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스러지는 백색 도포가 땅에 닿기 직전이었다.

스산한 바람을 가르고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무너지는 신형을 부축했다. 설백현의 탄탄한 팔이 혜우의 가녀린 어깨와 무릎 밑을 단단히 받쳐 들었다.

“대사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백화곡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혜우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설백현의 흑포를 붉게 물들였다.

“설…… 사제……?”

남궁세가의 푸른 장포를 입은 무인들의 눈동자가 일시에 좁혀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청년의 기세에 그들의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설백현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혜우의 끊어질 듯한 맥박만이 그의 손끝을 타고 전해질 뿐이었다.

맥상이 엉망이었다. 내맥은 갈가리 찢어졌고, 단전은 금방이라도 깨질 항아리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터였다.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귀냐! 백화문의 잔당이라면 당장 그 손을 치우고……!”

남궁세가의 선봉 고수가 검을 비껴 잡으며 윽박지른 순간이었다.

설백현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순간, 사방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지독한 한기가 몰아쳤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호흡마저 가로막는 무형의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설백현은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혜우를 품에 안은 채 신형을 날렸다. 흑색의 광풍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은 이미 수십 장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

낙루암 깊은 곳.

사부가 생전에 머물던 침상 옆에는 영기가 서려 있는 돌바닥이 존재했다. 천령온포(天靈溫鋪). 대지 깊은 곳의 온화한 영기를 끌어올려 상처받은 신체를 치유하는 천혜의 진법이었다.

설백현은 혜우를 천령온포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녀의 입술은 이미 검푸르게 변해 있었고, 호흡은 실가닥보다 가늘었다.

“사제…… 안 된다. 나는 이미…… 단전이 깨어졌다. 쓸데없이 내력을 낭비하지 마라.”

혜우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어깨를 저었다. 무인에게 단전의 파괴와 내맥의 단절은 곧 폐인이자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초연함이 서려 있었다.

설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혜우의 등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손을 그녀의 폐유혈(肺兪穴)에 얹었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

그의 가슴속에서 역천의 심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성을 돌파하며 심장 한구석의 감정을 기어이 뜯어내고 얻은 극강의 마기였다. 그러나 지금 설백현이 끌어올리는 기운은 파괴의 마기가 아니었다. 만물을 소생시키고 다시 뒤엎는, 역천의 생기(生氣)였다.

설백현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혜우의 등줄기를 타고 거침없이 흘러 들어갔다.

“아아……!”

혜우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보통의 내력이라면 이미 파괴된 내맥을 통과할 때 격통을 유발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의 진기는 달랐다. 거칠고 사나운 독초가 우거진 땅에 내리는 봄비처럼, 그의 기운은 부서진 맥상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찢어진 기맥이 하나하나 실타래처럼 엉겨 붙으며 다시 이어졌다. 검게 죽어가던 혈도가 붉은 생기를 되찾고, 거칠게 요동치던 심장박동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변화는 단전에서 일어났다. 사방으로 균열이 가 무너지기 직전이던 혜우의 단전이, 설백현의 순수한 역천결 진기가 주입되자마자 스스로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이 간 틈새마다 황금빛과 흑색의 기운이 스며들어 단단히 메워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넓고, 단단하며, 순도가 높은 탄탄한 단전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림에서 한 번 파괴된 단전이 이토록 완벽하게 복구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거스르는 기적이었다.

“후우…….”

설백현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손을 떼었다.

혜우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짚었다. 단전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맑고 강인한 진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찢어졌던 기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오히려 이전보다 배는 더 넓어진 기맥을 통해 내력이 막힘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내 단전이…… 복구된 것을 넘어 더 강해지다니.”

혜우는 경악 어린 눈으로 설백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설백현의 안색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기적을 행한 대가는 가벼운 법이 아니었다. 그의 단전 역시 극심한 소모로 인해 뒤틀리는 통증을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슬픔도, 기쁨도, 성취감도 거세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살아나셨으니 되었습니다.”

설백현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혜우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제의 목소리에서 예전의 따스함이 소멸해 가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무공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사제가 잃어가는 것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차마 기뻐할 수 없었다.

“사제…… 왜 무리한 짓을 하였느냐. 백화곡은 이미 끝났다. 남궁세가가 작정하고 나섰어.”

혜우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깊은 절망과 분노가 섞여 나왔다.

“남궁세가가 어찌하여 이곳을 침탈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정파의 명문이 아닙니까.”

