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독액이 담긴 항아리가 천천히 기울었다.
끈적한 액체가 주둥이 끝에 맺혀 영천의 맑은 수면을 향해 떨어지려던 그 찰나, 동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스스스스.
살기가 실체화되어 동굴 벽면의 이끼를 말려 죽이는 소리였다. 횃불의 불꽃이 미친 듯이 일렁이다가 푸른빛으로 변하며 납작하게 죽어버렸다.
“누구냐!”
독 항아리를 들고 있던 적혈맹의 흑의인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러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어둠을 가르고 날아든 무형의 기류였다.
쾅!
설백현의 신형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의 손에 들린 목검이 호선을 그리며 흑의인의 손목을 그대로 후려쳤다. 뼈가 바스러지는 둔탁한 파금음과 함께 독 항아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설백현은 왼손을 뻗어 낙하하는 항아리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동시에 오른발로 흑의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커헉!”
흑의인의 신형이 동굴 벽면에 처박히며 이내 절명했다. 단 한 자루의 목검, 단 한 번의 신형 이동으로 이루어진 참격이었다.
“설백현……!”
검무 정진의 눈동자가 지독한 경악으로 물들었다. 낙루암에 있어야 할 백화문의 미친개가 어찌하여 이곳에 서 있는가. 정진의 손에 쥔 청강검이 파르르 떨렸다. 가문의 파산을 막기 위해 사파의 음독마저 받아들인 그의 손끝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남궁의 가신이라는 자가, 사파의 쥐새끼들과 어울려 영맥에 독을 푸는가.”
설백현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 밑바닥에는 대지를 태워버릴 듯한 증오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사부의 숨결이 닿은 이 영천을 더럽히려 한 자들을 결코 살려두지 않겠다는 서리가 서린 음성이었다.
“닥쳐라! 네놈이 가문의 생존을 아느냐!”
정진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청강검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 방계 놈들의 칼날 끝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솔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악마와도 손을 잡을 것이다! 네놈 하나만 죽으면 백화곡은 우리의 것이 되고, 남궁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동굴 외부에서 거대한 천둥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우르릉, 쾅! 하늘이 무너질 듯한 뇌성이 고막을 때리더니, 이내 동굴 입구 너머로 폭포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천재지변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우는 동굴 천장의 해묵은 균열을 타고 스며들어, 차가운 물줄기가 되어 영천 위로 뚝뚝 떨어졌다. 번쩍이는 번개 빛이 균열 사이로 들이쳐 설백현의 창백한 얼굴을 잔혹하게 비추었다.
“죽여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정진의 명령에 남궁세가의 정예 무사들과 적혈맹의 살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쇄도했다. 십여 자루의 검날이 빗물과 번개 빛을 반사하며 설백현의 전신을 겨누었다.
설백현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내면의 심마가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문을 침범당했다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마구 갉아먹었다.
샤아아악!
설백현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남궁세가의 무사가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가른 순간, 설백현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퍽!
목검의 끝이 무사의 척추를 꿰뚫었다. 혈우(血雨)가 공중에 흩뿌려지기도 전에 설백현은 다시 신형을 날려 적혈맹 살수의 목을 꺾어버렸다. 동작의 선은 간결했고, 강약의 조절은 극에 달해 있었다. 뼈가 꺾이고 살이 터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기괴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이 괴물 같은 놈이……!”
정진이 이빨을 사려 물며 검을 비스듬히 뉘었다. 그의 신형이 나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설백현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남궁세가의 절기, 창해검무(滄海劍舞)였다. 푸른 검강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빗물마저 잘게 쪼개어 날렸다.
스 각각각!
설백현은 목검을 세워 정진의 검강을 막아섰다. 쇠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는 파열음이 동굴을 울렸다. 정진의 무공은 결사적이었다. 가문의 몰락을 막겠다는 처절한 신념이 실린 검 초식은 매서웠고 비장했다. 단순한 악당의 악다구니가 아니었다. 벼랑 끝에 선 무인의 생존을 투쟁하는 몸부림이었다.
“남궁의 이름을 걸고, 너를 여기서 묻겠다!”
정진의 청강검이 설백현의 어깨를 스치며 붉은 선을 그렸다. 피가 뿜어져 나왔으나 설백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순간, 설백현의 가슴속에서 우지끈하는 균열음이 들렸다.
‘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신마역천결 2성의 벽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역천의 무공이 요구하는 가혹한 대가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면의 심마가 어둠 속에서 아가리를 벌렸다.
- 또 무엇을 버릴 테냐. 이번에는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따뜻한 풍경이었다.
눈이 내리던 백화문의 옛 연무장. 아직 문파가 몰락하기 전, 사형제들과 함께 손이 곱아 터지도록 목검을 휘두르며 서로를 향해 웃어주던 얼굴들. 추위 속에서도 화로에 구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천하제일협객이 되겠노라 다짐했던 어린 날의 동무들. 그들의 웃음소리, 그들의 체온, 그들을 향했던 순수한 온정(溫情)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설백현의 이가 부딪쳤다. 극심한 두통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
‘그것마저 가져가지 마라……! 사부님과의 추억도, 동문들과의 그 따뜻했던 나날도…… 내게 남은 유일한 불씨란 말이다!’
정이 깊을수록 심마는 더욱 잔혹하게 날뛰었다. 설백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싶었으나, 정진의 검날은 0.1초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고 그의 목통을 겨누며 짓쳐 들어왔다.
“죽어라, 설백현!”
