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청강검(靑鋼劍)의 푸른 검광이 대지를 양분하듯 쪼개며 쇄도했다. 일류 고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공기를 찢는 파공음조차 삼켜버린 채 설백현의 목덜미를 향해 육박했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절체절명의 찰나였다.

설백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쥐인 투박한 목검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솟구쳤다. 검은 아지랑이 같은 진기가 목검의 표면을 감싸 안았고, 그것은 이내 무형의 장막이 되어 정진의 청강검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쩡ㅡ!

쇳소리가 아닌, 거대한 바위가 부딪쳐 깨지는 듯한 둔중한 파음이 백화곡의 정적을 산산조각 내었다.

“으윽!”

검풍의 여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사방에서 대치하던 남궁세가의 가신들이 그 무시무시한 기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몇몇은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붉은 선혈을 허공에 흩뿌렸다.

정진의 신형 역시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청강검을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류 고수의 내력을 고스란히 담은 일격이 고작 목검 한 자루에 허무하게 가로막힌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검을 타고 역류한 음산한 진기가 그의 기혈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정진은 입가로 넘쳐흐르는 피를 거칠게 훔쳐내며 가신들을 향해 손짓했다.

“물러서라! 이자는 보통의 수법으로 상대할 수 없다!”

남궁의 무사들이 황급히 대열을 정비하며 뒤로 물러섰다. 설백현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헤집는 극심한 두통 때문이었다.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꿈틀거렸고, 붉게 물든 동공은 초점을 잃은 채 흔들렸다.

사부와의 추억.

낙루암에서 사부가 어설픈 솜씨로 구워주던 삼색 고구마의 단내, 밤하늘을 보며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들려오던 사부의 거친 숨소리. 그 따스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미세한 모래알이 되어 영혼의 틈새로 흘러내려 사라지고 있었다. 신마역천결 1성의 대가가 그의 뇌리를 사정없이 갉아먹는 중이었다.

머리를 감싸 안으려는 설백현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그는 이빨이 부서져라 악물며 그 고통을 안으로 집어삼켰다. 겉으로는 단 한 줌의 흐트러짐도 보여줄 수 없었다. 지금 무너지면 백화곡은 저들의 군홧발에 짓밟힐 터였다.

정진은 설백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것을 기회로 보았으나,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방금 전 목검을 통해 전해진 그 기괴한 힘은 상식을 초월한 마공(魔功)의 편린이었기 때문이다.

정진이 청강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가신들이 후퇴하는 길목을 엄호했다. 그의 살기등등한 도전 구호가 백화곡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설백현! 오늘 밤, 낙루암에서 너와 나, 단둘이 생사를 가르자! 내 가문의 존망과 명예를 걸고, 네놈의 목을 취해 사부의 죄업을 청산하겠다! 피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계곡의 암벽을 타고 메아리쳐 설백현의 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정진은 가신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신속하게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설백현은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스슥.

수풀을 헤치고 다급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청아한 신형이 설백현의 곁에 멈추어 섰다. 백화문의 대사저, 혜우였다. 그녀의 고운 미간은 깊은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설백현의 옷소매를 잡으려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움찔하며 손을 멈추었다.

“백현아…….”

혜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설백현의 붉은 눈동자와, 그 눈에 서린 깊고 깊은 공허함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모든 온기를 빼앗긴 냉혈한의 동공이었다.

“더 이상 그 무공을 쓰지 마라. 제발 내 말을 들어다오.”

설백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낯선 타인을 보는 듯한 무감각함이 서려 있었다. 혜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공을 쓸 때마다 네가 변하고 있어. 사부님과의 기억마저 잃어가고 있지 않느냐? 머지않아 네가 우리마저 잊어버린다면, 이 문파를 재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차라리 내가…… 내가 남궁세가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겠다.”

“대사저.”

설백현의 음성은 낮고 건조했다. 쇳덩이가 긁히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였다.

“무릎을 꿇는다고 저들이 물러설 것 같습니까.”

“하지만…….”

