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황량한 앞마당으로 푸른 비단 장포를 걸친 무인들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허리춤에 찬 장검들이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며 불길한 쇳소리를 내었다. 남궁세가의 정예 선봉대였다.

그들의 선두에 선 자는 가문의 집행 가신인 탁무양(卓武陽)이었다. 매서운 매의 눈매를 한 그는 품 안에서 황금빛 비단으로 감싸인 명도 문서를 꺼내 들고는, 조사당을 향해 오만하게 외쳤다.

“백화문의 생존자들은 듣거라! 오늘부로 백화곡의 모든 영토와 영맥은 남궁세가의 소유로 귀속되었음을 선포한다!”

사부의 영혼이 잠든 조사당의 문턱을 향해, 탁무양의 가죽 장화가 거침없이 짓밟고 올라서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스스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허공을 가르며,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 address.

그의 손에는 세월의 때가 시퍼렇게 슬어 있는, 이끼 낀 나무막대기 같은 녹슨 목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날조차 서 있지 않은 그 초라한 병장기를 든 청년, 설백현이었다. 그의 등장이 너무도 소리 없이 이루어졌기에, 앞마당을 가득 메운 수십 명의 무인들은 일제히 숨을 들이켜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멈춰라.”

설백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냉수처럼,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이 마당을 가득 채운 살기를 단숨에 얼려 버렸다.

탁무양은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설백현이 든 낡은 목검에 가닿았다. 비웃음이 그의 입가에 얇게 걸렸다.

“네놈이 천살신마의 마지막 제자라는 설백현이냐? 보아하니 사문의 명줄이 다한 것을 모르고 가소로운 객기를 부리는구나.”

탁무양의 등 뒤로 늘어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검자루를 쥐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서슬 퍼런 검날들이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조사당 처마 밑에 걸린 '백화문(白花門)' 삼 자가 새겨진 낡은 현판이 그들의 검기에 쓸려 미세하게 흔들렸다.

탁무양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명도 문서를 흔들어 보였다.

“이 문서는 무림맹과 관부의 정식 인가를 거친 것이다. 낙루암의 영맥은 이제 우리 남궁세가의 차지다. 순순히 물러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이미 시체가 된 천살신마의 비급을 품고 도망치기에는 이만한 기회가 없을 터인데?”

설백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탁무양의 발밑을 향했다. 조사당의 흙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가죽 장화. 그리고 그들이 훼손하려 드는 사문의 흔적들.

단전 깊은 곳에서 흑색의 역천 진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신마역천결의 구결이 뇌리를 스쳤다. 사부를 잃었을 때 느꼈던 비통함은 이미 첫 번째 각성의 대가로 소멸해 버렸기에, 지금 그의 가슴속에는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사문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집착만이 남아 있었다.

“사부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설백현이 목검을 비스듬히 내리트리며 한 걸음 내딛었다.

탁무양은 실소를 터뜨렸다. 가소롭다는 듯 코방귀를 낀 그는 검을 뽑아 들지도 않은 채 설백현을 몰아세웠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애송이놈. 우리 남궁세가가 왜 이곳을 취하려 하는지 아느냐? 가문의 존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영약과 영맥이 마르고, 방계들의 반란이 이빨을 드러내는 이 난세에, 우리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화곡의 영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지극히 당연한 순리다!”

탁무양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탐욕을 넘어선, 가문의 생존을 짊어진 자 특유의 처절하고도 비장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남궁세가 역시 정파의 명문이라는 허울 뒤에서, 몰락의 벼랑 끝에 몰려 발버둥 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악독하게 백화문을 짓밟으려 들었다.

“네놈들의 구차한 생존을 위해, 남의 무덤을 파헤치겠다는 뜻이군.”

설백현의 눈동자가 기괴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너희가 말하는 정파의 도(道)인가?”

“도 따위는 살아남은 자들만이 논할 수 있는 사치다! 멸문한 문파의 찌꺼기 주제에 감히 대세를 거스르려 하느냐!”

