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가 백화곡 영맥 입구를 메웠다. 결계가 깨어지며 발생한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크하하하! 겨우 이따위 잔재들로 나를 막으려 했더냐!"

동굴 입구를 뒤흔드는 광오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마혈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붉은 도포는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도 핏빛을 발하고 있었고, 양손끝에서는 끈적한 혈강(血光)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설백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어붙은 호수와도 같은 안광이 사마혈의 전신에 꽂혔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겉모습과 달리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사마혈이 뿜어내는 기운은 과거 사부 천살신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바로 그 배신의 혈기였다.

"사마혈."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장단도 없었으나, 동굴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그래, 내가 이 배신자 놈들을 청소하러 직접 왔다. 네놈이 사부랍시고 모시던 그 늙은이가 죽을 때 내지르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구나. 제자라는 놈은 어찌 그리 스승과 똑같이 미련한가?"

사마혈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순간, 그가 품고 있던 적혈신공(赤血神功)의 내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훅 끼쳐오는 피비린내와 함께 맹렬한 독무가 동굴 벽을 녹이며 설백현을 향해 덮쳐왔다.

쿠구구궁!

설백현의 몸 안에서 진기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신마역천결의 마기가 사마혈의 혈기에 반응하여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죽여라.' '네 사부를 기만한 자다. 사문의 원수를 찢어 죽여라.'

뇌리를 잠식하는 광포한 환청이 고막을 두드렸다. 설백현의 눈가에 핏발이 서며 붉은 낙인이 새겨지듯 안광이 붉게 변했다. 심마(心魔)였다. 사부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을 잃고 마는 그의 치명적인 결함이, 사마혈의 극독 공세와 맞물려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

설백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마역천결의 구결이 역류하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경지가 도약할 때마다 치러야 했던 대가, 사부와의 추억과 온기가 뇌리에서 빠른 속도로 휘발되어 갔다. 기억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사부의 인자했던 미소가 흐릿한 실루엣으로 변해갔다.

"백현아!"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혜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오려 했다. 하지만 사마혈이 내뿜는 붉은 장풍의 여파가 그녀의 접근을 차단했다.

"하하하! 벌써 제 풀에 지쳐 자멸하는구나! 신마역천결을 익힌 대가로 미쳐버린 괴물이 되거라!"

사마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바닥을 내질렀다. 붉은 혈안(血眼)의 형상을 한 장풍이 설백현의 가슴을 향해 쇄도했다.

그 지독한 파멸의 순간이었다.

설백현의 품 안, 목덜미 근처에서 갑자기 시린 서기가 뿜어져 나왔다.

스스스스ㅡ.

9화에서 혜우가 자신의 손을 꼭 쥐어주며 건넸던 물건. 백화문의 잃어버린 옛 정화 무구이자 감정 제어기였던 '빙백한령주(氷魄寒靈珠)'의 쪼개진 파편이었다.

파편은 설백현의 심장 박동과 폭주하는 진기에 공명하며 찬연한 푸른 빛을 발했다. 얼음처럼 차갑고 맑은 영기가 그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 들끓던 단전의 마기를 단숨에 억눌렀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붉은 광기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두근.

심장의 고동이 차분해졌다. 붉게 물들었던 설백현의 안광이 다시 심연보다 깊은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광포한 폭마(暴魔)가 아닌, 지독할 정도로 침착하고 냉혹한 무신(武神)의 눈빛이었다.

슈우우우욱!

설백현은 가볍게 신형을 뒤로 물렸다. 사마혈이 자신만만하게 내지른 혈안의 장풍은 그가 방금 서 있던 반석을 때려 가루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어찌……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냐?"

사마혈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싹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자멸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설백현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설백현은 가슴팍에 닿은 한령주의 온기를 느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사마혈. 네놈은 사부님의 기만만을 기억하는 모양이구나."

"뭐라?"

