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먹구름이 백화곡의 하늘을 무겁게 짓눌렀다.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고, 그 안에는 비린내 섞인 살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낙루암 앞마당에 홀로 선 설백현의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였다. 그의 두 눈은 칠흑을 담은 듯 깊고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신마역천결 3성을 돌파하며 치른 대가. 그의 가슴속에서 슬픔도, 기쁨도, 분노조차도 얼어붙어 부서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직 하나. 그의 품에 안긴 작은 오동나무 상자만은 그의 손끝에 닿아 있었다. 사부 천살신마의 유해가 담긴 합사 상자. 감정을 잃어가는 가혹한 형벌 속에서도, 그의 손가락은 상자의 모서리를 부스러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무(武)의 괴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붙잡고 있는 마지막 이성의 닻이었다.

"백현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혜우였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정사마의 연합 살육단이 협곡 입구를 완전히 포위했다. 남궁세가의 철혈무사들과 적혈맹의 흉도들이 산맥을 타고 개미떼처럼 밀려오는구나. 그 수가 수백에 달한다."

설백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의 고저가 전혀 없는, 마치 서리 내린 돌바닥처럼 서늘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찌할 셈이냐? 이대로 낙루암을 고수하기에는 저들의 기세가 너무도 흉포하다."

설백현은 천천히 품 안의 오동나무 상자를 품 깊숙이 고정했다. 그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피할 길은 없습니다. 사부님의 유해를 모실 이 백화곡을 단 한 치도 적들의 피로 더럽히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설백현은 이미 며칠 전부터 백화곡 전역의 지세를 파악하여 정식 방어 군진을 수립해 둔 상태였다. 과거 천살신마가 남긴 문파의 비전 진법을 복원하고, 백화문의 남은 제자들과 계곡에 의탁한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두었다.

"혜우 사매. 백화난분진(白花亂紛陣)을 가동하십시오. 적들이 협곡의 좁은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아군이 아닌 지형과 진법이 그들을 먼저 맞이할 것입니다."

"알겠다. 즉시 제자들에게 전령을 보내마."

혜우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설백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팍에 와닿는 단단한 감각을 느꼈다. 혜우가 이전에 건네주었던, 백화문의 잃어버린 옛 정화 무구인 빙백한령주(氷魄寒靈珠)의 쪼개진 파편이었다. 비록 깨진 조각에 불과했으나, 가끔 심마가 뇌리를 뒤흔들 때마다 그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하고 차가운 영기가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잡아주곤 했다.

설백현은 검을 고쳐 잡고 협곡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마른 흙먼지가 소리 없이 가라앉았다.

***

백화곡 입구, 험준한 암벽 사이로 수많은 횃불이 일렁였다.

그 선두에는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남궁휘가 서 있었다. 그의 화려한 청색 창포는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잘생긴 얼굴은 극도의 피로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가문의 몰락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방계들의 음모 속에서 혈족을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무림맹의 이름 아래 억지로 징발된 중소 가문들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황보세가의 방계 무사들과 하북의 도관에서 온 도사들. 그들의 눈빛에는 멸문 위기의 백화문을 토벌한다는 명분보다는, 적혈맹과 남궁세가의 기세에 눌려 억지로 칼을 쥐었다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가득했다.

"남궁 가주, 저기 놈이 나타났소!"

가신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협곡 안쪽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백색 무복을 입은 청년이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설백현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일절의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숨을 쉬지 않는 석상(石像)이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이질감에, 앞서가던 철혈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궁휘가 검을 뽑아 들며 포효하듯 외쳤다.

"설백현!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목을 베어 내 아우들과 가신들의 원한을 갚고, 이 백화곡을 남궁의 이름 아래 굴복시킬 것이다!"

그의 외침은 절박했다.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싸움에서 이겨 백화문의 자원과 영맥을 독점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은 남궁휘의 기세등등한 외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품 안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남궁휘. 네놈이 가문의 비고를 모두 털어, 사파의 무리들과 밀거래를 하면서까지 손에 넣으려 했던 물건이 이것이더냐?"

설백현이 양피지를 펼쳤다. 달빛 아래 드러난 지도의 형태를 본 순간, 남궁휘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그것이…… 어떻게 네 손에……!"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전설의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자생지가 상세히 적힌 지도였다. 남궁세가가 몰락을 막고 방계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가문의 명운을 걸고 밀수로 확보하려 했던 최후의 생존 자원줄. 5화에서 설백현이 우연히 탈취했던 바로 그 지도였다.

"이 지도의 원본은 오직 나만이 가지고 있다. 지도가 가리키는 적령화의 군락지 역시 이미 내 수하들이 봉인해 두었지."

설백현의 건조한 목소리가 협곡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남궁세가의 비고는 텅 비었고, 너희가 기댈 곳은 적혈맹의 간악한 혀뿐이다. 남궁휘, 너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정사마의 연합이라는 맹약 아래 스스로 꼭두각시가 되었으나,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닥쳐라! 그 지도를 내놓아라!"

남궁휘가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르며 도약하려 했다. 그러나 설백현은 그를 보지 않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중소 가문의 무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궁세가는 이미 속이 곪아 터져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 적혈맹의 사마혈에게 가문의 명맥까지 저당 잡힌 자들의 장단에 놀아나,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자가 누구냐?"