탁무양이 매섭게 손짓했다.

“청강검진(靑鋼劍陣)을 전개하라! 저 오만한 놈의 다리를 꺾고 사문을 비워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궁세가의 정예 무인 열두 명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설백현의 사방을 포위했다. 그들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검기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그물망을 형성했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정종의 합격진, 청강검진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청강의 검풍이 설백현의 장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 기세는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한 그루의 고목을 집어삼키려는 듯 맹렬했다.

그러나 설백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쥔 녹슨 목검이 공중에서 가볍게 원을 그렸다.

“어설프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묵직하고 예스러운 검풍이 그의 목검 끝에서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첫 번째 휘두름이었다.

팟-!

설백현이 목검을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단지 가벼운 손짓에 불과해 보였으나, 목검이 가르는 궤적을 따라 흑색의 기류가 폭포수처럼 역류했다.

콰아아앙!

청강검진의 좌측을 담당하던 무인 세 명의 검기가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며 터져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종 진기가 어째서 이토록 허망하게 지워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거대한 무형의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 끄윽 하는 비명과 함께 뒤로 나자빠질 뿐이었다.

“무, 무슨……!”

탁무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설백현의 신형이 이미 고스트처럼 흐려져 있었다. 그는 적들의 경악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두 번째 휘두름이었다.

파아앗!

이번에는 횡(橫)으로 그리는 일격이었다. 날이 서 있지 않은 목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에서 뻗어 나간 역천의 검압은 실체화된 벽처럼 단단했다. 검진의 중심을 잡고 있던 무인들의 검날이 설백현의 목검과 부딪치는 순간, 쨍강! 하는 요란한 파편 소리와 함께 모조리 부러져 나갔다.

“내 검이……!”

부러진 검날이 허공을 돌며 무인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백현의 신형이 마침내 검진의 한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 휘두름을 비틀어 내릴 차례였다.

설백현은 목검을 가볍게 털어내듯 아래로 찔러 넣었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진기가 목검의 몸체를 타고 흘러내려, 마당의 흙바닥을 강타했다.

쿠구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마당의 돌바닥이 사방으로 뒤집히며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 청강검진을 구성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 전원이 일제히 피를 토하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아아악!”

“내 손목이……!”

뼈가 으스러지는 가혹한 파공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설백현을 향해 검을 겨누었던 무인들의 오른손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사부의 이름을 욕보이고, 사문의 땅을 짓밟으려 했던 대가였다.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청강검진이, 단 세 번의 휘두름 만에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신음 소리 사이로, 설백현이 탁무양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규칙적이었고, 그 발걸음마다 탁무양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탁무양은 자신도 모르게 명도 문서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일류 고수들로 구성된 정예 선봉대가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궤멸당했다. 그것도 날도 서지 않은 낡은 목검 한 자루를 든 애송이에게 말이다.

설백현이 탁무양의 코앞에 멈추어 섰다.

“그 문서를 내려놓아라.”

설백현의 목검 끝이 탁무양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목검 끝에 맺힌 차가운 검기가 탁무양의 피부를 찔러 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곳은 사부님의 안식처다. 감히 너희 같은 자들이 더럽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탁무양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눈을 가렸으나, 차마 훔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저 낡은 목검이 자신의 목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결국 탁무양은 떨리는 손으로 황금빛 명도 문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털썩.

설백현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발 끝으로 문서를 즈려밟았다. 남궁세가의 오만한 야욕이 흙바닥에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돌아가라. 그리고 전해라.”

설백현이 목검을 거두며 차갑게 읊조렸다.

“백화곡에 발을 들이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탁무양은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면서도, 부하들을 부축해 허겁지겁 뒤로 물러섰다. 신음하며 도망치는 그들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이토록 처참하게 패퇴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였다.

마당에 가득했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스으으으-.

백화곡 깊은 곳에서부터 스산하고 흉포한 살기가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소란과는 궤를 달리하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무인의 기세였다.