설백현의 질문에 혜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명문이라 하여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 남궁세가 역시 방계들의 권력 다툼과 자원난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차기 가주인 남궁휘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약재 채무와 영토 수급권이다.”

“채무라니요.”

“수년간 우리 백화문이 명맥을 잇기 위해 남궁세가의 상단을 통해 들여온 영약과 약재들이 있다. 그 대금의 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지. 정파의 율법과 관부의 공문까지 등에 업고, 그 채무를 빌미로 백화곡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게야.”

혜우의 주먹이 하얗게 쥐어졌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백화곡 지하에 흐르는 영맥(靈脈)이다. 그 영맥을 독점하여 가문의 무인들을 양성하고, 쇠락해가는 남궁세가를 다시 무림의 반열에 올리려는 심산이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굴레 속에서, 몰락한 우리 문파는 그저 좋은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다.”

설백현의 눈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남궁세가. 그들은 평면적인 악당이 아니었다. 제 가문의 생존을 위해, 방계들의 목칼을 피해 혈족을 살리고자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정파의 명분을 쥐고 더욱 지독하게 백화문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이다.

“명분이라…….”

설백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들은 관부의 명도 문서까지 쥐고 있다. 만약 우리가 무력으로 그들을 몰살한다면, 백화문은 영원히 반역과 마도의 무리로 낙인찍혀 천하의 공적(公敵)이 될 것이다. 사제여, 제발 무모한 짓은 하지 말거라.”

혜우가 설백현의 소매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사제가 사부의 복수와 문파 재건을 위해 스스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설백현은 혜우의 손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떼어냈다.

“사부님께서는 평생을 세상의 오명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뼈를 깎는 듯한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그분의 유해를 이 문파의 조사당에 당당히 합사하는 것. 그리고 백화문을 천하 정상에 올려놓는 것. 그것이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정파의 명분이든, 세가의 생존이든, 제 앞길을 막아서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설백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이 낙루암 한구석에 위치한 낡은 무기고로 향했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 무기고 문을 열자, 부러진 칼자루와 녹슨 철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설백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벽 구석에 기대어 있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세월의 때가 시퍼렇게 슬어 있고, 겉보기에는 이끼가 잔뜩 낀 낡은 나무막대기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쇠처럼 묵직한 철목(鐵木)으로 만들어져, 마치 녹이 슨 듯한 기괴한 외형을 지닌 녹슨 목검이었다.

그것은 천살신마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무공을 익힐 때 쥐었던 수련용 목검이었다. 사부의 손때가 묻고, 그분의 거친 구도의 여정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유물이었다.

설백현이 손을 뻗어 그 목검을 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사부의 묵직한 기운이 전해지는 듯했다. 비록 날은 서 있지 않고 겉은 낡았으나, 그 비장함과 무게는 천하의 그 어떤 명검보다도 무거웠다.

“검에 날이 서 있지 않다고 하여 벨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백현이 목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스산한 검풍이 무기고 내부의 먼지를 단숨에 쓸어버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사부의 패도(霸道)를 이어받은 제자의 눈에는 오직 가로막는 자들을 부수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쿵――!

백화곡 전체가 크게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굉음이 고요한 산사를 뒤흔들었다.

낙루암 입구 너머, 백화문의 정문 방향에서 흙먼지가 치솟는 것이 보였다. 백화곡을 수호하던 마지막 결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소리였다.

“설마…… 벌써 안마당까지 들어왔단 말인가!”

혜우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설백현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말렸다.

“여기 계십시오.”

설백현의 음성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표면처럼 고요했다.

그는 녹슨 목검을 거머쥔 채, 천천히 낙루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사당 앞마당에는 이미 푸른 장포를 입은 남궁세가의 정예 무인 수십 명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살기 어린 검기가 백화문의 낡은 목조 건물들을 찌를 듯이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 선 중년 무인이 품속에서 황금빛 비단으로 감싸인 문서를 꺼내 들었다.

“백화문의 생존자들은 듣거라! 관부와 무림맹의 인가가 완료된 영토 명도 문서다! 오늘부로 백화곡의 모든 영토와 영맥은 남궁세가의 소유로 귀속되었음을 선포한다!”

천하를 삼킬 듯한 기세로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조사당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사부의 유해가 안치된 바로 그 조사당의 문턱을, 그들의 더러운 군화발이 짓밟기 직전이었다.

설백현의 손가락이 목검의 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단전에서 흑색의 역천 진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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