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에 젖어 얼룩덜룩해진 가죽 종이 위로 붉은 밀랍 수인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마혈. 사부를 배신하고 그 시신마저 욕보이려 했던 적혈맹의 주인이 찍은 낙인이었다.
혜우는 그 불길한 표식을 쥔 채, 호흡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서신이 가늘게 흔들렸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제 목을 짓누르는 듯한 질식감에 턱을 치켜들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차가운 낙수 한 방울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 한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백현 아우님…… 이것 좀 보십시오. 남궁세가와 적혈맹의 음모는 단순한 영맥 찬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백화곡 내부에……."
혜우의 목소리가 젖은 흙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녀가 가리킨 서신의 말단에는, 믿기 힘들 만큼 상세한 백화곡 내부의 초소 위치와 경비 주기가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정찰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신의 여백 한구석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검은 심장 모양의 문양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흑혈표식(黑血標式).
2화에서 설백현이 낙루암 초입의 바위바닥에서 발견했던, 사마혈의 독문 첩자들이 남기는 표식이었다. 그 표식이 정진의 품에서 나온 연합 밀서에까지 선명히 찍혀 있다는 것은, 백화문 내부의 첩자가 적혈맹의 수뇌부와 직접 선을 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정파의 허울을 쓰고 사파의 거두와 손을 잡았다니. 천하의 남궁이 이토록 추악한 짓을 벌일 줄은……."
혜우가 분통을 터뜨리며 서신을 움켜쥐었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거래하겠다는 남궁휘의 절박함이 만들어 낸 기형적인 동맹이었다. 그들은 백화문의 멱살을 쥐고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해, 이미 안팎으로 거대한 그물을 쳐둔 상태였다.
설백현은 혜우의 절망적인 음성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혜우의 얼굴로 향했다. 젖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이목구비는 분명 낯익은 것이어야 했다. 사부가 타계하기 전, 멸문해가는 문파에서 자신에게 따뜻한 미음 한 그릇을 건네주며 위로하던 사저의 얼굴.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통째로 불타 없어진 것처럼, 혜우의 얼굴 위로 겹쳐져야 할 과거의 기억들이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신마역천결 2성을 돌파하며 치른 대가. 그것은 사문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무들의 얼굴, 그리고 그들과 나누었던 온정어린 추억의 소멸이었다.
설백현은 제 가슴팍을 가만히 짚었다. 고동은 뛰고 있었으나,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인간적인 유대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백화문을 천하제일의 종문으로 세우고 사부의 유해를 합사한다'는 강박적인 갈망뿐이었다. 감정이 거세된 자리에 남은 집착은 괴물처럼 비대해져 있었다.
"아우님? 왜 그렇게 보십니까……?"
혜우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설백현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심연과 같았다. 그 안에는 분노도, 놀라움도, 심지어 자신을 걱정하는 사저를 향한 최소한의 안도감도 없었다.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을 관찰하는 듯한 무기질적인 시선.
"사저."
설백현의 입술이 열렸다. 물기 없는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건조하게 울렸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군."
"예? 그게 무슨……."
"기억나지 않소. 사저가 나를 보고 웃던 모습이. 우리가 백화곡의 뜰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혜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설백현이 얻은 가공할 무공의 이면에 도사린 대가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강해질수록 영혼을 깎아 먹는 마공. 그녀는 설백현의 뺨으로 손을 뻗으려다, 이내 공중에 멈추었다. 그의 주위에 흐르는 진기가 너무도 차가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우님…… 설마 사부님의 무공 때문에……."
혜우의 눈가에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면, 감정을 잃어가는 가여운 사제를 지탱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제 가슴을 내리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다.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면 되니까요. 아우님이 백화문을 위해 치르고 있는 그 가혹한 짐을, 이 사저가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할 것입니다."
설백현은 그녀의 눈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슬프다는 감정은 일지 않았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정을 갈구하는 본능적인 공허함이 심마처럼 일렁이며 그의 이마에 핏대를 세웠을 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정진의 검을 주워 들었다.
"슬퍼할 시간은 없소."
설백현이 차가운 검끝으로 동굴 안쪽의 평평한 바위판을 가리켰다. 점토가 섞인 흙으로 뒤덮인 바위판 위에, 그는 검끝을 박아 넣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날카로운 쇳소리가 동굴 안을 채웠다. 설백현이 그리는 궤적은 호북성 일대의 정밀한 지세도였다. 사부 천살신마의 밑에서 천하의 지세를 머릿속에 각인해 두었던 그였다.
"남궁세가는 영맥을 끊기 위해 철혈포위망을 준비하고 있고, 적혈맹은 내부의 첩자를 통해 백화곡의 목줄을 죄어오고 있소. 겉으로는 정파의 명숙을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사파의 독수와 결탁한 남궁휘의 솜씨겠지."