피를 흘리며 도망치던 탁무양과 남궁세가 무인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의 얼굴에 구원의 빛이 서서히 떠올랐다.

저 멀리, 협곡의 입구 쪽에서부터 웅장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곡 전체를 뒤흔들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천살신마의 가련한 사냥개 놈이 감히 대세를 논하는구나! 남궁의 가신들을 상하게 한 죄, 네놈의 목숨으로 청산해야 할 것이다!”

기운을 가득 실은 그 외침은 바위벽에 부딪쳐 수십 번의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설백현의 고개가 천천히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새로운 폭풍이 숨을 죽인 채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협곡의 좁은 통로를 지나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푸른 비단 장포 위에 검은 철갑을 덧댄 기이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신이자, 강호에서 ‘검무(劍舞)’라 불리는 일류 고수, 정진(鄭震)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잡초들이 서슬 퍼런 검기에 쓸려 힘없이 잘려 나갔다. 그의 눈빛은 탁무양의 오만함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나든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도 잔인한 심연의 빛이었다.

“가장(家長)의 명을 받들어 이 땅을 취하러 왔다.”

정진의 목소리는 철을 긁는 듯 서늘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무인들을 흘깃 보더니, 이내 설백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천살신마의 유일한 제자라 하기에 제법 기대를 하였거늘, 고작 낡은 목검 한 자루로 가문의 가신들을 핍박하는구나. 참으로 가소롭고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지로다.”

설백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른손에 쥔 목검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일어났다. 단전 속에서 잠자던 흑색의 역천 진기가 그의 핏줄을 타고 거칠게 꿈틀거렸다. 사부의 죽음 이후 억눌러 두었던 가슴속 심마가, 정진이 뿜어내는 노골적인 살기에 반응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네놈들이 감히 이곳을 넘보는 이유가 고작 가문의 생존 때문이라 했나.”

설백현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정진은 비웃음조차 짓지 않았다. 대신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춤에 찬 청강검의 자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그렇다. 우리 남궁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영맥이 마르고 가문의 비고가 비어 가는데, 명분 따위에 매달려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법. 백화곡의 영맥은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서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지.”

정진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 자의 가혹한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설백현은 그 눈빛에서 사부의 과거를 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천하를 적으로 돌려야 했던 천살신마의 비극이, 지금 눈앞의 적에게서 재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와 자비는 별개의 문제였다.

“생존을 위해 타인의 안식처를 짓밟는 자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설백현이 목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의 전신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신마역천결 1성의 극의가 그의 온몸을 강하게 압박했다. 감정을 잃어버린 자리에 차오른 것은, 사문을 침범한 자를 기필코 멸하겠다는 비정상적인 집착뿐이었다.

정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사부인 천살신마가 과거 우리 남궁의 약초 명맥을 끊어놓았던 인과(因果)를 정녕 모르는구나. 오늘 우리가 이곳을 취하는 것은, 그분이 남긴 채무를 돌려받는 것일 뿐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지.”

그 순간, 설백현의 머릿속이 번쩍이며 깨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사부가 남긴 과거의 업보. 그것이 족쇄가 되어 백화문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그가 강해질수록, 사부의 온기가 남아 있는 이 백화곡을 지키려 할수록, 세상은 사부의 악연을 들이밀며 그를 파멸로 이끌려 할 터였다.

‘사부님…….’

심장 부근이 타들어 가듯 아려 왔다. 사부와의 따스했던 추억 중 일부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신마역천결의 잔혹한 대가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으윽……!”

설백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 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려는 심마의 전조였다.

정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릉-!

청강검이 마침내 칼집을 빠져나왔다. 푸른 검광이 대지를 양분하듯 쪼개며 설백현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일류 고수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사문의 죄업을 지고, 여기서 잠들어라!”

검풍이 몰고 온 무시무시한 압력이 설백현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정진의 검 끝이 설백현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설백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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