설백현이 품 안에서 가죽 가방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열어젖히자, 누런 양피지 한 장이 드러났다. 사마혈의 눈동자가 그 양피지를 보는 순간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은 남궁가주 남궁휘가 몰락해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밀수로 확보하려 했던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독점지 지도였다.

"이, 이게 왜 네놈 손에……!"

"남궁휘가 이 지도를 믿고 적혈맹과 손을 잡았겠지. 적령화로 가문의 기력을 회복하고 백화문을 짓밟으려 했을 터."

설백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독점지는 이미 사흘 전에 내가 선점했다. 남궁세가의 가신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보급선은 끊겼고, 그들이 밀수하려던 적령화는 단 한 뿌리도 남궁세가에 도달하지 못했다. 남궁휘는 이미 빈껍데기뿐인 가문을 짊어진 채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있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했다. 남궁세가라는 든든한 자금줄과 방패막이가 사라진다면, 적혈맹 역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마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남궁세가의 자금과 적령화의 기운을 받아 적혈맹의 대업을 완성하려던 그의 치밀한 계산이, 설백현이라는 존재 하나에 의해 통째로 어그러진 것이다.

"네, 네놈이 감히 나의 대업을……!"

"대업이라니, 가당치 않다."

설백현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것은 신법이라기보다 공간을 접어 달리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스윽.

소리도 없었다. 바람조차 일지 않았다. 사마혈이 다급히 적혈강기를 사방으로 펼쳐 장막을 형성하려 했으나, 설백현의 검은 이미 그 장막의 가장 약한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고 있었다. 빙백한령주로 극대화된 이성이 사마혈의 무공적 빈틈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간파한 결과였다.

파아앗!

찰나의 순간, 동굴 내부에 한 줄기 검은 실선이 그어졌다.

"끄아아악!"

사마혈의 비명이 동굴을 찢었다.

그의 붉은 도포가 세로로 찢겨 나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백현의 검인 단천검의 끝자락이 사마혈의 왼쪽 뺨을 관통하여 귀밑까지 길게 찢어발겼다.

붉은 선혈이 사마혈의 일그러진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하를 오만하게 굽어보던 사파의 거두가, 단 한 번의 합 만에 처참하게 피를 흘리며 뒤로 나가떨어진 것이다.

"사부님의 무덤 앞에서 네놈의 피로 제를 올리겠다."

설백현이 검 끝에 맺힌 피를 털어내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사마혈은 뺨의 상처를 손으로 움켜쥐며 이빨을 갈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도포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설백현을 노려보던 그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크, 크흐흐…… 이 괴물 같은 놈. 하지만 내가 혼자 왔을 거라 생각했느냐?"

사마혈이 피 묻은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튕겼다.

딱!

맑은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무너진 결계 입구 너머의 어둠 속에서 기괴하고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부자연스러웠다. 붉은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오는 형체는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있었으며, 피부는 기괴할 정도로 푸르스름하게 죽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쥐고 있는 검과 몸에서 풍기는 내력의 기운은 명백히 정파 최고의 명문가, 남궁세가의 것이었다.

"휘, 휘아……?"

뒤편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혜우가 그 형체를 확인하고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설백현을 꺾기 위해 스스로의 영혼을 팔아넘긴 자. 사마혈의 기괴한 주술과 개조를 거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마수(魔獸)로 거듭난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휘가 붉은 안개 속에서 그 살기등등한 안광을 빛내며 설백현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파찰음이 동굴 내부에 길게 늘어졌다.

남궁휘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으나, 그를 움직이는 것은 가문을 구하겠다는 집념, 그리고 설백현을 향한 지독한 증오뿐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검기와 적혈맹의 핏빛 마기가 뒤엉켜 기괴한 보랏빛 기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설…… 백…… 현……."

