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식어 가는 육신은 낙엽보다 가벼웠다.

천하를 오만하게 굽어보던 효웅의 손가락은 이제 굴러다니는 마른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었다. 설백현은 사부의 메마른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는 이미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백현아.”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탁한 음성이 낙루암(落淚巖)의 어두운 동굴 벽을 긁었다. 천살신마(天殺神魔). 이름 석 자만으로 강호의 백도 무림맹과 흑도의 사패천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불세출의 거마(巨魔)가, 지금은 한 줌의 재로 변하기 직전의 장작더미처럼 누워 있었다. 사부의 깊게 패인 눈동자가 흔들리는 촛불을 담았다.

“이 사부의 업보가…… 결국 너를 이 비좁고 어두운 이도(泥途)로 밀어 넣는구나.”

설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턱밑을 꽉 막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물자 잇몸 사이로 비린 핏물이 배어 나왔다. 사부의 가슴팍에 새겨진 거대한 검흔은 이미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3년 전, 가장 믿었던 사제 사마혈의 배신과 정파 연합의 졸렬한 포위망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징표였다.

백화문(白花門).

한때 호북성을 지배하며 백색의 매화 향기를 천하에 날리던 명문정파였다. 그러나 오직 문파를 지키기 위해 마도(魔道)의 길을 택했던 천살신마를 배출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백화문은 정사마 양도의 잔혹한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다. 위선으로 가득 찬 정파는 백화문을 마교의 세작이라 매도했고, 실리를 쫓는 사파는 그들의 영토와 자원을 이리 떼처럼 뜯어먹었다. 결국 남은 것은 이곳 백화곡 깊숙이 숨겨진 낙루암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늙은 마두, 그리고 그의 유일한 제자 설백현뿐이었다.

“사부님, 말씀하지 마십시오. 진기를 모으셔야 합니다.”

설백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 얼음처럼 차갑던 그의 눈동자에 붉은 핏발이 섰다.

“바보 같은 녀석.”

천살신마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끝에 한 바가지의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졌다. 설백현이 다급히 신형을 기울여 사부의 등을 받쳤다. 사부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내력을 불어넣으려 했으나, 사부의 단전은 이미 깨진 항아리와 같아서 기운을 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본래 영고성쇠(榮枯盛衰)는 하늘의 뜻이어늘, 백화문이 몰락한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내가 남긴 은원(恩怨)의 사슬이 너무도 깊어,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이 태산보다 무겁겠구나.”

사부의 손이 설백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 십여 년 전, 정사마의 칼날을 피해 굶어 죽어가던 설백현을 거두어 따뜻한 죽을 먹여 주던 그 손길이었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을 전수했으나, 그것은 인간의 길을 포기하는 저주다. 경지가 도약할 때마다 너는 소중한 것을 잃을 것이다. 네 마음속의 가장 따뜻한 불씨부터 꺼져 가겠지. 그래도…… 가겠느냐?”

설백현은 사부의 손을 제 뺨에 더 세게 밀착시켰다.

“사부님의 유해를 백화문의 조사당에 합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화문의 이름을 다시 천하의 중심에 세울 것입니다. 그것이 제 삶의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정에 굶주렸던 소년이 자신에게 세상을 선물해 준 유일한 은인에게 바치는 맹세이자, 스스로를 옭아매는 거대한 심마(心魔)의 시작이었다.

“그래…… 가거라. 뒤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만 보고…….”

천살신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뺨을 비비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부님?”

설백현이 나지막이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동굴 안에는 오직 싸늘하게 식어 가는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사부님……!”

설백현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비통함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의 전신을 헤집어 놓았다. 세상을 잃은 듯한 상실감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다.

쿠구구구궁!

그 순간, 낙루암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동굴 입구를 봉인하고 있던 외적 대결계가 비명과도 같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계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정파 연합의 황금빛 부적들이 핏빛 마기에 오염되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너진다!”

동굴 천장에서 집채만 한 바위들이 거친 비명과 함께 낙하했다.

