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딸랑! 딸랑! 딸랑!

백화곡 경계 진입로에 매달린 수십 개의 탐지 방울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비바람이 몰고 온 음산한 기운 속에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폭풍우조차 삼키지 못한 불길한 경고음이었다.

동굴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설백현의 시선이 가닿은 곳, 혜우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생존 제자 주강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손끝에서 소리 없이 흘러나온 은빛 침이 혜우의 등덜미를 겨냥하던 찰나였다.

번쩍!

뇌전이 동굴 입구를 내리치는 순간, 설백현의 신형이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커헉!"

단 한 발자국이었다. 바람을 찢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주강의 코앞으로 쇄도한 설백현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뼈와 뼈가 맞물려 으스러지는 기괴한 파열음이 동굴 벽을 타고 무겁게 울렸다. 주강의 손가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빛나던 독침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설백현은 주강의 손목을 꺾어 쥔 채, 그의 손바닥을 강제로 펼치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살을 파고들어 검붉게 안착한 초승달 모양의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흑혈표식(黑血標式)."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사마혈의 개가 되어 사문을 파는 맛이 어떠하더냐."

주강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소리쳤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흐윽!"

"2년 전, 사부님의 처소 주변을 서성이던 쥐새끼들에게서 이미 보았던 표식이다. 그때는 꼬리를 자르고 숨었겠으나, 오늘은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왔구나."

설백현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주강의 손목뼈가 완전히 바스러지며 비명이 동굴 천장을 때렸다. 그 반동으로 주강이 품고 있던 가죽 주머니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설백현은 왼손을 뻗어 주머니를 낚아채고는, 주강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퍼억!

신형이 꺾인 주강이 동굴 바닥을 구르며 피를 토했다. 그의 신형은 이내 차가운 바위벽에 부딪쳐 축 늘어졌다.

"백 사제!"

혜우가 안색을 굳히며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주강의 손바닥에 새겨진 흑혈표식과 설백현이 쥔 가죽 주머니에 머물렀다. 주머니 안에서는 기분 나쁜 비린내가 풍기는 병들이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주강이…… 적혈맹의 첩자였다니. 그렇다면 낙루암의 결계가 무너진 것도 이 아이가?"

"그렇겠지요."

설백현이 가죽 주머니를 혜우에게 툭 던졌다.

"사저, 적혈맹의 쾌자들이 곡 내부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남궁휘의 철기들이 입구를 막아선 틈을 타, 내부에서 우리 목을 베려는 수작입니다."

동굴 밖에서는 여전히 백화곡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군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기도와, 산등성이를 타고 소리 없이 내려앉는 적혈맹 쾌자들의 살기가 피부를 찔러왔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백화문은 그야말로 안팎으로 포위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혜우는 주머니 속의 약병들을 꺼내 코끝에 가져다 대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파혈독(破血毒)이야. 적혈맹 놈들이 즐겨 쓰는 음독이지. 기혈을 뒤틀어 심맥을 터뜨리는 무서운 독물인데, 주강 녀석이 이걸 곡 전역에 뿌려 우리를 마비시키려 했던 모양이야."

설백현의 눈동자가 깊게라앉았다. 그의 뇌리 속에서 2화에서 파악해 두었던 흑혈표식의 독성 정보와 해독법의 공식들이 빠르게 얽혀 들어갔다.

"사저, 백화곡 음지에 자생하는 백령초(白靈草)를 기억하십니까?"

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백령초는 강한 양기를 품고 있어 내상 치료에 쓰이는 영초잖아. 하지만 그 뿌리에는 미량의 독성을 정화하는 성분도 있지. 그런데 그건 왜?"

"파혈독의 주성분은 극음(極陰)의 성질을 지닌 귀정향입니다. 만약 이 파혈독이 백령초의 활성화된 약성과 강제로 결합하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의원으로서 한평생을 보낸 혜우의 눈동자가 순간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설백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백 사제, 그건……! 백령초의 양기가 파혈독의 음기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성의 기화를 극대화해 사방으로 퍼뜨리게 돼. 극과 극의 성질이 충돌하면서, 해독제조차 소용없는 기화성 맹독으로 변질되어 역류하게 된단 말이야. 흡입하는 즉시 폐부가 썩어 들어가는 극독으로!"

"그렇다면 이독제독(以毒制毒)이 가능하겠군요."

설백현의 어조에는 한 줌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그 독기가 곡 전체로 퍼지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해! 남의 독을 역 이용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우리에게는 낙루암의 바람길이 있습니다."

설백현이 동굴 깊숙한 곳, 천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환기 구멍을 가리켰다. 과거 천살신마가 수련할 때 발생하던 열기를 배출하기 위해 깎아 만든 천연의 바람길이었다.

"지금 폭풍우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독을 기화시켜 바람길로 흘려보내면, 독무는 정확히 곡 아래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적혈맹의 진형 위로 떨어집니다. 사저, 시간이 없습니다."

혜우는 설백현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응시했다. 그 눈빛 속에는 사문을 해치려는 자들을 향한 처절한 살의와, 기필코 살아남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부처의 자비를 베풀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알았어. 준비할 테니, 너는 시간을 벌어다 줘."

혜우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동굴 한구석에 쌓여 있던 건조된 백령초 더미를 가져와 주강의 파혈독 병을 깨뜨려 섞기 시작했다. 두 성분이 결합하자마자 치이익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검을 치켜세우며 폭풍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사부님의 무덤 앞을 더러운 피로 더럽히게 하지는 않겠다."

스스스슷!

폭우가 쏟아지는 협곡의 절벽 사잇길. 검은 옷을 입은 적혈맹의 쾌자 수십 명이 빗줄기를 가르며 신형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은밀하게 독이 발린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쾌자 대장이 손짓을 보내려는 찰나였다.