정진의 일격이 설백현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왔다. 가문의 사활을 건 최후의 초식, 창해만리파(滄海萬里波)였다. 수십 개의 청색 검강이 파도처럼 밀려들며 설백현의 탈출구를 완벽히 봉쇄했다.
내외의 압박이 동시에 그를 덮쳤다. 밖으로는 정진의 치명적인 검강과 독물의 열세, 안으로는 영혼을 찢어발기는 감정 상실의 고통과 심마의 폭주.
천재지변의 폭우 속에서, 설백현의 눈에서 마지막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차가운 빗물과 섞여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끊어졌다.
‘……기억나지 않는다.’
사형제들의 얼굴이 지워졌다. 그들과 나누었던 웃음소리가 소음으로 변해 사라졌다. 가슴을 따뜻하게 가득 채우고 있던 애정의 감정이,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것은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참혹한 형벌이었으나, 동시에 신마역천결의 봉인을 해제하는 열쇠였다.
두오오오옹-!
설백현의 전신에서 칠흑 같은 마기(魔氣)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붉은빛조차 잃어버린,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허무의 흑색으로 변했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 제2성(星).
쿠쿠쿠쿠궁!
그의 도약에 호응하듯, 동굴 밖의 하늘에서 건곤을 뒤흔드는 천뢰(天雷)가 내리쳤다. 거대한 번개 줄기가 동굴 천장의 균열을 정확히 관통하여 들어왔다.
원래라면 시전자를 태워 죽일 천재지변의 벼락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왼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빗물과 함께 천뢰의 기운을 그대로 움켜잡았다.
스파앗!
그가 쥐고 있던 초라한 목검 위로 푸른 번개 빛과 칠흑 같은 마기가 기이하게 융합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뇌전과 신마의 마공이 결합하여 빚어낸,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파멸의 무형검(無形劍)이 완성되었다.
정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가문의 존망을 걸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그였지만,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살육과 무도만을 위해 창조된 천겁(天劫) 그 자체였다.
“이, 이것은…… 무슨 무공이냐……!”
정진이 비명을 지르며 검강을 더욱 넓혔으나, 이미 늦었다.
설백현이 목검을 가볍게 내리쳤다.
동작에는 아무런 감정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한 폭음과 함께,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백색 광선이 영천을 가득 채웠다. 천뢰의 뇌전과 역천결의 파괴력이 융합된 참격이 정진을 덮쳤다.
“아아아아악!”
정진의 처절한 비명이 광풍 속에 묻혔다. 그가 가문을 위해 쌓아 올렸던 평생의 공력도, 벼랑 끝에서 쥐어 짜냈던 결사적인 신념의 검강도, 신마의 인과율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에 불과했다.
콰르릉! 치이이익!
빛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오직 침묵만이 감돌았다.
동굴 바닥은 거대하게 파여 나갔고, 정진이 서 있던 자리에는 오직 그의 하반신과 검자루만이 타버린 채 남아 있었다. 정진의 상체는 뼈와 살, 장기마저 흔적도 없이 증발하여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독 항아리들과 적혈맹의 잔당들 역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영천의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맑은 에메랄드빛을 되찾아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독물은 천뢰의 고압적인 열기에 의해 완전히 기화되어 사라진 뒤였다.
백화곡의 식수이자 영맥을 지켜냈다.
그러나 설백현은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하는 감정 자체가 그의 영혼에서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멍하니 제 손에 들린, 끝부분이 까맣게 탄 목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탁, 탁, 탁.
다급한 발소리가 동굴 입구에서 들려왔다.
“백현 아우님! 무사하십니까!”
백화문의 대제자 혜우가 땀과 빗물에 젖은 채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끔찍하게 파괴된 동굴 내부와 설백현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우님…….”
혜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설백현의 눈을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나락 같은 검은 눈동자. 사부를 잃었을 때의 슬픔도, 사문을 지켰을 때의 안도감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게 얼어붙은 무인의 눈이었다.
설백현이 강해질 때마다 그의 영혼이 깎여 나가고 있음을, 혜우는 직관적으로 느꼈다.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이 그녀를 덮쳤으나, 그녀는 애써 슬픔을 누르며 설백현에게 다가갔다.
“영천을…… 지켜내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설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혜우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혜우는 침묵을 지키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정진의 하반신 잔해로 걸어갔다. 처참한 광경에 속이 뒤집혔으나, 그녀는 멸문해가는 문파를 지켜온 강인한 여인이었다. 남궁세가의 정예 무장이자 배후 세력과의 연결고리인 정진의 시신에서 단서를 찾아야 했다.
혜우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정진의 품속을 조심스럽게 뒤적였다. 불에 타다 남은 가죽 주머니와 몇 가지 장신구가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 가장 안쪽에서, 빗물과 핏자국에 젖지 않도록 특수한 방수 가죽으로 밀봉된 서신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혜우가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의 겉면에는 붉은색 밀랍이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해골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파의 거두이자 천살신마를 배신했던 자, 적혈맹주 사마혈의 친필 수인이었다.
혜우는 조심스럽게 밀랍을 떼어내고 서신을 펼쳤다.
종이 위에 적힌 글귀를 한 줄씩 읽어 내려가던 혜우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고, 서신을 쥔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혜우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백현 아우님…… 이것 좀 보십시오. 남궁세가와 적혈맹의 음모는 단순한 영맥 찬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백화곡 내부에…….”
그녀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서신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혜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동굴 밖에서는 폭우가 더욱 거세게 몰아치며, 마치 다가올 거대한 파국을 예고하듯 또다시 천둥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