정파의 고수들이 낙루암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박아 두었던 봉인석들이 차례로 폭발하고 있었다. 사부의 죽음과 동시에, 그가 뿜어내던 강대한 마기가 사라지자 억눌려 있던 천재지변급의 반동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먼지와 바위 파편들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낙루암 입구가 완전히 무너지며, 거대한 폭풍이 동굴 내부를 휩쓸었다. 날카로운 돌 가루들이 채찍처럼 설백현의 살결을 찢고 지나갔다. 붉은 선혈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설백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사부의 싸늘한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켜야 한다. 사부님의 유해만큼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비통함과 분노가 심마의 불길이 되어 단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외적인 위기가 그를 덮쳤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십 톤의 바위벽. 피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깔려 죽을 판이었다.

내적인 심마와 외적인 천재지변의 동시 도래.

그것은 바로 사부가 남긴 역천의 무공, 신마역천결이 깨어나는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쿵! 쿵! 쿵!

설백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단전 가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마기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 신마역천결을 각성하고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너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지불해야 한다.

사부의 마지막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머릿속에서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화염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불길에 휩싸인 것은 십여 년 전,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날의 기억이었다. 얼어 죽기 직전이던 소년의 입에 따뜻한 미음을 넣어 주던 사부의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과 감사함. 소년의 가슴을 따뜻하게 대폈던 최초의 정(情)이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아아아윽!”

설백현이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 영혼의 일부가 가위로 오려지듯 영구히 떨어져 나가는 참혹한 거세의 아픔이었다. 사부와 함께했던 가장 따뜻한 추억이, 그를 향해 품었던 애틋한 슬픔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갔다. 눈물이 흐르던 자리가 서서히 얼어붙었다. 비통함으로 가득 찼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슬픔의 자리에 메마른 공허와 절대적인 살의만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공허의 틈새로,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적인 구결이 온몸의 혈맥을 타고 몰아쳤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 1성(一成) 각성.]

설백현의 두 눈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낙루암의 어둠을 집어삼켰다.

“……흐읍.”

짧은 호흡과 함께 설백현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집채만 한 암석들이, 그가 뻗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검은 장막에 가로막혔다. 허공에 우뚝 멈춰 선 바위더미들.

설백현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콰르르릉! 콰아아아앙!

공간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설백현을 짓누르던 수십 개의 거암들이 단 한 줌의 먼지도 남기지 않고 사방으로 분쇄되어 날아갔다. 쏟아져 내리던 파편 폭풍이 그의 신형 주위로 형성된 검은 기류에 부딪혀 허무하게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맨몸으로 결계의 붕괴와 천재지변을 뭉개 버린 파괴적인 무력.

자욱한 먼지 안개 속에서 설백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몸에는 단 한 점의 흙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억년 동안 녹지 않은 만년한빙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부의 죽음 앞에 비통해하던 소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사문의 재건과 복수라는 일념만을 품은 냉혹한 귀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백현은 사부의 유해를 부드러운 장포로 감싸 등 뒤에 단단히 묶었다. 사부의 몸은 가벼웠으나, 그가 짊어진 인과의 무게는 칠흑처럼 무거웠다.

그때였다.

스스스스-.

무너진 낙루암 장벽 너머, 자욱한 먼지 구덩이 사이로 은밀한 기척이 스며들었다.

단순한 짐승의 발걸음이 아니었다. 극도로 살기를 억누른 채 신형을 좁혀 오는 자들의 은밀한 움직임. 바닥에 깔린 자갈이 미세하게 눌리는 소리가 설백현의 예민해진 고막을 때렸다.

바스락.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핏빛 살기와 함께 동굴 입구를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의 차가운 안광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마혈의 수하들, 적혈맹(赤血盟)의 척후들이었다. 사부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 유산인 신마역천결의 비급을 찬탈하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든 무리들.

설백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조차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살의의 발현이었다.

“사부님.”

설백현이 등 뒤의 유해를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첫 제물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검은 마기가 그의 손끝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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