검끝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간과했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혜우가 고개를 숙여 지도를 바라보았다. 설백현의 검끝이 가리킨 곳은 백화곡의 북방, 험준한 산세가 끝없이 이어지는 기련산(祁連山) 너머였다.
"사마혈. 그 배신자가 천살신마의 무공과 영약을 훔쳐 세운 적혈맹의 본산이 바로 이 기련산 너머에 있소. 남궁세가와의 연합을 믿고 군세를 분산시킨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뒤통수가 가장 무방비하게 노출된 시점이지."
설백현의 눈에 서린 안광이 한순간 푸르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밀려오는 적들을 쳐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근거지를 뿌리째 뽑아 버리겠다는 냉혹한 역공의 의지였다.
"적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온다면, 그 아가리 속으로 검을 밀어 넣으면 될 일. 남궁휘가 백화곡을 가두려 한다면, 나는 기련산을 넘어 사마혈의 목을 먼저 벨 것이오."
검끝이 지도를 찢으며 바위에 깊숙이 박혔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판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났다. 사부를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누려온 자들의 행로를 제 손으로 단죄하겠다는 천하제일인의 기상이 설백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혜우는 침을 삼켰다. 그의 무감각한 어조 속에 담긴 압도적인 살기와 패색(覇色)이 동굴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정진을 죽이고 백화곡의 영천을 지켜낸 영웅의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그 기세는 보는 이의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마도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그때였다.
- 징! 징! 징! 징!
동굴 밖, 빗소리를 뚫고 기괴한 쇠붙이 마찰음이 백화곡 전체를 진동시켰다.
혜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것은 백화곡 외곽 경계선에 쳐놓은 은선(銀線)과 연결된 탐지 방울들이 울리는 소리였다. 단순히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동서남북, 사방의 계곡 진입로에 설치된 방울들이 동시에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소리는……!"
"습격이오."
설백현이 박혀 있던 검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검신에 맺힌 정진의 피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방울이 동시에 울린다는 것은, 적들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지. 첩자의 안내를 받아 지름길을 타고 들어온 모양이군."
동굴 입구 너머로 푸르스름한 안개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인영들이 비를 맞으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붉은색 심장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적혈맹의 최정예 척살조, 흑혈위(黑血衛)였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들이 음산한 안광을 뿜어내며 동굴 안쪽을 향해 좁혀들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고수들의 살기가 계곡의 비바람을 찢고 설백현과 혜우의 목덜미를 겨누어 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들이 음산한 안광을 뿜어내며 동굴 안쪽을 향해 좁혀들기 시작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고수들의 살기가 계곡의 비바람을 찢고 설백현과 혜우의 목덜미를 겨누어 왔다.
어둠을 뚫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자는 애꾸눈의 노인이었다. 굵은 흉터가 왼쪽 눈을 가로지른 그의 얼굴에는 평생을 음지에서 굴러먹은 살수 특유의 독기가 자욱했다. 적혈맹의 삼대 살수 대장 중 하나인 독안귀(獨眼鬼) 갈평이었다.
갈평이 들고 있는 도(刀) 끝에서 검붉은 독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의 시선이 설백현의 발치에 뒹굴고 있는 정진의 시신에 닿았다가, 이내 설백현의 무감각한 눈동자로 옮겨갔다.
"과연 천살신마의 후계자로군. 남궁세가의 상급 가신을 이토록 참혹하게 도륙할 줄이야."
갈평의 목소리는 쇠가죽을 긁는 듯 껄끄러웠다. 그의 뒤로 열두 명의 흑혈위가 반월형의 포위망을 좁히며 병기를 치켜들었다. 동굴 입구는 이미 그들의 단단한 인의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escape할 구멍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혜우가 설백현의 뒤에서 검자루를 쥐며 낮게 경고했다.
"아우님, 저 노인은 적혈맹주 사마혈의 심복입니다. 그가 쓰는 도법에는 인체를 부패시키는 음독(陰毒)이 서려 있으니 절대 살을 맞대어서는 안 됩니다."
설백현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잡았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흑색의 내력이 빗물과 만나 치지직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그의 눈에는 갈평의 살기도, 혜우의 초조함도 투영되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장애물을 백화곡에서 치워버려야 한다는 냉혹한 인과율만이 그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다.
"백화문의 잔당들아."
갈평이 도를 비스듬히 눕히며 이빨을 드러냈다.
"원망하려면 너희 사부를 원망해라. 우리 가솔들이 사마혈 맹주의 손에 인질로 잡혀 있는 한, 우리는 너희의 목가지를 가져가야만 한다. 강호란 본디 강자가 약자를 밟고 서는 법. 너희가 몰락한 것은 너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악의가 아닌, 종문의 생존과 가솔들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자 특유의 처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적혈맹의 살수들 역시 그들만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설백현의 심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정이 가련하군."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것은 너희의 사정일 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백현의 신형이 흐려졌다.
