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를 짓누르는 대기가 무겁다 못해 질척였다.
사마혈이 입가를 피로 물들인 채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선 순간, 전장의 전면을 차지한 것은 이미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남궁휘였다. 가문의 혼을 팔아치우고 적혈맹의 마공을 받아들인 그의 신형은 기괴하게 팽창해 있었다. 살죽 아래로 꿈틀거리는 핏줄들이 마치 검은 뱀처럼 기어 다녔고, 그가 움켜쥔 대검 끝에서는 비릿한 혈망(血芒)이 흘러나와 바닥의 잡석들을 녹여 내렸다.
피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형국이었다.
쿠우우웅!
남궁휘의 대검이 백화곡의 영맥 동굴을 무너뜨릴 기세로 수직으로 낙하했다. 대기가 찢겨 나가는 이명과 함께 동굴 천장에서 거대한 종유석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설백현의 눈동자에 붉은 대검의 궤적이 들이닥쳤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의 가슴 깊은 곳이 얼어붙듯 차갑게 진동했다.
품속에 비장해 두었던 작은 주머니가 묵직한 한기를 뿜어냈다.
혜우가 백화곡의 마지막 보루로 건넸던, 백화문의 잃어버린 옛 정화 무구이자 감정 제어기인 '빙백한령주(氷魄寒靈珠)'의 쪼개진 파편이었다. 9화의 그 치열했던 난전 속에서 건네받은 뒤 늘 가슴팍에 품고 다니던 그 차가운 파편이, 지금 설백현의 혈맥을 따라 흐르는 신마역천결의 광포한 진기를 단번에 가라앉혔다.
두통으로 터질 것 같던 머릿속이 맑은 얼음판처럼 투명해졌다. 극음(極陰)의 서기가 전신을 관통하자, 미쳐 날뛰는 남궁휘의 검로가 한 가닥의 선으로 쪼개져 보이기 시작했다.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깡ㅡ!
단천검이 호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가벼운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벼락과 벼락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폭음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설백현의 두 발이 동굴 바닥을 한 자 깊이로 파고들었으나, 그의 척추는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죽어라……! 네놈이 죽고, 백화문이 사라져야 우리 남궁이 산다!"
남궁휘의 목구멍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지만, 눈빛만큼은 광기 어린 집착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방계들의 칼날이 내 동생들의 목덜미에 닿아 있다! 가문의 비고는 비었고, 영약은 끊겼다! 쇠락해가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마(魔)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괴물이라도 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악인의 표독함이 아니었다. 멸망의 벼랑 끝에 선 남궁세가의 후계자로서, 제 일족의 생존을 어깨에 짊어진 자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가가호호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뿜어내는 집념의 무게가 대검을 타고 설백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남궁휘의 검 끝이 부르르 떨리며 마기를 더했다. 그의 단전에 심어진 혈령폭진이 요동치며 주변의 영맥을 오염시키려 비릿한 안개를 피워 올렸다.
설백현은 그 광포한 안압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으나, 동굴 전체를 압도하는 묵직함이 있었다.
"네 가문의 무게가 삼천 일족의 목숨이라면."
설백현의 단천검 검신을 따라 청백색의 검기가 예리하게 돋아났다.
"내가 짊어진 것은 배신당해 죽어간 내 사부의 오명이며, 억울하게 명맥이 끊긴 백화문의 역사다. 네 생존의 갈망이 무겁다 한들, 내 증명의 집념보다 무거울 리 없다."
설백현의 왼손이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끄집어낸 것은 피에 젖은 오래된 양피지 조각이었다.
그것을 본 남궁휘의 붉은 안광이 크게 흔들렸다.
"그, 그것은……!"
"네가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방계들의 눈을 피해 가문 비고의 마지막 자금까지 털어가며 밀수하려 했던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매장 지도가 맞다."
5화의 그 은밀한 밀거래 현장에서 설백현이 목숨을 걸고 탈취했던 바로 그 지도였다. 남궁휘가 적혈맹의 손을 잡으면서까지 그토록 갈구했던 가문의 마지막 구명줄.
"네가 온 무림을 헤매며 찾던 구원의 열쇠는 이미 내 손에 있었다, 남궁휘."
설백현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떨어졌다.
"너는 처음부터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을 쫓아 가문의 혼을 팔아치운 것이다. 네 모든 발버둥은 이미 내 손바닥 위에서 끝났다."
"아아아아악!"
남궁휘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가문을 살릴 마지막 희망마저 이미 적의 손에 쥐여 있었다는 잔혹한 진실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붕괴된 이성의 틈새로 적혈맹의 마공이 폭주하며 그의 온몸에서 피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죽여버리겠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가겠다!"
남궁휘가 대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횡소천군(橫掃千軍)의 기세로 쏘아져 나오는 붉은 검풍이 동굴 벽을 사정없이 깎아냈다.
바로 그 순간, 설백현의 뒤에 서 있던 혜우의 형체가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은빛 침들이 달빛처럼 차가운 광채를 발했다. 백화문의 비전 정화 무구인 백화침(白花針)이었다. 그녀는 설백현이 빙백한령주의 한기로 남궁휘의 마공을 옭아매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백현아, 비켜라! 저자의 혈도를 봉쇄하겠다!"