“약육강식(弱肉强食)은 강호의 유일한 이치입니다. 남궁세가는 지금 가문의 생존을 위해 우리를 밟고 올라서려 합니다. 저들에게 자비나 타협은 사치에 불과합니다. 사부님의 유해를 이곳 조사당에 당당히 모시기 전까지, 저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설백현은 혜우의 시선을 피하며 목검을 허리춤에 차 넣었다.

“그것이 제가 치러야 할 대가라면, 기꺼이 치르겠습니다.”

그의 어조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정을 갈구하면서도 스스로 그 정을 지워내야만 하는 모순적인 형벌. 설백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혜우는 멀어지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품속에 감추어 둔 깨진 옥빛 파편을 손에 꼭 쥐었다. 그것은 백화문의 잃어버린 옛 정화 무구인 빙백한령주의 조각이었다. 아직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 파편을 쥐는 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날 밤.

달빛마저 검은 구름 뒤로 숨어버린 칠흑 같은 어둠이 백화곡을 무겁게 짓눌렀다.

설백현은 검은 야행의(夜行衣)를 걸친 채 백화곡 하류의 경계를 따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정진과의 생사결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적들의 동태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그가 아니었다. 남궁세가가 이토록 백화곡에 집착하는 데는 명분 이상의 실리적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사박.

미세한 나뭇잎 소리가 들린 것은 백화곡의 젖줄이라 불리는 하천의 샛길 부근이었다.

설백현은 고목의 그림자 속으로 신형을 감추었다. 그의 숨결은 완벽히 차단되어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천살신마에게 전수받은 은형술(隱形術)의 극의였다.

수풀 너머로 희미한 초롱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 아래로 십여 명의 무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남궁세가의 장포를 입고 있었으나, 행동거지는 정규 무사라기보다 음지의 밀수꾼에 가까웠다.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상자를 나르는 그들의 손길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조용히 해라. 백화문의 미친개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두령으로 보이는 흉터 많은 사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번 공물은 가주께서 직접 챙기시는 ‘적령화(赤靈花)’다. 남궁세가의 가을철 자금줄이 이 영초에 달렸음을 명심해라.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네놈들의 목을 벨 것이다.”

적령화.

설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도 엄청난 영기를 품고 있어 장안의 약방에서 부르는 게 값인 전설적인 영초였다. 쇠락해가는 남궁세가를 지탱하기 위해 차기 가주 남궁휘가 백방으로 구하려 하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남궁세가가 백화곡의 영맥을 노린 진짜 이유가 이것이었군.’

백화곡의 지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영천의 기운이 아니고서는 적령화가 자랄 수 없다. 저들은 백화곡을 점거해 이 영초를 독점함으로써 가문의 몰락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잊지 마라.”

흉터 사내가 품속에서 가죽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 지도에 적령화의 자생지와 남궁세가의 비밀 수송로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것만 있으면 적혈맹과의 거래도 순탄할 것이다.”

적혈맹. 사마혈의 세력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자 설백현의 눈동자에 푸른 마광(魔光)이 번뜩였다. 사부를 배신하고 적혈맹을 세운 사마혈이 남궁세가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설백현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스스슥.

바람이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설백현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밀수꾼들의 한가운데로 낙하했다.

“누구냐!”

가장 먼저 반응한 무사가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설백현의 손가락이 무사의 목울대를 정확히 짚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사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적습이다!”

두령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병장기가 뽑혀 나왔다. 은백색의 검광들이 어둠을 갈랐다. 그러나 설백현의 무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해 있었다.

스윽.

설백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검날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목검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퍽! 팍! 콰직!

단 세 번의 타격. 무기력하게 꺾인 무사들의 신형이 차례로 낙엽처럼 쓰러졌다. 일당백의 잠입 무력이 어둠 속에서 무자비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정예라 자부하던 이들은 설백현의 옷자락 한번 스치지 못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두령 사내가 겁에 질려 검을 휘둘렀으나, 설백현은 가볍게 그의 손목을 비틀어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강력한 장력을 그의 단전에 내질렀다.

