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둠을 뚫고 가느다랗게 새어 들던 바람 소리가 뚝 끊겼다.

낙루암 입구의 무너진 석벽 틈새로 스며드는 것은 밤이슬의 한기만이 아니었다. 쇠붙이 특유의 비린내와 가쁜 숨결을 억누르는 탁한 내력의 흐름. 사마혈의 수하들, 적혈맹의 살수들이 뿜어내는 농익은 살기(殺氣)가 동굴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죽은 노괴의 시체와 비급을 회수한다. 방해하는 싹은 남김없이 잘라라.”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약육강식(弱肉強食)의 논리가 지배하는 무림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의 시신이란 그저 탐스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설백현의 어깨가 느리게 들썩였다. 등 뒤에 단단히 묶인 사부의 유해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이미 식어 가고 있었으나, 조용히 끓어오르는 그의 마기(魔氣)는 도리어 심장의 고동을 차갑게 늦추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내려앉은 것은, 오직 눈앞의 적들을 파멸시키겠다는 잔혹한 의지뿐이었다.

“쥐새끼들이 너무 일찍 들이닥쳤군.”

설백현의 음성은 낮고 고요했다. 분노도, 두려움도 담기지 않은 무채색의 목소리. 그것이 도리어 동굴 안의 살수들에게 기괴한 압박감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선두에 서 있던 적혈맹의 척후장이 급히 도를 치켜세웠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도날이 설백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척후장의 눈이 설백현의 등 뒤에 묶인 포대,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부의 독특한 은발을 포착하는 순간, 그의 안광에 탐욕의 빛이 서렸다.

“천살신마의 시신이로군! 그리고 저놈이 마지막 제자 녀석인가. 비급은 이미 저놈의 손에 있을 터,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낼 필요도 없다. 사지를 잘라 비급의 행방을 불게 해라!”

척후장의 호령과 함께 세 명의 살수가 좌우를 포위하며 짓쳐 들어왔다. 그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꺾이며 매서운 참격이 설백현의 목과 목덜미, 그리고 옆구리를 동시에 겨냥했다. 살수문파 특유의 합격술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파공음이 동굴 벽에 부딪혀 기괴한 공명음을 냈다.

그러나 설백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오직 들이닥치는 도광(刀光)을 눈동자에 담았을 뿐이다.

‘느리다.’

신마역천결 1성의 경지에 도달한 그의 눈에는, 살수들의 신형이 허공에 멈춰 선 것처럼 고스란히 비쳤다. 기의 흐름, 근육의 뒤틀림, 도가 그리는 궤적의 맹점까지 전부 보였다.

스윽.

설백현이 가볍게 몸을 뒤틀었다. 단 한 보의 움직임이었다.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간 도날은 허공을 갈랐고, 옆구리를 노려오던 도 끝은 그의 장포 자락만을 스치며 빗나갔다.

“무슨……!”

공격이 허무하게 빗나가자 살수들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들의 합격술을 이토록 손쉽게, 그것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낼 수 있는 무인은 백화문에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러했다.

“내 사부의 육신에 손을 대려 한 대가다.”

설백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하나의 수인(手印)을 맺었다. 찬란한 백화문의 무공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마기가 그의 손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동굴 내부의 공기 자체를 급격히 얼려 붙이기 시작했다.

신마역천결 제1성, 마라섭혼인(魔羅攝魂印).

설백현의 손바닥이 허공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아무런 파괴력도 느껴지지 않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 손짓이 향한 허공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파동이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쿠구구구!

“억……!”

가장 먼저 짓쳐 들었던 살수의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눈, 코, 귀에서 검붉은 혈수가 뿜어져 나왔다. 겉으로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으나, 설백현의 수인이 뿜어낸 무형의 마기가 그의 체내로 스며들어 뼈와 장기를 순식간에 녹여 버린 것이다.

툭.

살수의 신형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뼈가 흐물흐물해진 육체는 마치 가죽 자루처럼 바닥에 뭉개졌다. 단 한 일격에 일류 수준의 살수가 흔적도 없이 절명했다.

“이, 이게 무슨 괴문(怪門)의 무공이냐!”

척후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그가 아는 백화문의 무공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검식이었다. 이토록 잔인하고,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생명을 부서뜨리는 마공(魔功)이 아니었다.

“괴문이라.”

설백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칠흑 같은 마기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 동굴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천하를 오만하게 굽어보던 사마혈의 개치고는 식견이 좁구나.”

“이놈이 감히 맹주님의 함자를……! 죽여라! 모두 달려들어 저놈의 대가리를 부숴라!”

남은 두 명의 살수와 척후장이 동시에 기를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도가 뿜어내는 검붉은 흑풍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사방이 칼날의 그물망으로 변해 도망칠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설백현에게는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수인을 맺지도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을 뿐이다.

핏!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강기가 탄환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살수들의 도광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긴 강기는, 그대로 두 살수의 미간을 관통했다.

퍼억! 퍼억!

머리뼈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살수의 신형이 뒤로 넘어졌다. 그들의 이마에는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쪽은 이미 검은 마기에 잠식되어 까맣게 타들어가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척후장 한 사람뿐이었다.

“히, 익……!”

척후장은 도를 떨어뜨렸다.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탐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날것 그대로의 공포만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낙루암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피에 주린 귀신이었다.

설백현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척후장은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 움직이지 않았다. 설백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그의 혈맥을 고사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툭.

설백현의 손이 척후장의 정수리에 얹어졌다.

“사마혈에게 전해라.”