쿠웅!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설백현이었다.

"누구냐!"

쾌자 대장의 경악 섞인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설백현의 묵검이 어둠 속에서 반호를 그리며 뻗어 나갔다.

사각!

검강이 비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지극히 짧고 간결했다. 선두에 서 있던 쾌자 세 명의 목이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선혈이 폭우에 씻겨 내려가기도 전에, 설백현은 이미 다음 적의 흉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 이 자식이 설백현이다! 사방을 에워싸라! 살진(殺陣)을 펼쳐라!"

적혈맹의 무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설백현을 겹겹이 포위했다. 십여 자루의 검과 비수가 사방에서 동시에 그의 요혈을 겨냥해 쇄도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 절체절명의 형국이었다.

하지만 설백현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단전에서 신마역천결 2성의 극음 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감각이 찾아왔다. 정(情)을 잃어가는 고통이 육신을 지배할수록, 그의 무공은 더욱 예리하고 잔혹해졌다.

"신마역천(神魔逆天)――"

설백현이 묵검을 바닥을 향해 강하게 내리꽂았다.

콰과과광!

검끝에서 시작된 검은 한기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빗방울이 공중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날카로운 얼음 파편으로 변하더니, 포위해오던 적들의 전신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끄아악!"

"손, 손이 얼어붙는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진이 전개되기도 전에 초토화되는 광경이었다. 설백현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한기가 서린 검을 휘두르며 적들의 목숨을 수확해 나갔다. 그의 동작은 번잡한 사설 없이 오직 죽음이라는 목적만을 고도로 압축해 놓은 듯했다.

바로 그대였다.

슈우우우――

곡 위쪽, 낙루암의 바람길에서부터 짙은 자색의 연기가 폭풍우를 타고 내려앉기 시작했다. 비바람에 흩어질 법도 한 연기였으나, 백령초의 약성과 결합한 파혈독의 독무는 빗물조차 집어삼키며 무거운 안개처럼 계곡 바닥으로 깔려 내려갔다.

"어? 이게 무슨 연기지?"

적혈맹의 쾌자 중 한 명이 안개를 들이마시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확장되었다.

"커, 헉! 끄으으……!"

그는 목을 움켜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입과 코, 그리고 눈귀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독이다! 적들이 독을 풀었다!"

"말도 안 돼! 이건 우리 맹의 파혈독이잖아! 어째서 우리 독이 여기에……!"

비명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적들을 은밀히 암살하기 위해 지니고 다녔던 독이, 역으로 최악의 살인무기가 되어 자신들의 폐부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아아악! 살려줘! 해독제가…… 해독제가 듣지 않아!"

쾌자들이 품에서 다급하게 해독 약약을 꺼내 삼켰으나, 이미 변질된 맹독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삼킨 약약은 오히려 독성을 촉진해, 내장을 녹여내리는 기폭제가 될 뿐이었다.

이독제독의 결과는 참혹했다.

자신들이 판 무덤에 자신들이 빠진 꼴이었다. 백화곡을 피로 물들이려던 적혈맹의 최정예 척살조는, 자신들이 맹신하던 독무 속에서 피를 토하며 자멸해 갔다.

설백현은 그 아비규환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독무는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도는 신마역천결의 차가운 진기에 가로막혀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사마혈."

설백현이 검을 고쳐 쥐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네놈이 사부님을 배신하고 얻은 그 알량한 권세가, 얼마나 나약한 모래성 위에 세워진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 네놈들이 뿌린 모든 은원은, 이 설백현의 검끝에서 피로써 청산될 것이다."

"이, 몬스터 같은 놈……!"

적혈맹의 선봉대장이자, 갈평과 함께 침투를 지휘했던 고수 독안귀(獨眼鬼)가 부러진 도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자색 독기에 중독되어 검푸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사마혈 맹주님께서…… 결코 너를 살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백화문은 오늘로 끝이다……!"

"그보다 네놈의 목숨이 먼저 끝날 것이다."

설백현의 신형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스각!

그것으로 끝이었다. 독안귀의 목이 허공을 돌며 잘려 나갔고, 그의 거구는 진흙 바닥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검은 피. 설백현은 검을 거두며 차갑게 식어가는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이 마모되어 가는 가슴속에서, 오직 사문을 지키겠다는 일념만이 번뜩이는 안광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우우우욱!

귓전을 찢는 파공음이 폭풍우를 뚫고 날아들었다.

설백현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옆으로 비껴섰다. 찰나의 순간, 은빛 서광을 뿜어내는 거대한 철전(鐵箭) 한 대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 뒤쪽의 거대한 암벽에 깊숙이 박혔다.

콰아앙!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먼지가 일었다.

설백현의 시선이 바위에 박힌 철전의 끝부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빗물에 젖지 않는 특수한 비단 천이 매달려 있었다. 비단 천의 중앙에는 붉고 선명한 세 개의 거대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무당파(武當派). 하북팽가(河北彭家).

천하의 기둥이라 불리는 정파의 거두들의 인장이 찍힌 중수 통첩장(衆讐通牒狀)이었다.

비단 천에 적힌 글귀가 설백현의 눈동자에 차갑게 박혔다.

[마교의 잔당이자 천하의 공적인 천살신마의 후예 설백현은 들으라. 정파 연합의 이름으로 백화곡을 마도(魔道)의 성지로 규정하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 백화문을 멸문(滅門)에 처하노라. 순순히 투항하여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곡 내의 생명체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남궁휘가 이끄는 군세 뒤로, 정파 연합의 거대한 그림자가 백화곡을 향해 드리워지고 있었다.

설백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넘실거리는 검은 심마의 불꽃이 더욱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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