남궁휘의 목구멍에서 쇠를 긁는 듯한 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뼈마디가 기괴하게 불거진 그의 손이 대검의 자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하하하! 제 가문을 살리겠답시고 스스로 적혈마공의 제물이 된 가련한 소가주다. 저놈이 품은 원한은 하늘을 찌르지. 자,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마인(魔人)이 되어 백화문을 도륙하는 꼴을 감상해 보아라!"

사마혈이 피 묻은 뺨을 실룩이며 외쳤다.

설백현은 단천검을 고쳐 잡았다. 가슴속 빙백한령주의 기운이 심장을 차갑게 식혀주었지만, 눈앞의 남궁휘가 뿜어내는 기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무인이 아니었다. 육체를 마공으로 개조하여 생명력을 내력으로 치환하는 극단의 비술,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결사태(決死態)였다.

남궁휘가 지면을 박찼다.

쿠웅!

그가 딛고 선 반석이 산산조각 나며, 쇠사슬이 허공을 갈랐다. 남궁세가의 절기인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이 마기의 궤적을 그리며 설백현의 목덜미로 쇄도했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가 동굴 천장의 종유석들을 무수히 떨어뜨렸다.

설백현은 신형을 비틀어 검풍을 피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으로도 뺨이 아릿하게 베여 나갔다. 그는 단천검을 비스듬히 세워 남궁휘의 검신을 받아쳤다.

깡ㅡ!

고막을 찢는 격돌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설백현의 무릎이 가볍게 굽혀졌고, 발밑의 흙먼지가 원형으로 쓸려 나갔다. 남궁휘의 완력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백현아, 조심해라! 저자의 단전은 정상적인 혈맥이 아니다! 마공의 역혈이 흐르고 있어!"

뒤편에서 혜우가 가슴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그녀의 두 손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설백현은 대답 대신 단천검의 검신을 미끄러뜨렸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동굴을 채웠다. 그는 남궁휘의 하복부를 향해 은밀하게 각법을 뻗었으나, 남궁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제 몸을 흐르는 검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검을 내리눌렀다.

콰아아앙!

동굴 벽면이 움푹 패며 흙돌이 쏟아졌다.

빙백한령주가 뿜어내는 극음의 서기가 설백현의 머릿속을 얼음처럼 투명하게 유지해주고 있었다. 이성이 극대화되자, 날뛰는 남궁휘의 초식 속에서 미세한 틈새가 보였다. 마공과 정종 무공이 완전히 융합되지 못해 생기는, 오른쪽 견 우혈 부근의 진기 정체 현상이었다.

'이곳이다.'

설백현의 신형이 유령처럼 가라앉았다. 검 끝이 남궁휘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고 단전을 파괴하기 위해 번개처럼 뻗어 나갔다.

바로 그 찰나, 사마혈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지며 기괴하게 실룩였다.

"베어 보거라! 그 검이 저놈의 단전을 꿰뚫는 순간, 남궁휘의 심장에 심어둔 '혈령폭진(血靈爆陣)'이 터져 나갈 것이다!"

설백현의 검끝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백화곡의 영맥 입구에서 저놈의 피가 터지는 날에는, 영맥 전체가 오염되어 백화곡은 영원히 생명이 자랄 수 없는 사지(死地)로 변할 터! 네놈 사부의 흔적이 남은 낙루암도, 그 유해도 모두 핏빛 독무 속에 썩어 문드러지겠지!"

사마혈의 웃음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흉포하게 공명했다.

이것이 그가 준비한 최후의 계책이었다. 남궁휘는 설백현을 죽이기 위한 무기인 동시에, 백화곡을 영원히 파멸시키기 위해 준비된 인간 신형 폭탄이었다.

검을 막아내며 저자를 죽여도 파멸이고, 죽이지 못해도 파멸이다.

그 짧은 망설임의 순간을 남궁휘가 놓칠 리 없었다. 광기로 가득 찬 남궁휘의 대검이 방어 태세를 잃은 설백현의 정수리를 향해 무섭게 낙하했다. 대기가 찢겨 나가는 파공음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절체절명의 **일촉즉발(一觸即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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