설백현의 눈동자가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빛났다.

“내 사부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 그리고 그 유산을 탐낸 자들의 피로 이 백화곡을 붉게 물들여 주겠다고.”

“사, 살려…….”

콰직!

설백현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척후장의 두개골이 수박처럼 으스러졌다.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었으나, 설백현의 신형 주위를 감싼 검은 기류에 가로막혀 단 한 방울도 그의 장포에 닿지 않았다.

세 명의 살수와 한 명의 척후장. 적혈맹의 정예들이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시체로 변해 바닥을 뒹굴었다.

설백현은 숨을 나직하게 내쉬며 손에 묻지도 않은 피를 털어내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척후장의 시신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척후장의 품안에서 흘러나온 가죽 주머니와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그는 몸을 숙여 가죽 주머니를 집어 올렸다. 주머니의 가죽 겉면에는 검붉은 염료로 기괴한 문양이 낙인찍혀 있었다. 피 흘리는 눈동자 형상 아래로 세 갈래의 검은 선이 뻗어 나가는 모양새.

‘흑혈표식(黑血標式).’

설백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사부의 가르침 중에 사마혈의 최측근 척후 세력만이 지니고 다닌다던 독문의 표식이었다. 이 표식 자체에 미량의 기이한 독이 투입되어 있어, 전용 해독법이 없으면 만지는 것만으로도 중독되어 서서히 혈맥이 굳어 간다고 했다.

설백현은 신마역천결의 내력을 운기해 손바닥을 보호하며 표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사마혈, 네놈이 백화곡 깊숙이 첩자를 심어 두었다더니, 이 표식이 그 증거로군.’

그는 척후장의 시신 옆 바닥, 축축한 흙바닥 위에 손가락 끝으로 그 주머니에 새겨진 흑혈표식의 문양을 그대로 긁어 새겼다. 날카로운 손끝이 돌과 흙을 파고들며 정교한 낙인을 남겼다. 이 독의 성질과 표식의 구조를 완전히 머릿속에 각인해 두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이 표식을 역이용해 사마혈의 배후 공급망을 차단하고 첩자의 목을 조를 방도가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그려졌다.

그 작업을 마친 설백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쿵!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충격이 일어났다. 심장이 조여들고, 전신의 혈맥이 뒤틀리는 극심한 고통. 신마역천결의 구결이 스스로 회전하며 그의 단전을 압박했다.

[신마역천결 1성 안착. 인과의 대가를 수금한다.]

귓가를 때리는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 동시에 설백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그것은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영혼의 일부가 강제로 뽑혀 나가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었다.

“아…….”

설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이었다. 머릿속의 서랍 하나가 통째로 비워지듯, 소중한 무언가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사라져 가는 기억의 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눈바람이 휘날리던 어느 추운 겨울날.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 가던 어린 고아 소년의 앞에 나타났던 한 노인의 모습. 거칠고 투박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했던 손길로 소년을 거두어 주었던 사부와의 첫 만남.

그날 사부가 건넸던 따뜻한 만두의 온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짓던 호탕한 웃음소리, 그리고 사부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감사함.

그 모든 기억이, 마치 물 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빠르게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주 어릴 적 사부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순간의 감정, 사부의 표정, 그날의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직 차가운 공허함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사부님……?”

설백현이 등 뒤의 유해를 나지막이 불렀다.

묵묵부답. 등 뒤의 시신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눈물이 흘러야 마땅한 순간이었다. 사부와의 가장 소중했던 첫 기억을 잃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굳어 버린 얼음과 같았다.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것이 신마역천결의 대가였다.

강해질 때마다,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감정과 기억을 빼앗기는 형벌. 천하제일의 무력을 얻는 대신, 종국에는 감정 없는 무도의 괴물로 전락하게 만드는 가혹한 인과율.

“……결국, 진실이었군.”

설백현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는 감정을 잃어버리는 슬픔조차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정을 갈구할수록 정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모순. 그러나 그 모순이야말로 그를 더욱 강하고 냉혹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설백현은 옷자락을 추스르고 낙루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밖으로 나서자, 황폐해진 백화곡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때 백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다던 골짜기는 정사마의 침탈로 인해 붉은 핏빛과 거무죽죽한 탄흔으로 얼룩져 있었다.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낙루암 아래, 백화문의 본산이 있는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냄새였다.

설백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한 줄기 검은 연기처럼 허공을 가르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신법을 전개하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부의 유해를 백화문 조사당에 당당히 합사하겠다는 그의 갈망은, 감정을 잃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그의 영혼 깊숙이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맹렬한 집착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백화곡의 부서진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무인이 오갔을 그 유서 깊은 돌계단은 여기저기 깨지고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계단의 꼭대기, 백화문의 정문 앞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대사제 혜우였다.

그녀의 백색 도포는 이미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제 피인지, 적들의 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고, 그녀의 어깨와 옆구리에서는 여전히 신선한 선혈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혜우는 부러진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마다 폐부에서 끓어오르는 피 냄새가 섞여 나왔다. 그녀의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적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백화문의 마지막 불씨를 지키려는 듯 굳게 닫힌 문이 존재했다.

적들의 선두에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푸른 장포를 휘날리며 서늘한 검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백화문의 대사제여,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남궁세가의 고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검을 치켜세웠다.

혜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칠흑 같은 마기가 섞여 드는 것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낙루암 방향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얼굴에 일말의 빛과 함께, 깊은 슬픔이 서렸다.

그리고 혜우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며 돌계단 위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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