 전투에서 첩자 주강을 제압하고 얻어낸 결정적인 전리품이자, 아직 적들이 회수하지 못한 아킬레스건이었다.

"사마혈과 남궁세가는 겉으로는 손을 잡은 듯하나, 속으로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궁휘가 이끄는 철혈봉쇄대의 외곽 경계망 중, 서쪽의 숲지대는 적혈맹에서 파견된 사파 무인들이 담당하고 있지요."

설백현의 눈동자에 차가운 이채가 서렸다.

"이 흑혈표식의 독을 역용(逆用)할 것입니다."

"역용이라니?"

"이 표식에서 추출한 독 성분을 정제하여, 해독 약초인 빙초(氷草)와 배합하면 일시적으로 시각과 후각을 마비시키는 역독(逆毒)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적혈맹 무인들은 자신들의 표식이라 믿고 경계를 풀겠지만, 그들이 이 독향을 맡는 순간 신경이 마비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설백현은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마친 상태였다. 감정이 소실된 자리에 들어앉은 극도의 효율성과 냉혹한 지략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공포? 남궁세가의 대군이 압박해오는 상황에서도 그의 심장은 분당 오십 회를 넘지 않으며 고요하게 뛰고 있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거세된 무인은 그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놈들이 포위망을 굳건히 다졌다고 자만하는 바로 지금이, 가문의 생명줄인 적령화의 매장지로 가는 길을 뚫을 유일한 기회입니다."

"백현아, 하지만 밖에는 수백 명의 정예가……."

"상관없습니다."

설백현은 빙백한령주의 파편을 옷자락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얼굴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들의 경계는 제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합니다."

***

스스스스.

장대비가 대지를 사정없이 두들기는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백화곡 서쪽 능선을 무겁게 덮 누르고 있었다.

남궁세가와 적혈맹의 연합 초소들이 오십 보 간격으로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횃불이 빗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갑옷을 단단히 챙겨 입은 무인들이 칼자루를 쥔 채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쯧, 비가 왜 이렇게 쏟아지는 거야."

"소리 낮춰라. 가주께서 눈을 부릅뜨고 계신다. 쥐새끼 한 마리라도 놓쳤다간 목이 달아날 줄 알아."

적혈맹 소속의 보초 두 명이 투덜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발밑, 진흙탕 속에 은밀히 묻어둔 흑혈표식에서 미세한 기화성 독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설백현이 미리 침투하여 살포해 둔 역독이었다. 적혈맹원들은 자신들의 표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라 여겨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지만, 그 연무를 들이마시는 순간 그들의 감각은 서서히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성(無聲).

빗소리와 바람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절벽의 경사면을 따라,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천살신마의 신묘한 보법, 묵영신보(墨影神步)였다.

설백현의 신형은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한 듯, 진흙탕을 밟으면서도 단 한 방울의 진흙조차 튕기지 않았다. 빗방울이 그의 어깨에 닿기 전에 신형이 이미 저만치 앞서 나가 있었다.

"어……?"

보초 중 한 명이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목뼈가 회전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나타난 하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짚었다.

툭.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지극히 가벼운 타격. 하지만 손가락 끝에 실린 신마역천결의 음유한 내력이 보초의 대추혈을 완벽히 관통했다.

"윽……."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보초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설백현은 왼손으로 그의 몸을 부드럽게 받아 안아, 진흙 바닥에 소리 없이 뉘어 놓았다.

옆에 있던 다른 보초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설백현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의 코앞에 당도해 있었다.

"너……!"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설백현의 검지손가락이 그의 미간을 정확히 찔렀다. 뇌 속으로 파고든 한 기가 그의 이성을 즉시 얼려버렸다.

두 명의 무인이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일 호흡.

설백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귀신처럼 흐릿해지며 다음 초소를 향해 질주했다.

오십 보 밖의 초소. 보초 세 명이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밑에 모여 있었다.

스윽.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의 궤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보초들이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검자루에 손을 얹으려 한 찰나,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줄기 검은 묵령(墨影)뿐이었다.

파앗!

설백현의 신형이 그들의 사이를 번개처럼 관통했다. 그의 양손 끝에서 뻗어 나온 무형의 기경(氣勁)이 세 무인의 유혈을 정확히 짚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극의에 달한 저격이었다.

툭, 툭, 툭.

세 명의 몸이 동시에 굳어지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빗소리가 그들의 쓰러지는 소리를 완벽히 지워버렸다.

설백현은 쓰러진 적들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던 남궁세가의 포위망을 마치 안방 드나들듯 유유히 통과해 나갔다. 공포가 거세된 그의 마음은 얼음판처럼 고요했고, 그의 무공은 그 고요함 속에서 무자비할 정도의 정밀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적들의 촘촘한 경계선은 설백현이라는 존재 앞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는 무성의 질주. 그것은 밤의 지배자가 펼치는 잔혹한 독무(獨舞)와 같았다.

***

그렇게 서쪽 경계망을 완벽히 무력화하고 협곡의 심장부로 진입한 설백현은, 적령화가 숨겨진 절벽의 좁은 길목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곳만 통과하면 남궁휘가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밀수꾼들과 접선하기로 한 비밀 거점이 나올 터였다.

그때였다.

파아앗!

갑자기 협곡 절벽 위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특제 가공된 기름 횃불이었다. 붉은 불꽃이 장대비를 뚫고 활활 타오르며, 어두운 협곡 전체를 대낮처럼 밝혀 놓았다.

"거기까지다, 백화문의 쥐새끼."

절벽 위, 횃불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무인들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사내는 남궁세가의 정예 호위대장, 남궁철이었다. 그의 뒤로는 삼십여 명의 철혈봉쇄대 정예 고수들이 검을 뽑아 쥔 채 설백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검날이 횃불 빛을 받아 섬뜩한 은광을 흘렸다.

남궁철의 눈에 서린 살기가 폭우보다 매서웠다.

"가주님께서 네놈들이 흑혈표식을 역이용해 이쪽으로 올 것을 진작에 예측하셨다. 감히 남궁의 포위망을 우습게 보고 기어 나오다니,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쐐애액!

절벽 위에서 그들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밤하늘을 붉게 수놓았다. 남궁휘의 본진이 있는 곳까지 들릴 거대한 폭음이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좁은 협곡.

위에서는 수십 명의 정예 고수들이 검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는 포위망의 대군이 신호를 듣고 몰려올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설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포위한 적들을 올려다보았다.

빗물이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검자루로 향했다. 가슴 속 빙백한령주가 요동치며, 그의 뇌해 속에서 잠자던 신마역천결의 진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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