설백현은 양피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백화문은 오늘부로 이 적령화의 채굴권을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가문들에게 공평히 분배할 것이다. 남궁세가의 독점을 막고, 강호의 진정한 의기(義氣)를 세우고자 한다. 억지로 끌려와 목숨을 버릴 바에야, 무기를 내려놓고 백화문의 동맹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도모하라!"

그 선언은 벼락과도 같았다.

남궁세가와 적혈맹의 압박에 시달리던 중소 가문의 가주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적령화라는 거대한 이권, 그리고 명분 없는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퇴로가 동시에 열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흔들리지 마라! 저놈은 마교의 괴수다!"

남궁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남궁 가주, 미안하오. 우리 황보가는 더이상 명분 없는 살육에 동참하지 않겠소."

"우리 도관 역시 마찬가지다. 백화문의 제안은 합당하다. 무기를 거두어라!"

무인들이 하나둘씩 검을 칼집에 쑤셔 넣었다. 수백 명에 달하던 연합군의 대열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개 방어 문파에 불과했던 백화문이, 단 한 장의 지도와 설백현의 묵직한 지략으로 인해 순식간에 강호 중소 세력들을 규합하는 '종문의 기둥'이자 핵심 동맹의 맹주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악! 설백현!"

남궁휘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설백현을 향해 검을 찔러왔다. 가문의 종말을 직감한 자의 처절한 발악이었다.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검을 가볍게 비껴 올리며 남궁휘의 내력을 흘려냈다. 단 한 번의 격돌. 팅! 맑은 쇳소리와 함께 남궁휘의 검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고, 그의 신형은 바닥을 굴렀다.

"가라. 네놈의 목숨은 아직 사부님의 제단에 바칠 가치조차 없다."

설백현의 냉혹한 축객령에, 남궁휘는 피를 토하며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가신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은 이미 가문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었다.

***

싸움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설백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으윽……."

머리를 쪼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전신을 덮쳤다. 신마역천결의 부작용. 경지가 도약할 때마다 감정을 영구히 잃어가는 형벌과 함께, 그의 뇌리 속에서 사부와의 따뜻했던 기억들이 강제로 지워져 가고 있었다. 사부의 얼굴이 흐려질 때마다, 그의 가슴속 심마가 폭주하듯 소용돌이쳤다.

"백현아!"

혜우가 다급히 달려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과 함께, 그녀가 쥐고 있던 빙백한령주의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극음(極陰)의 차가운 냉기가 설백현의 가슴으로 침투했다.

화끈거리던 뇌리가 서서히 식어갔다. 설백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하게 서려 있던 붉은 광기가 가라앉았다.

"사매…… 고맙습니다."

"말을 아끼거라. 지금은 네 몸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다."

"아닙니다. 적들의 본진이 들이닥치기 전에, 사부님이 남기신 마지막 유진을 깨워야 합니다."

설백현은 혜우를 이끌고 낙루암 뒤편, 깊고 어두운 동굴로 향했다. 그곳은 백화곡의 영맥이 흐르는 가장 깊은 원천이자, 천살신마가 은거하기 전 삼중의 봉인을 걸어두었던 비림(秘林)이었다.

동굴 내부로 들어설수록 사부의 흔적이 짙어졌다. 사부가 거처하던 소박한 석실과 그가 평소에 앉아 무공을 연마하던 반석이 보였다.

설백현은 품 안에서 사부의 유해가 담긴 오동나무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석실 중앙에 위치한 고대의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사부님. 제자가 왔습니다."

그가 나직이 읊조리며 제단 앞의 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신마역천결의 순수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웅웅웅!

제단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사부의 유해 상자에서 푸른 안개와 같은 영기가 뿜어져 나와 석벽에 새겨진 고대의 비문들과 결합했다. 그것은 천살신마가 은거 전투 전, 백화곡 전체를 외적으로부터 영구히 보호하기 위해 설치해 두었던 최종 방어 유진, '신마천선진(神魔天旋陣)'의 작동 열쇠가 반응하는 소리였다.

동굴 벽면에 새겨진 황금빛과 흑색의 고대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듯 요동쳤다. 그 광채는 동굴을 벗어나 백화곡 전체의 산맥을 감싸 안으며 거대한 장막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 사이로 신비로운 광휘가 내리쬐었고, 백화곡 일대에 강력한 방어 결계가 완성되었다.

"성공했구나……."

혜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유진이 살아있는 한, 그 어떤 대규모 군대라 할지라도 함부로 백화곡을 침탈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안도는 찰나에 불과했다.

쿠구구구궁ㅡ!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방금 완성된 신마천선진의 결계가 위치한 백화곡 영맥 입구 쪽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 기운은……!"

설백현의 눈동자가 급격히 좁혀졌다.

결계를 격파하며 밀려 들어오는 기운은 단순한 무인의 내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의 피와 영혼을 갈아 넣은 듯한 극독(極毒)과 광포한 혈기(血氣)였다.

동굴 입구 너머, 붉은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크하하하! 겨우 이따위 잔재들로 나를 막으려 했더냐!"

광오하고 간교한 웃음소리가 협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붉은 도포를 휘날리며, 양손에 붉은 혈광(血光)을 내뿜는 중년인이 무너진 결계의 장막을 밟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과거 천살신마를 배신하고 적혈맹을 구축한 장본인.

사마혈(司馬血)이 마침내 백화곡 깊숙이 그 잔혹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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