푸학!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내장이 파열되는 고통 속에서 사내는 피를 토하며 설백현을 올려다보았다. 감정이 배제된 차가운 사신의 눈빛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백현은 쓰러진 두령의 품으로 손을 뻗어 흘러나온 가죽 지도를 거두어들였다. 지도를 펼치자 백화곡 일대의 영맥과 적령화의 군락지, 그리고 남궁세가의 비밀 밀수 경로가 붉은 선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있으면 남궁휘의 목줄을 쥘 수 있겠군.’

설백현은 지도를 품속에 넣었다.

그때, 쓰러진 두령의 목덜미 부근에서 낯익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검붉은 핏빛으로 그려진 해골 모양의 표식.

‘흑혈표식(黑血標式).’

사마혈의 최측근 살수들만이 새긴다는 독문의 표식이었다. 남궁세가의 밀수선단 내부에 적혈맹의 핵심 인물이 첩자로 섞여 있었거나, 사마혈이 남궁세가를 감시하기 위해 심어둔 개가 명백했다.

설백현은 표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표식에서 미세한 흑혈독의 기운이 묻어났다. 2화에서 목격했던 그 음산한 독의 냄새였다.

‘사마혈, 네놈의 독이 벌써 이곳까지 뻗쳐 있었구나.’

설백현은 독기를 내력으로 억누르며 차갑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더니, 정파의 맹주를 자처하는 남궁세가가 사파의 거두와 손을 잡고 이토록 뒤를 구리게 놀아나고 있었을 줄이야.”

무림맹의 그 공고해 보이던 질서 이면에는, 이처럼 추악한 세계관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궁세가 역시 정의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파와의 검은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위선자들에 불과했다.

설백현은 쓰러진 시체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

백화곡의 가장 깊은 곳, 지하에서 솟구치는 맑은 물이 고여 이루어진 지하 영천(靈泉) 부근. 이곳은 백화문 제자들이 대대로 마셔온 식수원이자, 백화곡의 영맥이 시작되는 신성한 장소였다.

설백현은 영천으로 통하는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기이한 음기(陰氣)를 감지했다.

스산한 바람이 동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비린내와 함께 섞여 오는 것은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린내였다.

‘독(毒)이다.’

설백현은 신형을 급히 숨기고 동굴 내부로 잠입했다.

동굴 가장 안쪽, 에메랄드빛으로 빛나야 할 영천의 수면 위로 횃불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서둘러라. 물줄기가 시작되는 발원지에 이 독을 풀어야 백화곡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다.”

횃불을 들고 지시를 내리는 자는 다름 아닌 검무 정진이었다. 그의 곁에는 정예 무사들과 함께, 검은 도포를 뒤집어쓴 음산한 인물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항아리 속에는 자줏빛을 띠는 끈적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정진 대인, 정녕 이 방법을 쓰시겠습니까?”

한 무사가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은 사파의 음독인 ‘구음부골산(九陰腐骨散)’입니다. 만약 무림맹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남궁세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정진의 안색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는 칼자루를 움켜쥐며 차갑게 대꾸했다.

“명예가 밥을 먹여주더냐! 백화문의 미친개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우리 세가는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오늘 밤 낙루암에서의 생사결은 미끼다. 놈이 낙루암으로 향한 사이, 우리는 이 식수원을 오염시켜 백화문 놈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정진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광기가 가득 차 있었다. 가문의 존망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파의 독물마저 받아들인 자의 처절한 선택이었다.

검은 도포를 쓴 자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항아리의 마개를 열었다.

“흐흐흐, 남궁의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백화곡의 영맥은 우리 적혈맹과 남궁세가가 나누어 가질 초석이 될 것입니다.”

항아리에서 흘러나오는 자줏빛 독액이 영천의 맑은 물속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설백현의 눈동자가 마침내 이성을 잃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부의 온기가 서린 백화문을 이토록 추악한 방법으로 더럽히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심마(心魔)를 사정없이 일깨웠다.

고요하던 영천의 동굴 내부로, 대지를 뒤흔드는 차가운 살기가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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