쉬이익! 쉬이익!
세 줄기의 은침이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침들은 정확히 남궁휘의 오른쪽 견우혈(肩髃穴)과 기문혈(期門穴), 그리고 단전의 상부를 관통했다.
정종(正宗)의 맑은 진기가 담긴 백화침이 혈도에 박히자, 남궁휘의 몸을 흐르던 기괴한 마공의 역혈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마공과 정종 무공이 융합되지 못해 생기던 오른쪽 어깨 부근의 진기 정체 현상이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커헉!"
남궁휘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단전에 심어진 혈령폭진의 붉은 기운이 백화침의 정화력에 밀려 일시적으로 응고되었다.
'지금이다.'
설백현의 신형이 유령처럼 가라앉았다.
그의 신형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신마역천결 3성의 진기가 단천검으로 집중되었다. 검 끝이 부르르 떨리며 극도로 압축된 청백색의 검강(劍罡)을 형성했다. 그것은 마(魔)를 베고 정(正)을 바로잡는 무적의 예기였다.
스으윽.
바람 한 점 없는 동굴 내부에서, 오직 검이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소리만이 울렸다.
남궁휘의 대검이 설백현의 정수리에 닿기 직전, 설백현의 단천검이 남궁휘의 대검 검신을 비스듬히 스치며 올라갔다.
챙강!
쇠가 부러지는 맑은 소리가 동굴을 채웠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명검이, 설백현의 단천검 끝에서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흩날렸다.
검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와중에도 설백현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대검의 틈새를 뚫고 들어간 단천검의 끝이 남궁휘의 가슴팍, 혈령폭진이 도사리고 있는 단전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푸학!
검은 피가 솟구쳤으나, 사마혈이 장담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빙백한령주 파편이 뿜어내는 극음의 한기와 혜우의 백화침이 지닌 정화의 기운이, 혈령폭진의 기폭 장치인 마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동결시키고 정화해 버린 덕분이었다.
"쿠흑……."
남궁휘의 입에서 탁한 피와 함께 맑은 숨결이 흘러나왔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기괴한 흑적색의 혈관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본래의 살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동자에 맑은 이채가 돌아왔다.
남궁휘는 제 가슴을 관통한 단천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설백현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쇠락해가는 가문의 무게에서 마침내 해방된 자의 깊은 피로와 안도감이 묻어날 뿐이었다.
"내 가문은…… 비록 추하게 발버둥 쳤으나…… 남궁의 이름을 더럽힌 죄는…… 내 목숨으로 씻겠다."
남궁휘의 무릎이 천천히 꺾였다.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야 했던 청년 천재의 비장한 말로였다.
그의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진기가 백화곡의 영맥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오염이 아닌, 가문의 정종 진기가 영맥의 상처를 치유하는 온화한 흐름이었다. 남궁휘는 그렇게, 가문의 무게를 내려놓고 성불(成佛)하듯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설백현의 가슴속에서, 쿵 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소멸하는 느낌이 들었다.
화아아악!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설백현의 영혼을 휩쓸었다. 신마역천결의 잔혹한 인과율이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경지가 도약하고 가공할 무력을 발휘한 대가로, 그의 기억 한 조각이 영구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부 천살신마와 함께 보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의 기억이었다. 화로 옆에서 사부가 서투른 솜씨로 구워주던 감자의 고소한 냄새, 제자의 흙 묻은 뺨을 거친 손으로 닦아주며 호탕하게 웃던 사부의 목소리.
'백현아, 무공이란 말이다…….'
그 따뜻했던 목소리가, 그 정겨웠던 냄새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마모되어 먼지처럼 흩어졌다.
설백현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으나, 그의 표정은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슬픔조차 온전히 느끼지 못할 만큼, 그의 감정은 이미 메말라가고 있었다. 정을 갈구할수록 감정을 잃어가는 가혹한 형벌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백현아……!"
혜우가 비장한 눈빛으로 설백현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서 흐르는 따뜻한 온기만이, 설백현이 여전히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닻이었다.
"이, 이럴 수가……! 남궁휘의 혈령폭진을 정화해 내다니!"
저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의 최후의 보루이자 백화곡을 파멸시킬 인간 폭탄이 무력화되자, 그의 눈에 극도의 광기와 공포가 서렸다.
"크흑…… 네놈들이 기어코 내 계획을 망쳐 놓는구나!"
사마혈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품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기괴한 해골 모양의 부적, '혈령인(血靈印)'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다! 이대로 무너지느니, 백화곡 전체를 피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마!"
사마혈이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혈령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깨뜨렸다.
콰아아앙!
동굴 입구 너머, 백화곡 전체를 에워싸고 있던 적혈맹 맹도들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사마혈이 그들의 심장에 미리 심어두었던 혈폭 금술(血爆禁術)이 전방위로 발동된 것이다. 수백 명에 달하는 맹도들의 육신이 핏빛 안개로 터져 나가며, 가공할 마기가 백화곡의 영맥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땅이 뒤틀리고, 동굴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백화곡 전체가 피의 폭풍 속으로 가라앉는 대파멸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