스스스슥!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기형적인 신법이었다. 일순간 갈평의 안면 근육이 경련했다. 살수로 평생을 살아온 그의 육감이 등 뒤에서 밀려오는 치명적인 죽음의 공포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흩어져라!"
갈평이 비명을 지르며 도를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설백현의 검은 이미 가장 취약한 틈새를 파고든 뒤였다. 신마역천결 2성의 경지에서 발현된 검기는 단순한 무공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흑색의 검선이 허공을 가르자, 맨 앞에 서 있던 흑혈위 두 명의 목이 소리도 없이 잘려 나갔다.
펏!
분수처럼 솟구치는 선혈이 동굴 벽을 붉게 물들였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와중에도 설백현의 검로는 멈추지 않았다. 단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오직 살상만을 위해 극도화된 궤적이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갈평이 광소를 터뜨리며 도를 내리찍었다. 그의 도 끝에서 발출된 검붉은 도기가 동굴 바닥을 가르며 설백현의 발목을 겨냥했다. 동시에 좌우에서 네 명의 흑혈위가 합격술을 펼치며 창과 검을 찔러왔다.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회전시켰다.
콰아아앙!
기형적인 진기의 충돌음과 함께 동굴 내부가 크게 흔들렸다. 설백현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흑혈위의 창끝이 그의 어깨죽지를 스친 것이다. 실제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설백현의 안면에는 고통의 기색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미간에 푸른 힘줄이 돋아나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잠자던 심마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더 많은 피를.'
머릿속에서 사부의 음성인지, 아니면 심마의 속삭임인지 모를 환청이 고막을 때렸다. 설백현은 폭주하려는 이성을 억누르며 역천결의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주위로 사나운 흑풍(黑風)이 휘몰아쳤다.
"사저, 물러서시오."
설백현의 목소리가 귀신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무시한 채,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마라섭혼인의 기운이 갈평의 신형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흡!"
갈평은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대지에 도를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러나 설백현의 진기는 그의 상상을 초월해 있었다. 쩍쩍 갈라지는 바위 틈새로 갈평의 몸이 사정없이 끌려갔다.
"이놈이 동귀어진을 하려는구나! 흑혈독을 풀어라!"
갈평이 단명한 외침을 내질렀다.
그의 품속에서 검붉은 연무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2화에서 설백현이 경계했던 바로 그 독문 흑혈독이었다. 공기 중에 닿는 모든 생명체를 부식시키는 치명적인 지독(遲毒)이 동굴 안을 빠르게 채워가기 시작했다.
"아우님! 피하십시오! 그 독은 내력을 운기할수록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듭니다!"
혜우가 비명을 지르며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하지만 설백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반마(半魔)의 그것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독무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가는 그의 전신에서 검은 한기가 뿜어져 나와 붉은 독기를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역천결의 극음(極陰) 진기가 독안개의 확산을 억누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독을 얼려버리다니! 이게 인간의 무공이란 말이냐!"
갈평의 애꾸눈이 공포로 찢어질 듯 커졌다.
설백현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죽음의 궤적이었다. 갈평은 제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쿠구구구궁!
백화곡 전체가 뒤흔들리는 거대한 진동이 동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낙루암 사방을 수호하고 있던 천살신마의 옛 결계가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로 파괴되면서 발생하는 충격파였다.
동시에 동굴 밖에서 웅장하면서도 오만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쳤다. 내력을 가득 실어 곡 전체를 울리는 음성이었다.
"백화문의 생존자들은 들어라.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남궁휘가 이곳에 도착했다. 더 이상의 무익한 살생을 원치 않으니, 천살신마의 유해와 신마역천결의 비급을 바치고 투항하라!"
남궁휘.
가문의 사활을 걸고 백화곡의 영맥을 찬탈하기 위해 군세를 이끌고 직접 친정한 남궁세가의 기린아였다.
진동의 여파로 동굴 천장에서 거대한 바위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설백현의 검끝이 갈평의 목울대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동굴 밖, 붉은 횃불 수백 개가 비바람 속에서 일렁이는 계곡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설백현의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적혈맹의 최정예가 이토록 정밀하게 내부로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남궁휘가 이 완벽한 타이밍에 결계를 깨뜨리고 진입할 수 있었던 진짜 원인.
그것은 내부의 첩자가 단순히 초소의 위치를 밀고한 수준이 아니라, 백화곡의 심장부인 낙루암의 결계 제어 장치 자체를 적들에게 통째로 넘겨주었음을 의미했다.
"사저."
설백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동굴 한구석, 혜우의 뒤편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백화문의 생존 제자 중 한 명이 소리 없이 서서 신형을 감추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는 흑혈표식이 그려진 은밀한 독침이 쥐어져 있었다.
가장 믿었던 동문의 배신과, 백화곡을 포위한 남궁세가의 철혈포위망.
설백현은 생사(生死)의 경계 위에 홀로 서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동굴 밖의 폭우는 이제 폭풍우로 변해 백화곡을 집어삼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